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오늘도 저녁 식사 전에 돌아올게.”
정엽은 기우제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매일 아침 안가를 떠났다가 이른 저녁에 반드시 돌아왔다. 그는 바쁜 와중에도 연주와 매일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침상을 그녀에게 양보하고는 그 아래서 잠들었다.
집으로 돌아올 때면 연주가 좋아할 만한 주전부리를 사 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잘 다녀와요.”
하루하루 평화로운 날들이 쌓이면서 연주 역시 정엽과 함께하는 일상에 익숙해졌다. 차츰 그를 향한 경계심과 염려를 내려놓으니 안가에서의 생활도 훨씬 편해졌다.
처음 향주에 나타났을 때만 해도 연주의 눈에 정엽은 저와 달리 아직도 마음 정리가 덜 된 듯해 보였다. 당연히 한방에서 같이 지내야 한다는 것이 내심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의외로 전처럼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지도, 그녀와 부딪치지도 않아서 함께 있어도 불편한 줄 몰랐다.
* * *
오늘도 일찍 관사에서 돌아온 정엽은 곧장 영서각으로 향했다. 연주는 그의 예상대로 여전히 일을 하고 있었다.
‘어제도 밤늦게까지 일하는 것 같던데…….’
정엽은 조향에 집중하고 있는 연주에게 방해가 될까 선뜻 방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문간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그녀를 지켜보았다.
신중하게 향료를 계량하고, 배합하고, 완성된 향을 시향해 보고. 같은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도 호수 같은 연주의 눈망울은 매 순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일에 몰두한 연주의 모습은 가끔 조향사라기보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존재를 연구하는 탐험가 같았다.
‘그러고 보면 바닷가 사람들은 배를 타고 망망대해로 나가 미지의 세계를 오가곤 하지.’
정엽은 새삼스럽게 연주의 뿌리가 남해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연주와 헤어지기 전, 정엽은 그녀를 얌전하고 조용한 사람이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연주는 정말로 행동해야 하는 순간에 불같이 타올라 물러나는 법이 없었다.
연주는 낮에는 음전하기 그지없던 얼굴로 밤이면 사랑을 속삭이며 사람을 홀렸고, 겁도 없이 한겨울에 말을 타고 무작정 북쪽 끝으로 달려오기도 했다.
사랑이 식었을 땐 얼음보다 차갑게 이별을 선언하고, 재혼을 강요하는 황제 앞에선 기세 좋게 반항할 줄도 알았다.
그리고 한없이 다정하다가도 저의 애원을 뿌리치고 기어이 다시 떠나 버릴 만큼 매몰차기도 했다.
‘이제 보니 양처(良妻)가 아니라 요부로군.’
연주가 제 존재를 알아채 주길 기다리던 정엽이 한숨을 삼켰다. 일에만 정신이 팔려 저를 애태우는 연주가 너무도 얄미웠다. 하지만 그런 모습조차 어여뻐 보이기만 하니 어쩌면 문제는 자신에게 있는지도 몰랐다.
‘늘 생각하지만 정말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홀로 자조하던 정엽이 기다림에 지쳐 문간을 똑똑 두드렸다.
“일하는 게 그렇게 좋아? 향을 만들 땐 눈이 반짝반짝하네.”
인기척에 정신을 차린 연주가 향료를 계량하던 손을 멈추고 뒤늦게 얼굴을 들었다. 그녀는 정엽의 말을 한참 곱씹어 보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거, 칭찬이에요?”
“응, 칭찬이야.”
자기가 물어 놓고도 망설임 없이 돌아오는 대답에 오히려 놀란 연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곤 잠시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하는 말은 다 욕인 줄 아는 건가?’
연주의 행동을 지켜보던 정엽이 안으로 들어와 억울하단 듯 말을 이었다.
“너는 대체 내 얘기를 어떻게 듣는 거야?”
“무슨 말이에요?”
“어째 내 말은 곧이곧대로 안 듣는 것 같아서.”
“으음, 그러니 평소에 말을 좀 곱게 하지 그랬어요.”
퉁명스럽게 대답한 연주가 다시 저울로 시선을 옮겼다. 약이 오른 정엽이 삐딱하게 대답했다.
“지금 말을 곱게 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일 것 같은데.”
“어째서요?”
“내가 가진 게 좀 많거든.”
연주는 자못 의기양양한 정엽의 태도에 설핏 미간을 좁혔다. 이에 정엽은 보란 듯이 연주가 좋아하는 간식 봉투와 품속에 숨겨 온 서신을 꺼내 보였다.
서신의 겉봉에는 익숙한 필체로 ‘사랑하는 누이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어서 줘요!”
금세 표정이 밝아진 연주가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정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로선 오라비의 편지를 받기 위한 행동에 불과했지만, 정엽의 눈에는 그것조차 마냥 귀엽게만 보였다.
‘그냥 줄까?’
연주에게 앙갚음을 하기 위해서라도 가진 것을 쉽게 내주지 않으려던 결심이 흔들렸다. 깊게 한숨을 내쉰 정엽은 결국 순순히 채신의 서신과 간식 봉투를 내밀었다.
간식을 탁자에 내려놓은 연주는 재빨리 서신의 봉투를 비틀어 내용을 확인했다.
[사랑하는 연주에게.
3황자의 만행이 도를 넘었다고 들었다. 그래도 네 곁에 전하께서 계시다니 무척 마음이 놓인다.
오라비는 무탈하다. 부디 너 또한 평안하길 바란다.]
연주는 국본이 된 소기를 황태자가 아닌 3황자라고 지칭하는 대목에서 그를 향한 오라비의 반감을 읽었다.
‘혹시 오라버니가 수도에서 황태자와 직접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걸까?’
품성은 다정다감하지만, 그 속엔 쇠심줄 같은 고집을 숨기고 있는 오라비였다. 짧은 서신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보던 연주는 오라비를 향한 걱정에 생각 많은 표정을 지었다.
“왜? 뭐라고 썼는데?”
어둡게 변해 가는 연주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정엽이 물었다.
“오라버니는 늘 무탈히 지내고 있다 하는데, 정말 그런 건지 알 수가 없어서 걱정되네요.”
“……그렇군.”
연주가 이렇듯 제 오라비의 안위를 걱정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는가. 평해왕의 후계자가 된 몸으로 대세를 따르지 않고 여전히 저를 지지하며 위험을 불사하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는 사과를 해야 하는 걸까? 잠시 고민하던 정엽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채신이 내 세력의 중심이 되어 태자를 견제하고 있는 건 사실이야.”
“정엽.”
“네 오라비의 재주가 비상한 건 너도 알잖아.”
“…….”
“네 오라비를 믿어. 그리고 나를 믿어. 말처럼 쉽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연주를 향해 웃어 보인 정엽이 급격히 무거워진 분위기를 감지하고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날이 더워서 간식이 다 녹았겠어. 하인을 시켜 빙고에 넣어 두었다가 꺼내 줄까?”
“음, 오늘은 뭘 사 왔는데요?”
“네가 좋아하는 얼린 용수당(龍鬚糖)을 사 왔어.”
용수당은 엿을 실처럼 가늘게 뽑아 만든 보들보들한 과자였다. 한입 베어 물면 달짝지근하게 녹아 마치 구름을 삼킨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용수당은 녹으면 안 되는데!”
냉큼 간식 봉투를 연 연주가 용수당을 집어 입 안에 넣었다. 아직 냉기가 남아 있어 제법 형태가 유지된 과자는 겉에 묻은 고소한 땅콩 가루와 어우러져 달콤하게 혀끝에 감겼다.
“용수당은 언제 먹어도 맛있네요.”
“그렇게 좋아?”
어색하게 돌린 말에도 금세 밝아진 연주의 기색을 확인한 정엽이 안도했다.
무더위를 잊게 하는 냉기와 고소하고 달콤한 맛에 중독된 연주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용수당을 하나 더 꺼내 먹었다.
정엽은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으로 손끝에 묻은 땅콩 가루를 야무지게 핥아 먹는 연주를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잘 먹는 건 좋은데 적당히 먹어. 낮에도 밥 대신 얼린 과일만 찾는다며.”
“낮에 방 안에 있으면 얼마나 더운데요. 뜨거운 음식은 입에 대기도 싫어요.”
“그러다 배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 게다가 요샌 덥다고 이불도 잘 안 덮고 자잖아.”
연주는 마치 제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꿰고 있는 듯한 정엽의 말에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그러다 감기 걸려.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 거 알지?”
“……원래 이렇게 잔소리가 많았어요?”
정엽의 잔소리에 질린 연주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다 문득 코끝이 간지러워 연거푸 재채기를 했다.
“에취! ……에취!”
한동안 양처럼 순하던 정엽의 눈이 연주의 재채기 소리를 듣자마자 세모꼴로 변했다.
“설마 벌써 감기에 걸린 거야?”
정엽은 심각한 표정으로 연주를 향해 다가왔다. 열이 나는 것은 아닌지 이마를 짚어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연주는 그의 손길을 피하며 몸을 뒤로 빼기 바빴다.
“아니에요. 그냥 우연히 재채기가 난 것뿐이라고요.”
“정말?”
“네, 정말이요.”
정엽은 연주의 대답에도 못마땅한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연주는 결백하다는 듯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예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음 순간, 연주의 등 뒤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음식을 방 안으로 들일까요?”
“어서 들이게!”
살았다!
저녁 식사 시간을 알리는 하인의 목소리에 재빨리 대답한 연주가 서둘러 탁자 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엽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연주의 손을 갑자기 움켜쥐며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다. 그러고는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영서각에 식탁과 의자가 더 필요하다. 필요한 가구를 먼저 들인 뒤 음식을 가져오너라. 또 후식으로는 생강탕을 준비해라.”
생강탕은 감기에 좋은 음식이었다. 정엽이 여전히 저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연주는 괜스레 낯이 간지러워 저를 뚫어져라 굽어보는 정엽의 시선을 피했다.
그날 이후, 연주는 정엽의 고집에 못 이겨 저녁마다 생강탕을 마셨다. 하지만 생강탕만 믿고 무리한 탓일까. 그녀는 오래지 않아 제 몸이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아, 왜 이러지…….”
이른 아침부터 작업대에 앉은 연주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문질렀다. 관사로 나갈 채비를 서두르던 정엽은 일시에 모든 행동을 멈추고 물었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무거운 머리를 흔들며 어떻게든 어지럼증을 쫓으려는 연주를 지켜보던 정엽이 이맛살을 구기며 손짓했다.
“아니긴. 이리 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