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연주는 하인의 세심한 준비성에 감탄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그녀는 찻물로 양치를 한 뒤, 아직 온기가 남은 미지근한 물로 손과 얼굴을 씻었다. 머리를 곱게 빗어 내리고는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었다.
단장을 새로 하고, 새 옷도 입으니 그래도 기분이 조금은 상쾌해졌다. 이내 식탁에 앉아 죽 한 그릇을 모두 비운 연주가 탁자 위 물건들을 차분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손님에 불과한 연주가 낯선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물건을 정돈하고 침상 정리까지 마친 연주가 고민 끝에 처소를 나섰다.
온종일 방 안에서 지내는 것보단 뭐라도 하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로웠다.
“일단 영서각 주변이라도 좀 둘러볼까…….”
연주는 사방을 살핀 뒤 건물의 뒤편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키 작은 화초가 옹기종기 모인 작은 화단이 있었다. 대저택에 조성된 화단이라기에는 한없이 아담한 규모였다.
기대와 다른 모습에 고개를 갸웃 기울이던 연주가 하얗게 피어난 옥잠화 앞에 허리를 숙이고 향기를 맡았다. 그러고는 화단에 심긴 화초들을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이건 백합이고, 또 이건…….”
수줍게 고개를 숙인 백합과 별처럼 피어난 말리화까지. 그러고 보니 화단에서 자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향기가 깊기로 유명한 꽃들이었다.
‘이 화단은 꽃의 모양새보다는 향기에 중점을 둔 모양이구나.’
연주는 화단의 꾸밈새에서 문득 선황후의 손길을 느꼈다. 하지만 기억 속의 선황후는 이런 화초보다는 녹음이 우거진 전각에서 낮잠을 즐기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정엽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은 선황후가 소싯적에 지내던 곳. 그렇다면 저택 어딘가에 멋들어진 나무가 우거진 정원이 있을지도 몰랐다.
‘화단이 작은 거야 영서각의 규모가 크지 않으니 그렇겠지. 또 정원이 가까이에 있으면 뒤뜰에 필요 이상의 공을 들일 필요가 없으셨을 거야.’
생각을 마친 연주가 곧장 후원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섰다. 영서각에서 조금 벗어나자 눈앞에 미로 같은 담장 길이 굽이굽이 펼쳐졌다.
“담이 높아 햇빛이 잘 들지 않으니 도통 낮인지 밤인지 모르겠네.”
해가 중천인데도 어둑하게 느껴지는 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던 연주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담장은 흔한 장식 하나 없이 깨끗해서 이정표로 삼을 만한 특징이 전혀 없었다.
이곳이 저곳 같고, 저곳이 이곳 같고. 잠시 후 혼란에 빠진 연주가 길을 잃었다는 생각에 발길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길은 복잡해도 정원에는 키가 큰 나무가 있을 거야. 담장 너머로 나무가 보이는 곳을 찾아가자.”
스스로를 다독이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연주가 목을 길게 빼고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담장이 너무 높은 탓인지, 아니면 현재 위치가 정원과 멀리 떨어져 있는 탓인지 아무리 둘러보아도 나무의 푸른 우듬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설마 피신을 위해 지은 집이라 아예 키가 큰 나무를 심지 않은 건가?”
집 안의 큰 나무는 이정표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살수들이 몸을 숨기기 좋은 환경이 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바깥 담장과 안쪽 담장의 높이를 일부러 같게 할 만큼 신경 써서 설계한 안가가 아닌가.
어쩌면 정원이 있다고 해도 나뭇가지가 담장을 넘어가지 못하도록 전정하여 관리하고 있거나, 처음부터 크게 자라는 나무를 심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어떻게 하지…….”
낭패감에 입술을 짓이기던 연주는 일단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갑자기 등 뒤에서 무언가 사뿐하게 내려앉는 바람 소리가 들리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
“어딜 그렇게 급히 가?”
흠칫 놀란 연주가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정엽이 태연한 얼굴로 서 있었다.
‘이 사람은 땅에서 솟아난 걸까? 아님 하늘에서 떨어진 걸까?’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하던 연주가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당신이야말로 어떻게 여기 있어요?”
“답답해서 잠시 나와 본 것뿐이야. 그러는 너는 어딜 가던 중이었는데?”
되묻는 정엽의 태도는 오늘 아침에 뭘 먹었는지 설명하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
“후원에 가 보고 싶어 나왔는데, 담장이 너무 높아서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겠어요.”
“내가 안내해 줄까?”
“네? ……네.”
잠시 정엽의 호의를 거절할까 고민하던 연주는 이 미로 같은 곳에서 저를 꺼내 줄 사람이 그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와.”
연주가 반걸음쯤 앞서가는 정엽의 뒤를 따라 걸었다. 정엽과 함께 걷다 보면 항상 서너 걸음은 거리가 벌어져서 그를 따라잡으려면 쉼 없이 종종걸음 쳐야 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둘 사이의 간격이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예전엔 함께 걸어도 멀게만 느껴졌는데 이제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네.’
하지만 이조차 모두 언젠가 흩어져 버릴 신기루일지도 몰랐다. 연주는 쓸데없이 길어지는 상념을 지워 내듯 한숨을 삼켰다.
그사이 앞서가던 정엽이 먼저 꼭꼭 숨겨져 있던 안가의 후원에 다다랐다.
“자, 여기가 후원이야.”
연주가 정엽의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동심원 형태로 가꾸어진 후원에선 온갖 과일나무와 꽃나무, 기화요초가 그녀를 반겼다.
“와아.”
정원의 한가운데엔 드넓은 연못이, 그리고 연못 주변엔 사람 키만 한 수국이 줄지어 피어 있었다. 무성한 가지에 새파랗고 큼직한 꽃송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으니, 마치 연못이 푸른 보석으로 장식된 관을 쓴 것처럼 보였다.
“이런 정원은 처음 봐요.”
연주는 정원의 독특한 경관에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심란해 보이던 아까와 달리 금세 밝아진 연주의 얼굴을 확인한 정엽이 슬그머니 떠오르는 미소를 숨기고 말했다.
“마음에 들어?”
“네.”
연주가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정엽이 대단한 비밀이라도 전해 주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돌아가는 길에는 영서각에서 후원까지 가는 가장 빠른 길을 알려 줄게.”
“고마워요.”
“고맙다는 인사 한번 듣기 쉽군.”
좋아하는 연주의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짓던 정엽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럼 같이 둘러보지. 나도 향주의 안가는 와 본 지가 오래돼서.”
함께 정원을 둘러보자고 하면 단칼에 거절당할까 봐 어색한 핑계를 덧붙인 정엽이 연주를 후원의 가장자리를 따라 이어진 화단으로 이끌었다.
후원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눈을 반짝이던 연주는 가는 곳마다 걸음을 멈추며 눈으로, 손끝으로, 코끝으로 싱그러운 자연을 감상했다.
반면 정엽은 아름답게 가꿔진 정원 대신 연주를 감상하기로 마음먹었는지, 그녀에게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무더위 속에서 힘겹게 꽃망울을 터뜨린 화초는 애초에 그의 관심을 끌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던가. 가뭄 속에서도 형형색색으로 피어난 꽃송이에 온 정신이 팔려 있던 연주가 내내 말없이 저를 따르는 정엽의 시선을 느끼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시양이 장미를 꽤 좋아했는데 잘 지내는지 모르겠네요.”
“누나 노릇 톡톡히 하며 잘 지내고 있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돼.”
마냥 어리게만 보였던 꼬마 숙녀가 어느새 누나 노릇을 하고 있다니. 정엽의 말을 듣고도 믿기지 않아 웃음을 터뜨린 연주가 대화를 이어 나갔다.
“황후마마께서는요?”
“황후마마께서도 무탈하게 잘 지내고 계시지. 막내 황자는 아실을 무척 잘 따라서 황후마마께서 아주 편하신 모양이야.”
“아실이 황궁으로 돌아갔나요?”
“황후마마께서 임신하신 것을 알자마자 아실을 불러들이셨어. 요즘은 황자의 보모상궁으로 지내고 있다고 하더군.”
“마마께서 아주 탁월한 선택을 하셨네요.”
황후와 공주의 소식을 핑계로 정엽의 관심을 돌리는 데 성공한 연주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여전히 황후와 공주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넌 향주로 온 뒤 가족들과 연락을 끊고 지내는 건가?”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실이 황궁으로 돌아간 줄도 모르고 있으니 하는 얘기야. 게다가 3황자가 태자가 되었다는 소식조차 모르고 있었잖아.”
“오라버니와는 주기적으로 서신을 주고받고 있어요. 다만 오라버니의 안부 말고는 궁금한 게 없어서 수도의 소식에 신경을 쓰지 않았을 뿐이죠.”
“그럼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도 궁금하지 않았어?”
불쑥 튀어나온 정엽의 본심에 연주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무슨 대답이든 그에게 분명하게 전하는 게 좋다는 걸 알았지만, 당장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
“정말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던 모양이네.”
연주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정엽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삽시간에 분위기가 처지자 마음이 불편해진 연주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당신이 계속 서신을 보냈잖아요. 서신이 온다는 건 당신이 무탈하다는 뜻이니 내가 염려할 이유도 없고요.”
이미 정엽의 서신이 끊긴 지가 여러 달째였지만 지금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연주는 정엽이 또다시 쓸데없는 말을 할까 봐 수국이 만발한 연못가 쪽으로 자리를 피했다. 그녀는 큼직하게 핀 꽃송이를 향해 자연스럽게 손을 뻗었다.
일부러 수국의 꽃가지와 잎새를 뒤적이던 연주가 이내 여물지 못하고 말라 버린 꽃눈을 발견하고는 탄식했다.
“아, 이런…….”
어느새 연주를 따라 연못가로 온 정엽이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인데?”
“가뭄 때문인지 꽃눈이 마른 아이들이 꽤 많네요. 당신이 기우제를 지내러 떠나기 전에 꽃송이를 모두 잘라 연못에 띄워 둬야겠어요.”
“……멀쩡한 꽃을 모두 자른다고?”
“올해 묵은 가지를 쳐 줘야 내년에 더 많은 꽃대를 올릴 수 있으니까요.”
내년에 꽃을 피우기 위해 일부러 가지를 친다. 곰곰이 생각하던 정엽이 되물었다.
“그럼 가뭄을 견디고 핀 꽃은 억울하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