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되묻는 정엽의 표정은 마치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았다. 새초롬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던 연주가 이내 웃으며 답했다.
“그런 걸 뭐 하러 고민해요.”
“무슨 말이야?”
“내가 당신을 미워하지 않듯 당신도 나를 미워하지 않잖아요. 그러니 당신이 내게 무얼 먹이든 독 같은 걸 탔을 리 없죠.”
정엽은 해맑은 연주의 미소에서 저를 향한 신뢰를 읽고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똑똑하네.”
예전에는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 연주를 미련하다고 비난하기 바빴던 정엽이었다. 하지만 안가에서 머물며 지켜본 연주는 그저 순수하고 다정다감한 여자일 뿐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한수 저택에서 지내던 시절이 더 그리운 건지도…….’
사철 칼바람이 부는 한수는 언제 전쟁이 벌어질지 모르는 삼엄한 곳이었다. 그래도 그 저택에서만큼은 편히 쉴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연주가 함께 있었기 때문이리라.
마음이 따뜻해진 정엽은 연주의 믿음에 부응하듯 선뜻 여분의 열홍주를 가져와 그릇에 덜어 주었다. 용수당을 먹을 때처럼 눈을 빛내던 그녀는 열홍주를 홀짝홀짝 잘도 마셨다.
연주를 흐뭇하게 지켜보던 정엽은 아직 가라앉지 않은 열 때문인지, 아니면 취기 때문인지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발견하고는 그녀의 낯을 주의 깊게 살폈다.
‘어쨌든 활기도 있고 정신은 또렷해 보이니 괜찮겠지.’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고 판단한 정엽은 연주가 두 번째 그릇을 거의 다 비우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갈아입을 옷을 꺼내 돌아왔다.
“혼자 앓느라 고생했어. 땀을 많이 흘렸을 테니 갈아입어.”
“…….”
연주는 처음 보는 새 옷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뒤늦게 매일 아침 새 옷과 소셋물, 화장품 등을 준비해 준 게 안가의 하인이 아니라 정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이면 분주하게 영서각 안팎을 오가기에 그저 일이 바빠 그런 줄만 알았는데…….’
돌이켜 보면 이곳에는 엄연히 하인이 있으니 정엽이 아침마다 분주할 필요가 없었다. 만감이 교차한 연주가 뒤이어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 시선을 어서 나가라는 신호로 오해한 정엽은 연주의 손에 들린 그릇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이것들을 치울 겸 밖에 나가 있을게.”
말을 마친 정엽이 금세 주변을 정리하고는 휑하니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문간을 잠시 멍한 표정으로 주시하던 연주가 침상 위에 덩그러니 남은 옷들을 뒤적였다.
‘이곳에서 내가 편히 지낼 수 있었던 게 다 정엽 덕분이었구나.’
연주는 새삼 저를 위해 애써 준 정엽이 고마웠다. 자신이 그렇듯 그가 저를 벗으로 여기고 귀히 여겨 준 것은 아니겠지만, 자고로 변화에는 시간이 약이었다.
“이런 것도 참……. 나쁘지 않네.”
너무 멀지 않게, 또 너무 가깝지도 않게. 앞으로도 정엽과 그저 마음이 맞는 친구처럼 지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나저나, 진짜 취한 건가…….”
마실 당시에는 맛만 좋고 알싸한 주향도 느껴지지 않아 신나게 들이켰는데, 뒤늦게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술에 단것을 잔뜩 넣은 탓에 더 빨리 취기가 오른 모양이었다.
“더 취하기 전에 얼른 옷을 갈아입어야지.”
정엽을 밖에 오래 세워 두지 않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옷을 갈아입자고 생각한 연주가 바삐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그녀를 괴롭히던 두통과 현기증은 낮보다 심하지 않았다.
연주는 입고 있던 옷을 하나하나 벗기 시작했다.
가슴 높이 동여맨 치마끈을 풀자, 얇은 갑사로 지어진 하늘하늘한 연꽃 치마가 물처럼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치마 안으로 넣어 입었던 물빛 저고리와, 이불 속에서 식은땀을 흘리느라 젖어 버린 겹겹의 속치마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밤중에도 무더운 여름이지만, 맨살에 밤공기가 닿자 오스스 소름이 일었다.
“여름인데도 춥네.”
차가운 밤공기에 불평하던 연주가 재빨리 침상 위에 놓여 있던 새 옷을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보송하게 잘 마른 새하얀 속치마를 가슴에 동여매고, 저고리 소매에 한쪽 팔을 꿰어 넣었다.
그런데 남은 팔을 소매에 넣으려 손을 휘적인 순간, 쨍강하며 머리에서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놀라서 발밑을 살펴보니, 머리에 꽂혀 있던 은비녀가 보였다. 바로 선황후가 혼인 선물로 내주었던 나비 비녀였다.
“아, 이런…….”
선황후가 남겨 준 비녀는 향주에서 지내는 동안 몸에서 한시도 떼어 놓지 않을 만큼 아끼던 장신구였다. 급한 대로 저고리를 걸친 연주가 앞섶의 옷고름을 맬 겨를도 없이 황급히 쪼그려 앉았다.
“다행이다. 크게 상하지는 않은 것 같네.”
비녀를 집어 상하거나 이가 빠진 곳은 없는지 꼼꼼히 살핀 연주가 무릎에 힘을 주고 다시 일어섰다. 취기 오른 몸을 갑자기 일으키니 갑자기 눈앞에 별이 반짝이는 듯했다.
쿵!
연주는 어지러운 시야에 당황해 크게 비틀거리다 침상 기둥에 몸을 부딪쳤다. 중심을 잡지 못한 몸은 또 쿵 소리를 내며 차가운 바닥 위에 쓰러졌다,.
그 순간, 닫혀 있던 방문이 벌컥 열리며 놀란 얼굴을 한 정엽이 뛰어들어 왔다.
“무슨 일이야?”
“아, 그게…….”
“괜찮아?”
연주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방문 앞을 지키고 있던 정엽은 주저앉아 있는 연주를 발견하곤 황급히 그녀를 잡아 세웠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
미처 여미지 못한 앞섶 사이로 반쯤 드러난 수밀도(水蜜桃)가 정엽의 시선을 붙잡았다.
농익은 과육처럼 뽀얗고 탐스러운 가슴. 그사이를 가르는 움푹 파인 골짜기에 정엽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제 됐어요. 내가 할게요.”
연주는 벌어진 저고리를 황급히 부여잡았다. 본능적으로 후끈 뒷덜미가 달아올랐던 정엽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흠, 흠.”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니 뒤늦게 연주가 손에 쥐고 있는 낯익은 은비녀가 눈에 띄었다.
‘저건 어머니가 혼인할 때 부황께 받았다던 비녀인데…….’
어머니의 유품이 왜 연주의 손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엽은 이 난처한 상황부터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연왕부의 안주인 자리가 빈 지도 벌써 여러 해. 애써 아닌 척해 왔지만, 영서각에서 연주와 함께 지내는 동안 정엽의 자제력은 거미줄처럼 얇아진 지 오래였다.
한순간이라도 이성을 잃는다면, 그간 연주에게 쌓은 신뢰가 물거품처럼 사라질 게 뻔했다.
“취한 모양이네. 그러게 열홍주도 술이라고 적당히 마시라 했잖아.”
정엽은 일부러 퉁명스럽게 연주를 탓했다. 그러고는 연주가 침상에 앉을 수 있도록 최대한 떨어져서 조심스럽게 부축했다.
평소처럼 연주의 팔을 잡아 주었을 뿐인데,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부드럽고 말캉한 살집에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미, 미안해요. 옷을 갈아입는데 비녀가 떨어져서…….”
연주는 무안함에 몸을 옆으로 슬쩍 돌렸다. 그러곤 서둘러 옷매무새를 정리하려 애썼다.
하지만 뜻밖의 상황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 탓인지, 평소에는 눈 감고도 잘만 매던 옷고름이 자꾸만 우스꽝스럽게 뒤엉켰다.
“하, 이게 왜…….”
졸지에 옷고름 하나 제대로 못 매는 바보가 된 것 같아 연주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앞섶의 매무새는 점점 엉망이 되어 갔다.
연주가 곤란해하는 동안 애써 딴짓을 하며 열기를 누그러뜨린 정엽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려서부터 부황의 경계를 피하느라 표정과 낯빛을 꾸미는 데 이골이 난 그는 요동치는 정욕을 힘껏 짓밟고 연주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내가 매 줄게. 이리 내.”
“괜찮아요. 내가 할게요.”
“밤새도록 옷고름만 붙잡고 있을 셈이야? 잠깐이면 돼.”
어떻게든 혼자 해결해 보려 애쓰던 연주가 고개를 푹 숙였다. 차라리 가위로 저고리를 조각내는 것이 더 빠르지 않을까 싶을 지경이었다.
“잘 안 되면 그냥 다른 옷을 입으면 돼요. 이게 단단히 엉켜 버려서…….”
“일단 해 보고.”
연주의 거절 아닌 거절에도 그녀와 마주 앉은 정엽이 차분하게 옷고름을 풀기 시작했다.
단단히 엉켰던 옷고름은 오래지 않아 다시 두 가닥으로 풀렸다. 정엽은 본능적으로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려는 시선을 손끝에 고정한 채 저고리를 동여매기 시작했다.
지금껏 여인의 옷을 벗기기만 해 봤지, 제 손으로 입혀 준 적은 없다 보니 옷고름만 보는데도 별수 없이 야릇한 기분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이는 연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사람의 옷을 챙겨 주는 건 늘 내 몫이었는데…….’
연주는 정엽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그는 평소처럼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혼례를 올리고 초야를 치를 때조차 조금의 설렘도 드러내지 않던 정엽이 아닌가.
연주는 저 혼자 과민하게 반응했다는 생각에 작게 한숨을 삼켰다.
“됐다.”
느리지만 정성껏 연주의 옷고름을 매듭진 정엽이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고마워요.”
조금 엉성하긴 하지만, 정엽이 매어 준 옷고름의 태가 제법 정갈했다. 옷고름의 고리와 꼬리를 동시에 잡아당기며 매듭을 단단하게 조인 연주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이제 얼른 누워. 푹 자야 낫지.”
“네.”
침상에 걸터앉아 있던 연주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정엽은 얇은 이불을 끌어와 그녀의 목 위까지 꼼꼼하게 덮어 주었다.
그러고는 습관처럼 연주의 이마를 짚었다.
“그래도 열이 심하지는 않네.”
“잘됐네요. 챙겨 줘서 고마워요.”
이곳에 올 때부터 정엽과 한방에서 지내는 불편함은 감수하기로 했던 것이고, 그가 저를 배려해 주는 것만은 분명 고마운 일이었다.
더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한 연주가 몸을 모로 돌렸다. 자연히 연주의 이마를 덮고 있던 정엽의 손이 떨어졌다.
“그래, 쉬어.”
정엽은 연주의 체온이 남은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내 차가운 밤공기를 찾아 방 밖으로 나섰다.
돌아선 정엽의 뒷덜미가 붉었지만, 연주는 미처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