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정엽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만향방을 찾았다가 우연히 만났다.”
“만향방이라 하심은…….”
만향방과 연친왕은 또 무슨 관계지?
정신없는 와중에도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자사가 언젠가 술자리에서 오가던 대화를 기억해 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만향방의 주인이라는 자가 황족들과도 두루 교분이 깊다 했었지.’
그리고 상연부인은 그 만향방에서 향을 만드는 조향사였다. 한참 만에 얽히고설킨 관계를 이해한 자사가 입을 열었다.
“한데 상연부인과는 무슨 인연이 있어 전하께서 직접 그 여인을 보호하시는 건지요?”
“오래전부터 내가 아끼던 조향사일세.”
정엽은 일부러 연주가 자신의 사람임을 언급하며 자사의 행동을 살폈다. 반면 자사는 정엽이 상연부인과의 인연 때문에 제게 이번 사건의 책임을 더 크게 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이 점점 흙빛이 되어 갔다.
“역시 그렇군요. 전하께서 사람을 보는 안목이 있으십니다.”
“맞습니다. 그러고 보면 상연부인은 향주에 올 때부터 예사롭지 않았지요. 천하의 풍 대인이 직접 나서지 않았습니까.”
자사가 침묵하는 사이, 자리를 지키던 사람들은 서로 상연부인의 실력을 칭찬하며 정엽의 눈치를 살폈다. 그동안 간신히 놀란 마음을 가라앉힌 자사가 정엽을 향해 말했다.
“전하, 그러면 혹시 부인에게서 추화원을 습격한 무뢰배에 관해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무뢰배들이 하나같이 복면을 쓰고 있었던 탓에 상연부인도 아는 바가 없다 하더군.”
“예……. 알겠습니다.”
혹 사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자사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정엽은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바로 관사를 호위하는 군사들을 전부 자신의 사람으로 교체하는 일이었다. 정엽은 틈을 놓치지 않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
“추화원처럼 사람이 많은 곳에서 무뢰배들이 활개를 치다니 본 왕도 소식을 듣고 무척 놀랐다네. 가뭄 때문에 민심이 흉흉하다고는 해도 이 정도일 줄이야.”
“송구합니다. 전하께서 향주에 오시자마자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다니. 전하를 뵐 면목이 없습니다.”
“향주의 치안이 이토록 불안정하다면 본 왕이 온전히 기우제에 신경을 쏟기 어려울 듯하네. 해서 관사의 호위를 본 왕의 사람들에게 맡기고 싶은데, 자사의 생각은 어떤가?”
앞으로 기우제를 준비하려면 관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게 될 것이다. 게다가 특사의 신분으로 관사를 비운 채 안가에 칩거하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저를 물어뜯을 기회만 엿보고 있는 태자에게 빌미를 주는 꼴이었다.
“왜? 어려운가?”
정엽은 대답을 촉구하듯 자사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자사는 식은땀을 흘리며 난처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정엽이 관사의 호위를 바꾸겠다는 건 그가 자신을 불신하여 향주에 있는 동안 일을 믿고 맡길 수 없다는 뜻이 아닌가. 이 일이 중앙에 알려지면 저는 향주의 치안을 지키지 못하고 황제의 특사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무능력한 관료로 낙인찍힐 게 뻔했다.
그렇게 되면 중앙 조정으로 진출할 기회도 함께 사라지는 셈이었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자사가 넙죽 엎드리며 말했다.
“전화, 추화원을 습격한 자들을 최대한 빨리 잡아들일 테니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 주소서!”
자사의 하소연에 사람들의 이목이 정엽에게 쏠렸다. 하지만 정엽은 묵묵부답이었다. 이에 평소 자사와 교분이 깊던 귀족이 그를 돕기 위해 나섰다.
“전하, 자사의 말씀대로 향주에서 이런 사건이 벌어진 건 이번이 처음이옵니다. 살기 좋은 고장에서 어찌 무뢰배들이 멋대로 설칠 수 있겠사옵니까. 또 이런 상황에서도 자사께서는 전하를 편히 모시기 위해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사옵니다.”
“노력?”
“예. 낡은 관사도 새로 단장하고, 전하께서 연회가 끝난 뒤 편히 쉬실 수 있도록 저택을 새로 단장했다고 들었습니다. 자사의 정성을 봐서라도 모쪼록 처지를 살펴 주시지요.”
“전하, 소신이 향주 자사로 부임한 이후 해결하지 못한 사건이 없습니다. 부디 이번 한 번만 믿어 주시옵소서!”
편드는 이가 있으니 한층 목소리가 커진 자사가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호소했다.
정엽은 가뭄에도 백성을 동원해 관사와 저택을 보수했을 자사가 좋게 보이지 않았다. 자사의 공언처럼, 그가 살수들을 잡아들일 수 있으리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사가 제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쓴 것만은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태자가 보낸 살수를 반드시 잡겠다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모습은 눈물겹기까지 했다.
상황을 두루 살핀 정엽은 자사가 태자의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러니 이젠 자사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사 역시 입장이 난처하겠지. 하지만 본 왕이 무사히 기우제를 지내고 돌아가야 자사에게도 미래가 있지 않겠는가?”
“예,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본 왕이 원하는 것은 관사의 호위를 바꾸는 것뿐이다. 기우제 준비와 조만간 도착할 수행원 관리는 모두 자네에게 맡기지. 또 연회를 공들여 준비한 성의를 보아, 오늘 밤은 자네가 마련한 저택에서 묵도록 하겠네.”
금방이라도 자사의 죄를 물을 것처럼 굴던 정엽이 그의 호의를 받아들이겠다고 하자 좌중이 술렁였다.
“감읍하옵니다, 전하!”
“본 왕이 수도로 돌아간 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면 자사가 나를 위해 애썼다는 것은 충분히 증명할 수 있겠지.”
“예, 지당한 말씀이시옵니다!”
제 뜻대로 일이 술술 풀리자 한층 표정이 밝아진 자사가 굽신댔다. 관사의 호위를 교체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야 하지만, 특사가 기우제만 잘 지내고 떠나면 그런 걸 누가 일일이 따지고 들겠는가?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연친왕이다. 3황자에게 밀려 동궁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적자를 낳은 황후와 성국부를 등에 업은 그의 위세는 황태자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소신 반드시 전하의 믿음에 보답할 것이옵니다. 향주를 위해 앞으로도 분골쇄신할 터이니 지켜봐 주시옵소서!”
“알았으니 그만 일어나게. 연회의 흥이 깨지지 않는가.”
“예, 전하. 오늘을 위해 준비한 게 많이 남아 있으니 부디 편히 즐겨 주십시오.”
“고맙네.”
“별말씀을요. 자, 어서 무희들을 들여라!”
자사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몸에 착 달라붙는 비단옷을 걸친 서역의 무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잘록한 허리와 배꼽을 훤히 드러낸 그들은 이국적인 선율에 맞춰 현란한 춤사위를 선보였다. 무희들이 몸을 흔들 때마다 은방울이 줄지어 매달린 허리띠가 요란하게 번쩍거리며 정신 사나운 소리를 냈다.
“저, 저런 망측한……!”
“전하께서 계신 자리에서 이게 무슨…….”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은 혀를 차면서도 무희들이 선보이는 야릇한 몸짓에 정신이 팔렸다. 하지만 정엽은 무희들의 색정적인 춤사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한 표정으로 술잔을 비울 뿐이었다.
이 순간 정엽의 머릿속에는 우아한 몸짓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던 연주의 낙신무가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날 춤을 추던 연주의 모습은 강을 지키는 여신보다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정엽은 연주가 다시 저를 받아들이고 기꺼이 저만을 위한 춤을 선보여 줄 날을 상상하며 연거푸 술병을 비웠다.
안가를 나온 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이 순간만은 연주가 무척 그리웠다.
‘그래도 오늘만은 참아야겠지.’
자신이 떠난 뒤에도 연주가 평화로운 일상을 계속하려면 오늘은 하는 수 없이 마음에 없는 일을 해야 했다.
“후…….”
한숨을 내쉰 정엽은 모두가 춤사위에 넋이 나간 사이, 장명을 향해 가까이 오란 듯 검지를 까딱였다.
“전하, 찾으셨습니까.”
“오늘은 안가로 돌아가지 못하게 됐으니 먼저 가서 소식을 전해라.”
“예, 전하.”
행여 음악 소리에 주군의 명령을 제대로 듣지 못할까 봐 정엽의 옆으로 바짝 다가왔던 장명이 바람처럼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 * *
한편, 연주는 갓 완성한 장미 향 환을 태워 신중하게 향기를 맡아 보고는 지친 얼굴로 들고 있던 향로를 내려놓았다.
정엽을 떠나보낸 후부터 지금까지 내내 향 배합에 매달렸는데도, 자꾸만 집중력이 흐트러져선지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날이 너무 더워서 그래. 게다가 여긴 늘 작업하던 장소도 아니고. 괜찮아.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
애써 마음을 가다듬은 연주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뻣뻣해진 목을 주물렀다. 그때,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연주는 고개를 바로 하고 닫힌 문 너머로 물었다. 하인이 곧장 답했다.
“전하께 일이 생겨 오늘은 저택으로 돌아오시지 못한다고 합니다.”
“알았네.”
“예.”
합문에 드리운 하인의 그림자가 옅어진 것을 확인한 연주가 한숨지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이미 한 차례 습격까지 받은 정엽이었다. 잠시 그의 안위를 염려하던 연주가 고개를 흔들었다.
“용무군 군사들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혼자 있으면 일하기 편하고 좋지. 오늘 밤엔 무슨 일이 있어도 새로운 향을 완성해 낼 거야.”
다짐하듯 중얼거린 연주가 방 안의 창문을 모두 열어 환기했다. 머리도 식힐 겸 창가에 기대어 선선한 밤바람을 쐬던 그녀는 한참 만에 작업하던 탁자로 돌아와 조향에 몰두했다.
하지만 실패를 거듭하던 연주는 밤이 지나 파랗게 동이 틀 즈음에서야 탁자 위에 엎드린 채 스르륵 잠에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꿈속에서 작열하는 사막을 헤매던 연주는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천천히 눈을 떴다.
고개를 돌려 보니 저는 어느새 침상에 눕혀져 있고, 언제 돌아왔는지 모를 정엽은 머리맡에 앉아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