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106화 (106/161)

106화.

연주는 늘 무탈하게 잘 지낸다고만 하던 오라비의 서신을 떠올렸다. 모르긴 몰라도, 정엽에게 불리한 정세가 오라비에게도 고초를 안기고 있을 게 뻔했다.

‘오라버니가 위험에 처한 거라면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는데…….’

연주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눈꺼풀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그러나 잠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정엽을 제치고 동궁을 차지한 황태자 소기의 존재가 마음에 걸렸다.

연주는 진심으로 오라비를 돕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태자와 되도록 얽히고 싶지 않았다.

“꼭 돌아가야 하는 걸까. 생각을 해 보자, 생각을…….”

어쩌면 수도로 올라가지 않고도 오라비를 도울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연주가 몸을 일으켜 침상 머리맡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하지만 온몸을 짓누르는 졸음을 이길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연주는 어떤 답도 얻지 못한 채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 * *

정엽은 안가로 집결한 용무군을 만나 현재 상황을 점검하고 새벽녘에야 영서각으로 돌아왔다. 영서각에서는 그가 처소를 나설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환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예전의 연주는 자신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절대 침소의 불을 끄지 않았다.

‘혹시 연주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전처럼 자신을 기다려 주는 연주에 대한 반가움, 안도, 미안함 따위가 뒤섞여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정엽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섰다.

“기다렸어?”

하지만 기대와 달리 연주는 침상 머리맡에 앉아 불편하게 잠들어 있었다. 허탈하게 웃은 정엽이 그녀를 침상에 바로 눕히고 이불을 끌어당겼다.

여름이지만 행여 감기라도 걸릴까 얇은 이부자리를 다시 한번 살피고,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할 일은 숙면을 위해 영서각 곳곳에 밝힌 불을 하나하나 소등하는 것. 처소를 빙 돌며 불이란 불은 모두 끈 정엽이 무심코 침상 쪽을 돌아보았다.

연주는 등을 돌린 채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그저 잠결에 일어난 일이지만, 그녀의 뒷모습을 마주한 정엽은 순식간에 깊은 얼음 협곡에 빠진 것처럼 심장이 내려앉았다.

“꼭 잠을 자도 저렇게 자야 하나…….”

연주가 마치 꿈속에서조차 자신과 한 공간에 머무는 것이 싫다고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 같았다. 괜스레 울컥한 정엽이 고개를 흔들었다.

자객의 습격을 피해 숨어 있는 상황에서조차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했다. 그러면서도 정엽은 도무지 연주에 대한 서운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예전의 연주는 항상 한 침대에서, 제 품에 안겨 잠들려 애썼다. 그가 똑바로 누워 잠들면 옆에 나란히 누워 팔을 끌어안은 채 자고, 등을 돌려 누우면 등 뒤에 매미처럼 달라붙어서 밤마다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연주는…….

“편해 보이네.”

정엽도 과거와 지금의 연주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났다고, 함께 지낸 세월만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길다고 갖은 말로 스스로를 달래 보아도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등골이 서늘해지고 손끝이 저릿저릿한 게 꼭 제 몸이 아닌 것만 같았다.

대체 왜일까. 곰곰이 생각하던 정엽이 어렴풋이 그 이유를 짐작했다. 저를 등지고 누운 연주의 모습이 부황과 반목하다 실의에 빠진 어머니의 모습과 퍽 닮아 있었다.

정엽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어머니이기 이전에 일국의 황후였던 여자가 벽을 향해 누워 숨죽여 눈물짓는 것이었다. 누구보다 아들을 사랑했던 황후가 등을 돌려 젖은 얼굴을 숨겼던 건 어쩌면 당연했다.

어린 아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은 옳은 행동이 아닐뿐더러, 만백성의 어머니인 황후가 눈물을 보이는 것 역시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엽은 어머니가 제게 등을 보일 때마다 극도의 불안감을 느꼈다.

‘유모, 나는 왜 태어나서 어머니를 힘들게 하는 걸까?’

‘어떻게 하면 폐하께서 나를 봐 주고 어머니를 기쁘게 할 수 있어?’

어린 정엽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유모에게 끊임없이 묻고 궁리하는 것뿐이었다. 나이가 들어 철이 들 무렵부터는 승전 소식을 알리는 것이 그가 찾은 유일한 방법이었다.

물론 좀 더 나이가 들었을 때는 그런 노력조차 전부 허사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서도.

‘네 마음을 돌리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일까?’

정엽은 아주 오랫동안 부황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그간의 경험을 통해 누군가의 마음을 얻는 것보다, 이미 제게서 등을 돌린 사람을 이해하고 설득하는 일이 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정엽은 연주만큼은 욕심내고 싶었다.

그녀가 돌아오게 만들고 싶었고, 전처럼 제게 사랑한다고 속삭여 주길 원했다.

“그러니까 포기 안 해.”

한동안 연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정엽이 조용히 침상에 올랐다. 그는 연주의 등 뒤에 나란히 몸을 눕힌 뒤, 그녀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평화로운 숨소리,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둥근 어깨,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작은 몸, 탐스러운 머리카락과 목덜미에서 진하게 풍기는 향긋하고 달콤한 향기까지.

정엽은 연주가 가진 윤택한 아름다움에 안정과 흥분을 동시에 느꼈다. 펄떡거리는 심장 소리가 그의 정신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정엽은 조물주의 탁월한 능력에 감탄하며 연주를 더욱 당겨 안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머리 위에 가볍게 턱을 올렸다.

품 안이 연주로 가득 채워지자 문득 향주로 오는 동안 겪은 고생들이 다 이 순간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아우가 보낸 살수에게 쫓겨도, 위풍당당한 황제의 특사 신분으로 안가에 몸을 숨겨야 하는 처지도 다 괜찮다니.

그 순간, 연주가 나룻배에서 자신을 향해 되묻던 말이 떠올랐다.

‘기우제를 지낸 후 비가 내리든 내리지 않든 어떤 경우에도 당신에게 불리한 걸 알고 있어요?’

정엽은 연주의 질문에 태연하게 알고 있었다고 답했지만, 실은 그 상황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지까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자객의 습격에 대비한 건 자신의 안위보다 연주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태자의 위협이 연주를 만나러 가야겠다는 결심을 흔들 만큼 엄청난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기우제의 성공 여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시녀들을 부르는 것까지 포기하며 제 걱정을 늘어놓는 연주의 모습을 되새기자니, 이제야 자신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 조금 실감이 났다.

모두의 생각과 달리 스스로 용손이라는 믿음조차 없는 자신이 아닌가. 이런 마음가짐으로 기우제를 지낸다 한들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막막함이 엄습했다.

“뭐……. 어쩌겠어.”

연주가 왜 그런 걱정을 했는지 알고는 있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정작 그런 질문을 던진 연주만큼은 자신이 기우제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조금도 태도가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주는 저가 용손일까 봐, 혹은 용손이 아닐까 봐 염려하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자신이 겪게 될 곤란한 상황들을 안타까워할 따름이었다.

그 말인즉 연주는 저의 타고난 배경과 신분, 용손이란 예언에 홀려 자신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는 연주가 저를 우러르면서도 두려워하고, 또 실리에 따라 언제든지 외면할 준비가 되어 있는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그동안 저를 대해 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내가 미련했던 거라고 치면 그만이지.”

자조하는 정엽의 얼굴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그토록 오랫동안 저를 진심으로 대해 주는 사람을 곁에 두길 원했으면서, 왜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은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정엽은 이 순간만이라도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인정하기로 했다. 동시에 이렇듯 연주와 함께할 수 있다면, 당장 이 세상이 멸망해 버린다 해도 아쉬울 게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작은 방 안에서 허무하게 마지막을 맞는 것은 정엽이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만은 지켜 줄게.’

항상 살아남기 위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몰아세우고, 어떤 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버텨 온 세월이었다.

정엽은 연주의 온기에 자꾸만 녹아내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눈을 감았다. 온종일 쌓인 태산 같던 피로가 봄눈처럼 녹아내렸다.

* * *

다음 날 아침, 꿈도 없이 깊이 잠들었던 연주가 눈을 떴다. 침상에서 일어나 비단 휘장을 걷어 보니, 정엽은 어젯밤 돌아오지 않은 것인지 방 안이 고요하기만 했다.

홀로 무인도에 고립된 것처럼 아무런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 상황이 낯설었다.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연주가 무언가 잔뜩 쌓여 있는 탁자를 발견하고 자리를 옮겼다.

탁자 위에는 미지근한 소셋물과 양칫물, 비단 수건, 그리고 빳빳하게 다려진 새 옷이 놓여 있었다. 한쪽에는 찬합과 자개경대도 있었다.

“이게 다 뭐지?”

찬합의 뚜껑을 열어 보니 아직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고소한 죽 한 그릇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자개경대 안에는 빗과 계화 기름이 담긴 작은 병, 분첩과 연지, 눈썹먹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안가에 여종이 있다면 소세부터 식사까지 일일이 시중을 들었겠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하인이 필요한 물건을 준비해 주고 자리를 뜬 모양이었다.

“이런 걸 다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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