소설리스트

경화수월-115화 (115/161)

115화.

연주는 좀처럼 낫지 않는 감기 때문에 한동안 일손을 놓았다. 온종일 방 안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축내고 있으려니 온몸에 좀이 쑤시는 기분이 들었다.

“그 사람은 오늘 늦는다고 했고……. 오랜만에 산책하러 나가 볼까?”

오늘은 견우직녀가 상봉한다는 칠석. 지금쯤 밤하늘에 은하수가 반짝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도도 챙겨 가야지.”

탁상을 뒤적여 정엽이 그려 준 지도를 챙긴 연주가 영서각을 나섰다. 목적지는 지난번 정엽과 함께 산책할 때 봤던 수국 연못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오른쪽, 그다음은 왼쪽……. 마지막엔 연못까지 쭉 걸어가면 되는구나.”

지도를 꼼꼼히 살피며 정원에 도착한 연주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드디어 혼자서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이 뿌듯함은 곧 탄성으로 바뀌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수국이 더 늘었네?”

물 위에 둥둥 뜬 수국을 발견한 연주가 연못 가까이 다가갔다. 바위틈에 앉아 물에 잠긴 수국을 어루만지고 있으려니, 잠시나마 더위가 가시는 듯했다.

“정엽이 내 얘길 기억하고 있던 건가? 뭐……. 이것도 나쁘지 않지.”

연주는 올여름 가뭄 때문에 꿈에 그리던 취옥호 여행을 포기했던 것을 떠올렸다. 규모로 보나 정취로 보나, 후원의 연못은 취옥호에는 못 미쳤지만 그럴싸하게 분위기를 내기엔 충분했다.

연주는 더위도 쫓고 기분도 낼 겸 비단신과 버선을 벗은 뒤 연못에 발을 담갔다. 그녀는 첨벙첨벙 물소리를 내며 어린아이처럼 물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연못에 물결이 일어날 때마다 수국 꽃이 물 위를 분주하게 떠다녔다. 연주의 머리 위로 직녀가 수놓은 듯한 영롱한 은하수가 반짝였다.

“와아, 예쁘다.”

칠석임에도 비구름이라곤 보이지 않는 밤하늘을 바라보던 연주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끝에 진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비구름이 없는 걸 보니 올해는 서로 만나지 못한 모양이네…….”

“누가 누구를?”

불쑥 뒤에서 다가온 정엽이 연주에게 물었다. 멀거니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그녀가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놀랐잖아요.”

“놀라긴. 그보다 아까 그건 무슨 말이야?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

“내가 아니고 견우직녀요. 오늘이 칠석이잖아요.”

정엽을 향해 타박하듯 대답한 연주가 부루퉁한 얼굴로 잔잔한 물결 위에 발을 굴렀다.

“난 또 뭐라고.”

“왜요. 슬프지 않아요? 1년에 단 한 번밖에 만나지 못하는 연인이라니.”

“슬프긴. 그저 주어진 책임을 잊고 태만하게 굴다가 옥황상제의 벌을 받은 것뿐이잖아.”

“……뭐라고요?”

연주는 지극한 사랑의 대명사인 견우와 직녀를 나태한 죄인으로 전락시킨 정엽이 황당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엽은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한데, 견우직녀가 만나지 못한 걸 네가 어찌 알아?”

“칠석에는 견우직녀가 만나 기쁨의 눈물을 흘려서 비가 내린다는 전설이 있잖아요.”

“더 이해할 수 없네. 기쁜데 웃어야지 울긴 왜 울어?”

정말 여인의 마음이라곤 조금도 모르는 사람다운 발상이었다.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꾹 참은 연주가 머리를 흔들었다.

“당신도 여기 와서 발 담가 볼래요?”

“내가 애야?”

“그럼 나는 애고요?”

빈 옆자리를 툭툭 치며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하는 연주를 굽어보던 정엽이 고개를 돌렸다. 이런 때 자연스럽게 옆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괜히 민망하고 쑥스러워서 선뜻 그녀의 말을 따르기 망설여졌다.

“애는 아닐지 몰라도 사내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맨발을 내보이는 걸 보면 적어도 요조숙녀라곤 할 수 없잖아.”

“그래요. 나 요조숙녀 아니니까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앉아요. 계속 올려다보기 힘들단 말이에요.”

정엽을 나무란 연주가 그의 손을 억지로 끌어당겼다. 눈치만 살피던 정엽은 못 이기는 척 연주의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제는 혼자 수련을 할 셈인가?’

한숨을 쉰 연주가 통 여유라고는 모르는 정엽을 향해 보란 듯이 물장구를 쳤다. 사방으로 튀기는 물방울에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던 그는, 갓 잡은 은어처럼 팔딱거리는 작은 발과 희고 매끈한 종아리를 발견하고 귓불을 붉혔다.

“물이 다 튀잖아. 이러다 옷 다 젖겠어. 또 감기 걸리고 싶어?”

하지만 장난기가 발동한 연주는 일부러 정엽이 있는 쪽으로 물을 차올리며 마냥 재밌어했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별똥별 하나가 떨어졌다.

“어? 저기 봐요!”

별똥별을 발견한 연주가 호들갑을 떨면서 정엽을 향해 소리쳤다.

“어서 소원을 빌어요!”

“뭐?”

정엽이 당황해하는 사이 연주는 두 손 모아 눈을 꼭 감고 소원을 빌었다. 급한 마음에 떠오르는 소원이 중구난방이었지만, 그녀는 꼼꼼하게 소원을 빈 뒤 한참 만에 눈을 떴다.

아까부터 소원을 빌기는커녕 눈을 꼭 감은 연주의 고운 옆얼굴을 훔쳐보느라 바빴던 정엽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무슨 소원을 빌었어?”

“음, 많아요. 첫째로 가족들의 건강, 둘째로 당신의 성공적인 기우제, 마지막은 오늘이 칠석이니까 직녀에게 바느질 실력이 좀 더 늘게 해 달라고 빌었어요.”

손가락까지 꼽아 가며 자기가 빈 소원을 줄줄 읊는 연주를 바라보던 정엽이 희미하게 웃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의 마음속에 아직 제 존재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가족들 건강이나 기우제는 그렇다 치고, 손재주는 갑자기 왜? 너는 자수 실력도 좋고 옷 짓는 솜씨도 뛰어나잖아.”

“내 실력이 뛰어난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아니 뭐…….”

내심 대답을 기대하는 듯한 연주의 얼굴을 발견한 정엽이 어름어름 대답했다.

“네가 지은 옷이 제일 편하더라고. 그래서 네가 지어 준 옷들을 아직도 입고 있어.”

“……네?”

“자, 봐.”

연주를 향해 옷소매를 뒤집어 보인 정엽이 재빨리 옷소매 사이로 드러난 팔목을 감췄다. 순식간이긴 했지만 분명 소매 안쪽에 해홍화 자수가 놓여 있었다.

“상공국에서 지은 옷은 네가 지은 것만큼 편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잖아.”

“…….”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은 연주가 어색하게 웃었다. 별똥별 때문에 잠시나마 그와의 대화가 즐거웠는데, 이렇게 갑자기 마음을 드러내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친왕씩이나 돼서 낡은 옷을 입고 돌아다니면 남들이 비웃을 거예요.”

“옷이든 보석이든 오래됐다는 건, 그만큼 가치 있고 소중하다는 뜻 아니겠어?”

“못 본 새에 말솜씨가 청산유수가 됐네요. 그럼 당신은 무슨 소원을 빌었어요?”

연주가 불편해하며 말을 돌리는 것을 알아차린 정엽이 고민 끝에 대답했다.

“네 소원이 이뤄지게 해 달라고 빌었어.”

대충 대답하는 걸 보니 보나 마나 소원 같은 건 빌지도 않은 거겠지.

꼭 칠석이 아니더라도 미신과는 거리가 먼 정엽을 익히 아는 연주가 타박하듯 말했다.

“그게 뭐예요. 별똥별이 날마다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좋은 기회를 그렇게 성의 없이 흘려보내면 어떡해요?”

불신에 찬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연주를 황당하다는 듯 응시하던 정엽이 항변했다.

“그래 뭐, 나도 소원을 빌긴 빌었어.”

“그게 뭔데요?”

“이런 날 거짓말하면 하늘이 벌을 내릴지도 모르니까…….”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정엽이 연주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천천히 말했다.

“……행복해지게 해 달라고 빌었어. 앞으로도 너와 지금처럼 행복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정엽의 진심 어린 고백에 연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처럼’ 행복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말이 왠지 슬프게 들렸지만, 정작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연주는 예나 지금이나 정엽과 미래를 함께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하지만 혼자 하는 사랑은 힘겹고 외로운 법이다. 한때 누구보다 열렬히 정엽을 사랑했기에 연주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연주는 그저 정엽이 언젠가 모든 걸 내려놓고 편해지기를 바랐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 차분히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게 뭐가 어려운가. 기다림이라면 이제 이골이 난 연주였다. 하지만 정엽에게 쓸데없는 희망을 안겨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기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말아요. 자칫 마음의 상처만 늘어날 뿐이니까.”

이제 더는 정엽과 한 공간에서 지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연주가 망설임 끝에 말을 이었다.

“기우제 준비는 잘돼 가나요?”

“예식 준비는 향주 자사가 열성적으로 나선 덕에 문제없이 마쳤어.”

“그럼 이제 곧 재계에 들어가야겠네요. 미리 방을 정리하고 거처를 분리하는 게 좋겠어요.”

재계 중엔 파, 마늘과 같은 오신채가 든 음식을 피하고, 술과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예법이었다.

“재계는 닷새 뒤부터야. 재계 장소도 안가가 아니라 기우제를 지내는 황산(黃山) 근처의 재궁(齋宮)이고. 네가 거처를 옮길 필요 없어.”

“이번 기우제는 꼭 성공해야 하잖아요. 그만큼 정성을 들여야죠. 사천감이 기우제 날짜를 칠석 이후로 잡은 건 당신을 궁지로 몰려는 태자의 술수잖아요.”

칠석이 지나면 절기상 가을로 접어드는 입추였다. 가을비가 내리지 말란 법은 없지만, 메마른 땅을 적실 만큼 충분한 비가 내릴 시기가 아니었다.

“태자는 당신의 실패만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걱정도 안 돼요?”

“괜찮아. 내가 기우제에 실패하더라도 너는 내게 실망하지 않을 거잖아.”

연주의 근심 어린 목소리에 피식 웃은 정엽이 대꾸했다. 그녀가 지적하지 않아도 자신이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는 것쯤은 정엽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디선가 비구름을 만들어 올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래서 정엽은 훗날 자신을 덮칠 위험과 혼란보다 분명한 실체를 가진 연주 한 사람이 더 중요했다.

내가 위험에 처한다 해도 절대 나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을 사람.

“그건 그렇지만, 나는 당신이 꼭 기우제에 성공했으면 좋겠어요.”

연주는 정엽을 완전히 외면하지도, 그렇다고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작게 속말을 털어놓았다. 그런 연주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정엽이 한숨을 삼키며 대답했다.

“그럼 내가 처소를 옮길게. 너는 영서각에서 지내는 게 편하잖아.”

“……네.”

각자의 최선을 선택한 두 사람의 시선이 캄캄한 하늘가를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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