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싫어요.”
연주의 고집에 한숨을 쉰 정엽이 빠르게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얼굴이 이렇게 창백한데 괜찮긴 뭐가 괜찮아.”
병색이 드리운 연주의 낯을 확인한 정엽이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서늘한 손바닥에 엉기는 연주의 체온이 평소보다 뜨거웠다.
“역시 열이 있네. 오늘은 푹 쉬는 게 좋겠어.”
정엽은 연주를 침상으로 데려가기 위해 그녀를 자연스럽게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연주의 고집은 꺾일 줄 몰랐다.
“어젯밤 떠올린 배합을 시험해 봐야 해요. 조금만 더 하면 새 향을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통 몸을 아낄 줄 모르는 연주 때문에 화가 난 정엽이 끝내 언성을 높였다.
“꼭 오늘 해야 하는 일은 아니잖아. 너 요 며칠 잠도 제대로 안 잤어. 그렇게 몽롱한 정신으로 만든 향이 어떻게 좋을 수가 있겠어?”
정엽은 더 이상 실랑이를 벌일 필요가 없다는 듯 연주를 번쩍 안아 들고 성큼성큼 침상으로 향했다.
“상태가 호전될 때까지 조향 도구와 향료는 압수야. 그러니 여기서 꼼짝 말고 쉬어.”
연주를 침상 위에 눕힌 정엽이 제법 엄한 목소리로 으름장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이 상황이 못마땅한 연주는 대답 대신 인상을 찡그리며 입술을 꼭 앙다물었다.
“당장 향을 만들어 내라고 누가 칼을 들고 쫓아오는 것도 아니잖아. 뭐 어때.”
정엽은 심통 난 연주를 달래듯 작은 이마와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뺨을 다정하게 쓸었다.
정엽의 말마따나 열이 나긴 나는지, 연주는 오늘따라 그의 손길이 차갑게 느껴졌다. 서늘한 손이 이마에 닿으니 어젯밤부터 저를 괴롭히던 두통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도 같았다.
“일찍 돌아올게. 푹 자.”
연주의 눈동자를 곧게 들여다보며 약속한 정엽이 이부자리를 살펴 준 뒤 영서각을 떠났다.
이윽고 그의 명을 받은 하인이 들어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조향 도구와 향료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정말로 하나도 남겨 두지 않았네.’
하인은 눈 깜짝할 새에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물건들을 모두 챙겨 밖으로 나갔다.
텅 빈 작업대를 먼발치에서 망연자실하게 건너보던 연주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요 며칠 밤샘을 밥 먹듯 하며 일했던 건 사실인지라, 멍하니 천장을 보며 누워 있으려니 금세 졸음이 쏟아졌다.
“그래. 오늘만 쉬자. 오늘만…….”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 정엽이 알면 또 잔소리를 할 거야. 으휴, 잔소리쟁이.
어떤 면에서는 지독하게 무심하면서, 또 어떤 면에서는 쓸데없이 꼼꼼한 정엽이었다. 곁에 없는 사람을 향해 불만을 늘어놓던 연주가 천천히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 * *
깊게 잠들었던 연주는 불현듯 갈증을 느끼고 눈을 떴다. 휘장 너머로 햇살이 쏟아지는 것을 보니 아직 날이 저물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분명 여기 자리끼가 있었는데…….”
연주가 무거운 몸을 일으켜 머리맡을 살폈다. 그런데 하인이 치워 버렸는지 평소 자리끼가 놓여 있던 자리가 휑하니 비어 있었다.
“어쩌지……?”
타는 듯한 갈증에 지친 연주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짝 마른 입술 새로 뜨거운 숨결이 흩어졌다.
연주는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차라도 마시기 위해 덮고 있던 이불을 걷고 맨발로 바닥을 딛고 섰다.
“으으…….”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 때문인지 발끝에서부터 오한이 몰려왔다. 게다가 몸을 일으키자마자 시야가 빙빙 돌아, 혼자서는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아앗!”
일순 온몸의 맥이 풀려 휘청거리던 연주가 침상에 무너지듯 걸터앉아 가쁜 숨을 뱉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연주는 하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갈라진 목소리를 가다듬고 목청을 틔웠다.
“밖에 아무도 없는가.”
“…….”
“이보게……!”
하지만 아무리 하인을 불러 봐도 문밖에선 그 어떠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말을 할 때마다 머리가 울리면서 진득한 두통까지 밀려왔다.
“이럴 때 정엽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당장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해지자 이 자리에 없는 정엽이 원망스러웠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지 창가는 주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좀 있으면 날이 저문다는 뜻이었다.
“일찍 돌아온다고 했는데……. 오늘은 늦나?”
정엽은 요 며칠 늦지 않게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잘 지켰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연주의 시선이 하염없이 문가를 맴돌았다.
하지만 정엽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뭐 원래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도 아닌걸. 며칠 일찍 들어왔다고 그 말을 믿은 내가 바보지.”
에잇, 모르겠다.
몸이 무거우니 만사가 힘들고 귀찮았다. 연주는 엉금엉금 침상으로 기어올라 가 이불을 덮고 누웠다. 가만히 누워 있으면 이 정도 갈증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한여름에 왜 이렇게 춥지……?’
연주는 점점 심해지는 오한에 몸서리치며 몸을 공처럼 둥글게 말았다. 조금만 걸으면 목을 축일 수 있는 찻물이 있는데, 고작 몇 걸음을 걷지 못해 갈증을 견뎌야 한다니 갑자기 서러움이 북받쳤다.
“그냥 가화랑 금란을 데려오겠다고 할걸.”
이 순간 연주는 안전을 위해 저택에 남겨 두고 온 시녀들이 무척 그리워졌다.
커다란 저택에 완벽히 홀로 남겨졌다는 생각에 지독한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새삼 가족과 떨어져 혼자가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실감이 나기도 했다.
지금껏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서 잘 지내고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곁에 아무도 없을 때 몸까지 아프니 스스로가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오늘 안에 정엽이 돌아오긴 하겠지.’
이런 상황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정엽뿐이라니.
연주는 결국 정엽에게 기대야 하는 제 처지가 우스워 실없이 웃었다. 하지만 아무리 자조한들 그가 제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조력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빨리 왔으면 좋겠다.”
연주는 자꾸만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느릿느릿 눈을 깜빡였다. 한동안 마른침을 삼키던 그녀는 묵직한 두통에 취해 다시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연주야. 채연주.”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연주가 느릿느릿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밤이 깊었는지 처소 곳곳에 등불이 일렁이는 가운데, 정엽의 얼굴이 눈동자에 비쳤다.
“일어나서 이것 좀 마셔 봐.”
정엽은 연주를 일으켜 앉히기 위해 그녀가 뒤집어쓴 이불을 살짝 끌어 내렸다. 하지만 금세 오한을 느낀 연주는 이불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인상을 쓰고 버텼다.
그녀는 저를 밖으로 끄집어내려는 정엽을 거부하듯 이불 귀퉁이를 더욱 끌어당겼다.
“그렇게 꽁꽁 싸매고 있으면 더 힘들어. 이것만 먹고 마시고 다시 자자. 그럼 되잖아.”
대체로 무심하게 들리던 정엽의 목소리는 이 순간 숫제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몸이 아프면 누구든 어린아이처럼 투정이 많아진다는 걸 그도 아는 걸까?’
끈질기게 저를 설득하는 정엽의 목소리를 들으며 차츰 정신을 차린 연주가 마지못해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앉았다.
“아…….”
온종일 수마에 시달린 탓일까. 아니면 여름 감기가 지독한 탓일까. 조금만 움직여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삭신이 쑤시고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연주가 힘겨워하자, 정엽은 그녀가 침상 머리맡에 편히 기댈 수 있도록 등 뒤에 딱딱한 베개를 대어 주었다. 그러고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릇을 내밀었다.
연주는 뚱한 얼굴로 정엽이 내민 것을 받아 들었다. 그릇에는 귤, 유자, 사과, 계피 냄새가 향긋하게 올라오는 진한 자줏빛 액체가 찰랑거렸다. 거기에는 한입 크기로 썰린 과일이 동동 떠다녔다.
“이게 뭐예요?”
“열홍주(熱紅酒)야.”
“열홍주요?”
“그래. 포도주에 과일을 넣고 끓인 약주야. 과일뿐만 아니라 얼음 설탕도 듬뿍 넣었으니 먹기에 나쁘지 않을 거야. 숟가락은 여기.”
순순히 대답한 정엽이 연주가 과일과 음료를 쉽게 떠먹을 수 있도록 그녀의 손에 숟가락을 쥐여 주었다.
연주는 감기에 걸린 사람에게 술을 먹이려 드는 정엽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일단 과일로 만든 것이라 하니 과일 특유의 단맛을 기대하고 조심스럽게 열홍주를 떠 마셨다.
‘……생각보다 괜찮네?’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일까. 한번 경계심이 허물어지고 나니 새콤달콤하면서도 뒷맛은 씁쓸한 열홍주가 술술 넘어갔다. 게다가 따뜻하게 끓인 것이라선지 으슬으슬 춥던 몸에 금세 훈기가 돌았다.
“어때? 먹을 만해?”
“네. 맛있어요.”
“입에 맞아서 다행이네.”
열홍주를 홀짝거리는 연주의 모습을 확인한 정엽은 그제야 안도한 듯, 표정이 조금 나긋해졌다.
연주는 정엽이 돌아왔다는 안도감 덕분인지, 아니면 열홍주 덕분인지 속절없이 앓던 낮보다 몸이 훨씬 가벼워졌다고 느꼈다.
“이런 건 다 어디서 배운 거예요?”
“서쪽 국경에 머물 때 만난 색목인(色目人)이 알려 준 거야. 그들이 사는 나라에선 풍한에 들었을 때 약 대신 열홍주를 마신다고 하더군.”
전쟁 말고는 아무 관심도 없는 줄 알았는데?
정엽의 말을 들은 연주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열홍주를 떠 마셨다. 생각에 잠겨 열홍주를 마시다 보니 그릇이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이거 더 없어요?”
연주는 정엽에게 빈 그릇을 내밀며 물었다. 빈속에 달고 따뜻한 음료가 들어가니 뒤늦게 허기가 졌다.
“과일을 넣어 만들긴 했지만 이것도 엄연히 술이야. 또 마시면 분명 취할 테니 그쯤 해 둬.”
“당신도 어차피 약 대신 준 거잖아요. 누가 동이째 마신다고 했나요?”
“…….”
“딱 한 그릇만 더 마실게요. 그거 마신다고 설마 취하겠어요?”
아무리 재촉해도 정엽의 망설임이 길어지자, 연주가 놀리듯 말했다.
“설마 술에 독이라도 탄 거예요?”
열홍주 한 그릇에 금세 기운을 차린 듯 농담까지 던지는 연주를 신기해하던 정엽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면 어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