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정엽의 물음에 연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자고 싶었지만, 그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으니 그럴 수 없었다.
“언제 왔어요?”
침상에서 일어나 뻑뻑한 눈두덩을 손끝으로 꾹꾹 누른 연주가 잠에 취한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사실 정엽은 아침 일찍 돌아와 연주를 침상으로 옮긴 후 내내 부채질을 해 주고 있었지만, 그녀에게 부담을 안기고 싶지 않아 거짓말로 둘러댔다.
“피곤해 보여. 조금 더 자지 그래?”
“아뇨, 충분히 잤어요.”
“눈이 토끼 눈이 됐는데.”
발갛게 충혈된 연주의 눈을 가만히 응시하던 정엽이 침상에서 일어나려는 그녀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잤어?”
정엽의 목소리가 묘하게 들떠 있었다. 혹시 나를 기다렸던 건 아닐까 하는 작은 기대가 피어올라서였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주는 그의 손길을 마다하고 일거리가 쌓여 있는 탁자로 향했다.
“아직 마치지 못한 일이 있어서요.”
딱딱한 의자에 앉은 연주가 길게 하품하고는 잠을 쫓듯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그러고는 어젯밤처럼 작업을 위해 주변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고단한 얼굴로 향료 상태를 일일이 점검하는 연주를 잠자코 지켜보던 정엽이 작은 의자를 끌고 와 그녀의 곁에 앉았다. 그러더니 아까처럼 자연스럽게 부채질을 시작했다.
“밤을 새워 일한 것 같은데, 아직도 일이 남아 있는 거야?”
정엽이 만들어 내는 바람에 한결 졸음이 가신 연주가 조향 도구를 가지런히 놓으며 대답했다.
“지난겨울 장미 향을 주문했던 목 부인이 이번 여름에도 장미 향을 주문해서 그래요.”
“그게 뭐?”
“전쟁할 때뿐만 아니라 향을 만들 때도 계절이 중요해요. 여름에는 보통 청량감이 느껴지는 향을 선호하는데, 겨울에 맞춰 배합된 향을 여름에 그대로 쓰면 답답한 느낌이 드니까요.”
“여름에 어울릴 법한 청량한 향을 찾고 있다는 거지?”
짧은 대화만으로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정엽이 되물었다. 이내 작업 준비를 마친 연주가 탁자 한쪽에 펼쳐 둔 교향서를 넘겨보며 무심하게 답했다.
“맞아요.”
향을 만들 때 자주 사용하는 배합은 어젯밤 모두 시도해 본 상황. 이제는 전에 없던 새로운 발상이 필요한 때였다.
“청량감이라…….”
열심히 책장을 뒤적이는 연주를 지켜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정엽이 한마디 툭 던졌다.
“그럼 박하 향을 더해 보는 게 어때?”
“……박하 향이요?”
의외의 제안에 고개를 기울이던 연주는 박하 향이 어우러진 장미 향을 상상해 보았다. 쉬이 예상되진 않지만, 잘만 배합하면 자신이 원하는 향이 나올 것 같기도 했다.
“의외로 괜찮을지도…….”
직접 향을 만들어 보면 모든 게 확실해질 것이다. 속말을 중얼거리던 연주가 냉큼 탁자 아래 놓아두었던 향료 상자를 뒤적여 박하 잎을 꺼냈다.
그러고는 손절구로 마른 박하 잎을 곱게 빻은 뒤, 신중하게 계량하여 어젯밤 만들어 둔 장미 향에 더했다. 향 가루를 고루 섞은 연주는 그것을 꿀에 개어 반죽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향니(香泥)는 손으로 콩알만큼 떼어 내어 환으로 만들었다.
“향 환인가?”
“네. 이제 이걸 향로에 넣고 피워 볼 거예요.”
손끝으로 향 환을 굴려 동그랗게 모양을 잡은 연주가 그것을 향로에 피웠다. 과연 향긋하고도 상쾌하여 무더위를 잊을 만한 향기가 내실 가득 퍼졌다.
“내가 원하던 게 바로 이런 향이었어요!”
밤새 장미 향에 청량함을 입히기 위해 갖은 고생을 했던 연주의 얼굴이 밝아졌다. 기쁨 뒤에 찾아오는 것은 놀라움이었다.
‘온종일 찾아도 나오지 않던 해답이 정엽의 입에서 나오다니!’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던 연주가 정엽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보니 예사롭지 않은 감각을 가진 듯한데, 언제부터 향에 관심이 있었어요?”
향이 그렇게도 좋을까. 오랜만에 저를 향해 눈을 반짝이는 연주를 마주하고 내심 기분이 좋아진 정엽이 대답했다.
“그냥, 어머니께서 소일거리로 향을 만드시는 걸 옆에서 구경한 게 전부야.”
“호오…….”
민망해하는 정엽과 달리, 연주는 여전히 신기하다는 듯 그를 쳐다봤다. 갑자기 쏟아지는 관심에 헛기침하던 정엽이 말했다.
“향은 똑같은 향료를 가지고도 어떻게 배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향이 되기도 하잖아. 그냥 네가 잘한 거야.”
“뭐 그건 그렇지만…….”
무심하고 둔하기만 하던 사람이 이제 이런 말도 할 줄 아는구나.
헛웃음을 터뜨린 연주가 아직 열기가 남은 향로를 한쪽으로 치우고 개운한 얼굴로 기지개를 켰다. 이 상황이 무척 즐거워 보이는 연주를 가만히 바라보던 정엽이 물었다.
“이게 그렇게나 놀랄 일이야?”
“그간 당신이 내게 보여 준 모습이라곤 연무장이나 집무실에 틀어박혀 일하는 것뿐이었으니 당연하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꼭 놀리는 것 같은걸.”
이내 다리를 꼬고 자세를 바꾼 정엽이 한쪽 눈썹을 비뚜름하게 치켜올렸다. 심술이 난 듯한 정엽의 모습에 잠시 눈치를 살피던 연주는 자꾸 웃음이 터져 나오는 입술을 힘주어 깨물었다.
정엽을 외면한 연주는 본격적으로 장미 향 환을 만들기 위해 박하 잎을 더 꺼내어 계량하고, 필요한 양만큼 손절구에 담아 빻기 시작했다.
“이리 내.”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짓던 정엽이 연주에게서 작은 절구를 빼앗아 들었다.
“그렇게 가는 손목으로 이 많은 박하 잎을 언제 다 빻아?”
시키지도 않았는데 손수 박하 잎을 잘도 빻는 정엽을 지켜보던 연주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는 냉큼 장미 향 제작에 필요한 향료를 담아 그 그릇을 정엽의 앞에 놓아두었다.
“이것도 부탁해요.”
연주는 보란 듯이 탁자에 두 팔을 올려 턱을 괴고는 정엽이 일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감상했다. 정엽은 불퉁한 얼굴로 연주를 빤히 보았다.
뜨끔한 연주가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내가 이런 모습을 언제 또 보겠어요.”
“또 볼지 안 볼지 어떻게 알아.”
“군말 말고 얼른 더 빻아 줘요. 아주아주 곱게.”
“가서 세수라도 좀 하고 와. 그 김에 머리도 좀 빗고. 꼴이 아주 엉망이야.”
자다 일어나 부스스한 얼굴인데도 사랑스럽기만 한 연주가 얄미웠다. 괜스레 잔소리를 늘어놓은 정엽이 절구에 남은 박하 잎을 더욱 힘 있게 찧었다.
“이것만 다 보고요.”
가뿐하게 정엽의 말을 무시한 연주가 박하 가루의 상태를 살피고는 계속하라는 듯 눈짓했다. 정엽은 연주가 스스럼없이 저를 부려 먹는 이 상황이 황당하고 어이없었다.
‘전에는 자다가도 일어나 새벽녘에 머릴 빗더니…….’
시킨 대로 한참 박하 잎을 빻던 정엽은 이윽고 그녀의 의견을 구하듯 손절구를 내밀었다. 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박하 잎은 이 정도면 된 거 같아요. 그것들은 여기 은그릇에 덜고, 이제 여기 있는 향료도 곱게 빻아 줘요.”
정엽은 잘 빻아진 박하 잎을 순순히 은그릇에 옮겨 담았다. 그러고는 연주가 내민 향료를 절구에 털어 넣고 다시 절구질을 시작했다.
‘못 보던 모습이긴 하지만 이런 것도 나쁘진 않네.’
잠시 후 사막의 모래보다 곱게 갈린 향료 가루를 확인한 연주가 정엽이 갈아 준 모든 것을 은그릇에 모아 담았다. 그녀는 준비해 둔 꿀을 부어 반죽하고는, 작게 떼어 굴리며 아까처럼 환을 만들기 시작했다.
향료를 모두 빻고 할 일이 없어진 정엽은 야무지게 향 환을 빚는 연주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고 보면 연주는 손도 발도 어린아이처럼 작았다.
“이리 내. 도와줄게.”
“아니에요. 이건 내가 할게요.”
“네가 빨리 일을 마쳐야 나도 마음 편히 쉬지.”
“정말 괜찮은데…….”
저 큰 손으로 정말 향 환을 빚을 수 있을까?
연주는 정엽의 손과 그의 얼굴을 미심쩍은 표정으로 번갈아 보았다. 그녀의 의심을 알아챈 정엽은 연주를 향해 따가운 시선을 보내다, 반죽이 남은 그릇을 제 앞으로 가져왔다.
‘이게 뭐 어려운 거라고.’
정엽은 큼지막한 손으로 반죽을 꾹꾹 눌러 찰기를 더하고는, 연주가 했던 것처럼 덩어리를 작게 떼어 손끝으로 둥글게 굴렸다.
하지만 정엽이 만드는 향 환은 구슬처럼 뭉쳐지지 못하고 눌어붙은 떡처럼 자꾸 납작하게 퍼졌다. 손에 힘을 주는 거라면 몰라도, 일부러 빼는 일은 낯선 탓이었다.
“……생각보다 잘 안 되네.”
고전을 면치 못하던 정엽이 인상을 찌푸렸다. 때아닌 푸념에 연주가 슬쩍 정엽의 결과물을 곁눈질했다.
“향료를 빻아 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인걸요. 더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정엽을 위로한 연주가 반죽의 상태를 점검하고는 다시 향 환을 빚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향환 빚는 일이 좀처럼 포기가 안 되는 듯 손안의 반죽 덩이를 맹렬하게 노려보았다.
“한 번만 더 해 보면 안 될까?”
“안 힘들어요?”
“별로.”
쓸데없이 이런 일에 승부욕을 발휘할 줄이야. 어린애 같은 정엽의 행동에 고개를 젓던 연주가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 * *
포기를 모르는 정엽은 닷새간 하루도 빠짐없이 향 환 만들기에 도전했다. 하지만 어떻게 빚어도 연주처럼 동그란 모양을 잡는 것에 실패한 그는 결국 방향을 바꿨다.
“향 환을 만드는 건 무리인 것 같군. 그래도 향료 가는 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어.”
정엽은 기우제 준비 과정을 살피거나, 찾아오는 방문객을 맞이하는 등 특사의 임무를 수행해야 할 때를 빼고는 늘 연주의 곁에 붙어 향료 가는 일을 도왔다.
힘 좋은 정엽 덕분에 작업이 한결 수월해진 연주는 며칠씩 걸릴 주문을 빠르게 처리하고 상연향의 명성을 이을 새 향 개발에 매진했다.
그사이 정엽과 함께 수도에서 출발했던 수행원들이 속속 향주에 도착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