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109화 (109/161)

109화.

장명이 연주의 도움에 힘입어 재빨리 말을 보탰다.

“군주마마의 말씀이 옳습니다. 전하, 무엇보다 향주 자사가 누구의 사람인지도 확인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무슨 말인지 알았다.”

연주의 안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려는 장명을 막아선 정엽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거대한 영토를 자랑하는 대화국의 특성상,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지방관은 지역민의 일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게다가 특사의 임무를 마치면 수도로 돌아가야 하는 그와 달리, 연주는 향주에 남아 생활을 계속해야 했다.

성공적인 기우제와 별개로, 연주의 편의와 안전을 위해서라도 향주 자사에 대해 알아볼 필요성이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그건 그렇고, 시킨 일은 어찌 됐느냐?”

좀 전과 달리 저를 근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연주를 외면한 정엽이 말을 이었다.

“만향방을 통해 군주마마의 시녀에게 소식도 전했고, 구해 오라 명하신 물건들도 모두 준비해 두었습니다.”

“수고했다. 물건을 모두 영서각으로 옮겨라.”

“예. 하면 용무군 군사를 불러 모으겠습니다.”

예를 갖춘 장명이 내실을 나섰다.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연주가 정엽을 안심시키듯 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할 일을 하고 있을 테니 염려 마요.”

“혼자 있어도 괜찮겠어?”

“별일이야 있겠어요.”

나를 혼자 남겨 두고 떠나는 일이 처음도 아니면서.

새삼스럽게 제 걱정을 하는 정엽을 씁쓸하게 바라보던 연주가 웃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본 정엽이 연주에게 다가와 무릎을 굽히고 나란히 시선을 맞추었다.

“늦지 않게 돌아올게.”

“잘 다녀와요.”

연주의 화답에 긴 한숨을 내뱉은 정엽이 그녀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잠시 멈칫했던 연주는 정엽의 너른 어깨를 가볍게 다독였다.

정엽은 연주의 손길에 금세 힘을 얻은 듯 영서각을 나섰다. 홀로 남은 연주는 오래전 전장에 나가는 정엽을 배웅하던 때처럼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 * *

그날 저녁, 정엽은 장명과 함께 향주 자사가 준비한 연회에 참석했다. 출신도 한미하고 내세울 만한 인맥도 없어 늘 지방을 전전하던 향주 자사는, 이번 기회에 정엽의 도움을 받아 중앙 조정에 진출하려는 원대한 꿈을 갖고 있었다.

“전하께서 오신다는 소식 듣고, 가까운 귀주에서 소신이 직접 모태주를 구해 왔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자사가 상석으로 올라가 공손하게 정엽의 빈 술잔을 채웠다. 이런 자사의 행동이 부담스러울 법도 했지만, 정엽은 그를 나무라지 않고 짙은 향기를 내뿜는 액체를 흘끔 내려다보았다.

‘술을 빚기 위해선 많은 곡식이 쓰였을 것인데…….’

그렇지 않아도 식량이 부족해 백성들이 허덕이는 때였다. 정엽은 여전히 이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묵묵히 술잔을 비웠다. 연주의 말마따나 최소한 기우제를 마칠 때까진 자사와 척을 질 필요가 없었다.

“독한 술도 단숨에 넘기시는 것을 보니 전하께서는 아주 호방한 분이시군요. 자, 한 잔 더 받으십시오.”

술 한 잔에 아첨을 한 바가지 늘어놓은 자사가 다시 정엽의 술잔을 채우려 나섰다. 자연스럽게 손을 들어 보이며 그를 제지한 정엽이 말했다.

“이런 좋은 술을 나 혼자 마셔서야 쓰겠는가. 장명, 새 술잔을 준비해라.”

술잔을 가져올 사람이야 이 자리에 얼마든지 있었다. 한데 수족과 같은 부관에게 직접 명령을 내리다니.

정엽의 호의에 자사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그는 장명에게 술잔을 건네받고 연신 굽실거렸다.

“받게.”

“전하께서 주시는 술을 마다할 수는 없지요!”

자사는 정엽이 술잔을 채우자마자 단숨에 비운 뒤, 잔을 거꾸로 뒤집어 머리 위에서 흔들었다. 품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행동이었다. 실소한 정엽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연회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전하, 부디 즐겨 주시지요!”

술잔을 내려놓고 정엽을 향해 허리를 깊게 숙인 자사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윽고 연회장 한쪽에 도열해 있던 예인들이 악기를 연주하자, 사슴 고기 요리를 선두로 다채로운 별미가 상에 오르기 시작했다.

내내 자사의 행태를 눈여겨보던 귀족 하나가 그에 질세라 아부를 늘어놓았다.

“온 나라가 가뭄으로 난리라고는 하지만 소신들은 이 기회에 연친왕 전하를 뵐 기회를 얻었으니 일세의 광영이옵니다. 한데, 소신만은 전하와 구면이니 천추만세의 영광이로군요.”

“……?”

“소신, 예전에 성국부에서 인사를 올렸던 양홍이옵니다. 기억하시는지요?”

성국부에 저런 얼빠진 자가 드나드는 걸 본 적이 있던가? 기억을 되짚던 정엽이 사내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자세히 봐도 제 머릿속에 없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정엽도 이 연회의 흥을 깰 생각은 없었다. 오늘 연회에 참석한 귀족 중에 몇이나 태자의 편에 섰는지는 알아야 연회에 참석한 보람이 있지 않겠는가.

“그래, 기억나는군.”

정엽이 맞장구를 쳐 주자 사내가 으쓱한 얼굴로 자사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자사 역시 정엽과의 인연을 자랑하듯 옛일을 언급했다.

“전하, 하오면 작년에 소신이 전하께 바친 작약을 기억하시옵니까?”

“그 신품종 말인가?”

“예, 맞사옵니다. 그때 작약의 이름을 지어 주십사 부탁을 드렸는데, 혹시 꽃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것인지요? 그렇다면 당장 다른 꽃을 준비하겠습니다.”

기대에 찬 자사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정엽이 고심했다. 무명 작약은 정엽이 연주에게 선물한 지 오래였고, 이름 또한 그녀의 작명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작약이 아름다워 지금까지 이름을 짓지 못했다고 했던가. 오늘 아침 연주가 했던 말을 떠올린 정엽이 입을 열었다.

“작약이 너무 아름다워서 아직 마땅한 이름을 짓지 못했네. 조만간 꽃의 이름을 지어 보내 줄 테니 당분간은 그대로 두는 것이 어떤가?”

“안 될 이유가 없지요. 얼마든지 기다리겠습니다.”

“고맙군.”

사람들 앞에서 정엽과의 인연을 한껏 과시한 자사가 과장된 몸짓으로 일어나 허리를 굽히며 화답했다. 당연히 그 모습이 다른 귀족들의 눈에 좋게 보일 리 없었다.

교 씨에는 못 미치지만 화서 지역에서 위세를 떨치는 유문(柳門)의 자제가 나서 자사의 언행을 비꼬았다.

“듣자 하니 얼마 전에 자사께서 태자 전하께 작약을 바쳤다고 들었는데, 혹 태자 전하께도 작약의 이름을 지어 달라 청한 것이오?”

유 공자의 말에 정엽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사실 정엽뿐만 아니라 태자에게도 줄을 대기 위해 애쓰는 중이었던 자사가 황급히 얼버무렸다.

“유 공자는 어찌 떠도는 풍문만 듣고 이 사람을 비난하는가? 전하, 개의치 마십시오.”

사실 향주에서는 매해 황실에 작약을 진상했다. 향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꽃이고, 그중에서도 향주 작약은 꽃의 왕이라 불리는 모란만큼이나 귀한 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사는 고작 말 한마디에 미운털이 박혀 출세의 꿈이 좌절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지금 자사가 하는 말은 진심일까?’

안절부절못하는 자사를 지켜보던 정엽이 고심했다.

혹여 자사가 정말 태자의 사람이라면, 그래서 오늘의 연회가 저의 경계심을 낮추기 위한 연막에 불과하다면, 이 기회에 자사를 제대로 흔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제 보니 자사는 그간 작약에 공을 들이느라 바빠 향주의 치안에 신경 쓸 틈이 없었나 보군.”

“전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어제 저녁 추화원에 웬 무뢰배들이 들이닥쳤다고 하던데. 자사는 이에 대해 아는 바가 없나?”

여기까지 말한 정엽이 벼린 눈으로 자사의 행동을 예의 주시했다.

자사는 추화원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이미 다 알고 온 듯한 정엽의 태도에 혼이 쏙 빠졌다.

“전하, 추화원 습격 사건은 저희 향주에서도 전례가 없던 일이라 꼼꼼히 살피고 있었사옵니다.”

“그럼 그 무뢰배들의 정체는 밝혀졌는가?”

“조사에 애를 쓰고는 있습니다만, 증거가 될 만한 것이 나오지 않아 난항을 겪고 있사옵니다.”

“무슨 뜻이지?”

“추화원에 갑자기 무뢰배들이 들이닥쳐 난동을 피우는 것을 본 사람은 많으나, 정작 습격에 휘말린 사람의 행방이 묘연하다 보니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소동을 목격한 사람은 있는데 습격을 받은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 몰라 조사를 못 한다? 사건을 이대로 덮으려는 것인가, 아니면 무능력한 것인가?

종잡을 수 없는 자사의 말에 미간을 좁힌 정엽이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행동을 살폈다. 고양이 앞의 쥐처럼 눈치를 살살 살피는 걸 보니, 제각기 숨기는 것이 있었다.

점점 굳어 가는 정엽의 표정을 보며 눈치를 살피던 귀족이 입을 열었다.

“듣자니 그 자리에 상연부인도 있었다던데. 제대로 찾고는 있는 거요?”

“맞소. 우리 내자(內子)가 상연부인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상연향 냄새는 맡아 보지도 못하게 생겼다며 발을 동동 구르더군.”

“상연향이라면 소생도 익히 들어 압니다. 그 향 때문에 수도에서도 상연부인의 유명세가 대단하다지 않습니까.”

사실 상연부인이 추화원 습격 사건에 휘말렸다는 사실은 이 자리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자사가 이를 어물쩍 얼버무리니 다들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아꼈던 것이다.

하지만 자사의 위세는 감히 연친왕에 비할 바가 못 됐다.

자사는 너도나도 상연부인에 대해 떠들어 대는 통에 진저리를 쳤다. 그는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변명을 늘어놓았다.

“관에서 하는 일이 그런 것인데 그럼 찾지, 안 찾고 놀겠습니까? 목격자들 말에 따르면 상연부인이 웬 사내들과 함께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자들이 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고 했으니 아마 무탈할 겁니다!”

자사는 추화원에 정엽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만약 자사가 태자의 사람이라면 내가 추화원에 있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는데.’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인 채 자사의 말을 곱씹던 정엽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자사가 지금처럼 연주를 핑계로 사건 조사를 차일피일 미룬다면 태자의 살수들이 더욱 활개를 칠 게 뻔했다.

“상연부인이라면 내가 보호하고 있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예?”

뜻밖의 이야기에 눈이 화등잔만 해진 자사가 되물었다.

“전하께서 상연부인을 보호하고 계시다니요. 어쩌다 그리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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