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철모르는 공주들이나 할 법한 말을 하네요.”
정엽의 뜬금없는 질문에 연주가 실소했다. 꽃과 나무에 관심이라곤 없던 사람이 곧 꺾이게 될 꽃의 처지를 염려하다니. 정엽의 변화가 놀랍고도 낯설었다.
연주가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다.
“수국은 물을 좋아해서 개화 끝물에 잘라 연못에 띄워 주면 더 오래 꽃을 감상할 수 있어요.”
“좀 더 오래 꽃을 피울 수 있단 뜻인가?”
“맞아요.”
정엽이 연주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연주는 대화가 끝나자마자 정엽을 외면하듯 다시 수국의 상태를 살폈다. 마른 가지를 야무지게 솎는 연주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정엽이 말했다.
“여전히 꽃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군. 그래서 향주에서도 여전히 해홍화를 기르고 있는 건가?”
“……내가 해홍화를 기르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설마 내 집 정원에 심어 놓은 꽃의 종류까지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건가?
정엽의 말에 놀란 연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았다. 하지만 마주 선 정엽의 표정은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 의아해 보이기까지 했다.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 또 이곳 향주는 꽃을 키우기 좋은 곳이라고들 하니까.”
“아……. 난 또.”
“해홍화 말고 다른 건 안 키워?”
오늘따라 제게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지는 정엽이 신기했다. 연주는 선뜻 정원에서 키우고 있는 것들을 떠오르는 대로 말해 주었다.
“백일홍을 심었어요. 귤, 유자, 사과나무도 있고요. 그리고…….”
여기까지 말한 연주가 화단에서 자라고 있는 무명 작약을 떠올리고 말을 멈췄다. 정엽이 급격히 흐려진 연주의 말꼬리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
“혹시 작약은 안 심었어?”
“……네, 맞아요. 작약도 있네요.”
“그럼 내가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던 작약은 기억나? 혹시 이름을 지었나 해서.”
실은 화초에 관심이 있던 게 아니라 무명 작약의 이름이 궁금했던 거구나. 뒤늦게 깨달은 연주가 입을 열었다.
“그 작약은 너무 고와서 이름을 짓기 힘들어요. 그냥 당신이 지어 주는 게 어때요?”
연주는 이번 기회에 내내 마음에 걸렸던 그의 제안을 없던 일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연주의 의도를 정엽이 모를 리 없었다.
“아직 시간은 충분해. 기다릴 테니까 이름이 생각나면 언제든지 말해.”
정엽의 말은 꼭 제가 돌아올 때까지 언제고 기다리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복잡한 표정으로 정엽을 바라보던 연주가 애써 화제를 전환했다.
“……덥네요. 한여름이라 그런가. 아침인데도 금세 땀이 나요.”
“아, 그렇군. 돌아가자.”
은근히 연주의 대답을 기다리던 정엽은 그녀의 새하얀 얼굴에 따갑게 들이치는 여름 햇빛을 뒤늦게 발견했다. 그는 서둘러 연주의 손을 잡고 처소로 걸음을 옮겼다.
끝내 서로가 원하는 대답은 듣지 못한 채였다.
* * *
연주는 정엽의 손에 이끌려 영서각으로 향했다. 굽이굽이 얽힌 길을 조금 걸었을 뿐인데, 어느새 영서각의 처마가 보였다.
“이게 대체…….”
연주는 도무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 가던 걸음을 멈추고 왔던 길과 영서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코앞에 있는 후원을 두고 길을 헤맸다니.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연주와 함께 걸음을 멈춘 정엽이 말했다.
“가장 가까운 길을 알려 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뭘 그렇게 놀라?”
“그래도 이렇게 빨리 도착할 줄은 몰랐어요.”
정엽은 연주의 솔직한 반응에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는 듯 연주의 손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하지만 연주는 여전히 궁금한 것이 무척 많아 보였다.
“이곳에 자주 왔었나 봐요?”
“음, 그건 아니고 여기 오기 전에 저택을 관리하는 관리인에게 미리 지도를 받아 뒀어.”
“그러고 보면 당신은 지도를 참 좋아하네요.”
연주는 문득 유황관에 걸려 있던 엄청난 크기의 지도를 떠올렸다. 연주의 참신한 해석을 들은 정엽이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지도를 살피며 앞날에 대비하는 건 정엽에게 숨을 쉬듯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그러니 연주의 말이 아예 틀렸다고 볼 순 없었다.
하지만 일을 하는 제 모습이 연주의 눈엔 그저 ‘지도를 좋아하는 사람’ 정도로 비쳤다니. 조금은 황당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다.
“뭐, 그런 셈이라고 쳐주지.”
“무슨 대답이 그래요?”
“왜? 좋잖아. 나랑 같이 다니면 적어도 이 집에서 길을 잃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건 당신이 지도를 달달 외웠을 때 얘기죠.”
설마 이 넓은 집의 구조를 다 외웠겠어? 안 그래도 거대한 미로 같은 곳인데.
퉁명스럽게 대답한 연주가 자연스럽게 영서각 문을 열어 준 정엽을 따라 내실 안으로 들어섰다. 연주가 들어온 것을 확인한 정엽이 합문을 닫고 돌아섰다.
“왜 그렇게 생각해?”
“그야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렇죠.”
“외웠어. 전부.”
“흠, 그럼 이 집의 지도를 내게 그려 줄 수 있어요?”
문득 좋은 생각을 떠올린 연주가 눈을 빛냈다. 정엽이 미심쩍은 얼굴로 되물었다.
“그건 왜?”
“계속 당신한테 길 안내를 부탁할 수는 없잖아요.”
사실 연주는 정엽의 말을 완전히 믿지 않았다. 그러니 지도를 그려 달라고 요청하면 정엽의 말이 허풍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만에 하나 정엽의 말이 사실이래도, 저택의 지도를 얻으면 후원 말고도 가 볼 수 있는 곳이 아주 많을 테니 아쉬울 것도 없을 듯했다.
그런데 정엽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나한테 부탁하는 게 어때서?”
어느새 미간을 좁힌 정엽이 연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누가 들어도 불만이 가득한 말투라, 연주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삼켰다.
‘예전에는 바쁘단 핑계로 부탁 같은 건 들어주지도 않았으면서.’
아직도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것인지, 자꾸만 낯선 행동을 보이는 정엽 때문에 심란해졌다. 그는 꼭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며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만 같았다.
그렇담 이참에 저도 정엽을 놀려 보리라. 대꾸하는 연주의 목소리에 어느덧 심술이 묻어났다.
“당신은 특사 신분으로 이곳에 온 거잖아요. 게다가 어차피 지도도 외우고 있다면서요.”
“……그래. 알았어.”
“의외로 순순히 대답하네요?”
“내가 널 안가로 데려온 건 너를 보호하기 위해서지 가두기 위해서가 아니야. 앞으로 며칠은 나와 온종일 붙어 있을 텐데. 가끔은 너 혼자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도 있겠지.”
어쩐지 쉽게 대답이 나오더라니. 당했다는 생각에 잔뜩 약이 오른 연주가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종일 붙어 있을 거라고요?”
“그래.”
“그런 얘긴 못 들었는데요?”
“어젯밤에 얘기했잖아.”
“설마 그 말이…….”
말끝을 흐린 연주가 힘주어 입술을 앙다물었다. 경호 영역을 최소화하기 위해 영서각에서 함께 지내야 한다던 정엽의 말이 뒤늦게 떠올랐다.
하지만 연주가 정엽의 말에 순순히 동의한 건 황제의 특사인 그가 은거지에 틀어박혀 신선놀음이나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밤낮으로 정엽과 한 공간에 딱 붙어서 생활하게 될 수도 있다니. 이건 연주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왜. 나랑 같이 지내는 게 싫어?”
연주의 기색을 살피던 정엽이 넌지시 물었다. 무심한 말투였지만, 내심 긴장한 그는 연주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잠시 정엽을 올려다보던 연주가 고개를 저었다. 이 문제는 좋고 싫음에 따라 결정할 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요.”
지금은 기우제를 앞두고 정엽의 안전이 가장 중요한 시기가 아니던가. 또 한때 같은 이불을 덮고 살던 부부였던 마당에 저 혼자 유난을 떠는 것도 우스웠다.
연주의 대답에 뒤늦게 표정이 풀린 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정엽은 그 말을 끝으로 지필묵을 찾아 탁자 앞에 앉았다. 그가 먹을 가는 동안 자연스럽게 침상에 걸터앉은 연주가 처소를 눈으로 훑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이만하면 괜찮다고 생각했던 공간이 별안간 아주 좁게 느껴졌다.
‘뭐. 무슨 일이야 있겠어.’
연주는 애써 잡념을 떨치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그때,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장명입니다.”
“들어와라.”
어느새 막힘없이 지도를 그리고 있던 정엽이 붓을 내려놓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장명이 정엽과 연주를 향해 차례로 허리를 숙였다.
“무슨 일이냐?”
“향주 자사가 전하를 연회에 초청했습니다. 연회는 당장 오늘 저녁입니다. 갑작스러운 초청인 만큼, 가시기 전에 대비를 세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명의 말에 정엽의 고민이 깊어졌다. 아무래도 연주는 자신이 자리를 비웠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간밤에도 늦게 돌아온 터라 오늘만큼은 그녀를 홀로 잠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연회에는 가지 않을 테니 그럴 필요 없다.”
“왕세자께서 향주에 도착하면 반드시 자사를 만나 보시라고 당부하지 않으셨습니까. 향주 자사가 직접 여는 연회인 만큼 향주 일대의 관료는 물론, 귀족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일 겁니다.”
“가뭄으로 백성이 고통스러운 시절이다. 이런 때에 연회라니. 가당키나 한 말이냐.”
“하오나 황제의 특사를 위해 지방 관리가 연회를 베푸는 것은 오랜 관습입니다. 만일 전하께서 연회를 거절하신다면 뒷말이 무성할 겁니다.”
장명의 설득에도 정엽의 고집은 여전했다. 그는 주군이 왜 이토록 안가를 떠나려 하지 않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연회에 참석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전하.”
“…….”
“전하!”
애가 탄 장명이 정엽을 연거푸 불렀다. 보다 못한 연주가 한마디 거들었다.
“향주 자사가 직접 준비한 연회라잖아요. 초청에 응하지 않는다면 성의를 무시당했다고 여길 거예요. 또 기우제를 무사히 치르려면 자사의 도움이 필요할 텐데, 왜 자사를 적으로 돌리려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