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연주는 뜻밖의 제안에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내가요?”
“추화원을 습격한 자객이 너와 내가 함께 있는 걸 봤잖아. 지금쯤 네 집 주변에 자객이 득실거릴 거야. 그러니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 당분간은 나와 함께 지내는 게 좋겠어.”
사실 정엽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비열한 수단도 서슴지 않는 태자가 언제든 연주를 인질 삼아 저를 압박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모든 얘기를 연주에게 곧이곧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연주는 저택을 지키고 있을 금란의 얼굴을 떠올렸다. 추화원에 두고 온 가화도 걱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쪽이 시녀들을 보호하는 길일지도 몰랐다.
“좋아요. 함께 갈게요.”
이윽고 정처 없이 흘러 내려오던 나룻배가 인적 없는 나루터에 닿았다. 두 사람은 서둘러 배에서 내렸다.
정엽은 배를 나루터에 정박시키지 않고 강어귀로 흘려보냈다. 현재 위치를 자객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가자.”
배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정엽이 연주의 손을 잡고 안가로 향했다.
* * *
정엽은 다급한 상황 속에서도 최대한 연주의 보폭에 맞춰 걸었다. 야심한 시각, 한참을 걸어 두 사람이 도착한 장소는 높은 담장이 엄청난 위용을 뽐내는 어느 대저택의 후문이었다.
딱딱- 딱- 딱딱-.
정엽이 문고리를 쥐고 박자감 있게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안쪽에서 황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금세 문이 열렸다.
“어서 오시옵소서, 전하.”
하인은 문을 열자마자 정엽을 향해 깊게 허리를 숙인 뒤 옆으로 비켜섰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정엽이 연주와 안으로 들어섰다.
“기우제를 지낼 때까지 이곳에 머물 것이니 경계를 강화해라. 용무군도 곧 이리로 올 것이다.”
“예.”
짧고 굵게 대답한 하인이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정엽은 조금도 불쾌해하는 기색 없이 연주를 미로처럼 얽힌 저택 안쪽으로 이끌었다.
연주는 정엽과 나란히 걸으며 주변 경관을 주의 깊게 살폈다. 특이하게도 각 건물을 에두른 안쪽 담장의 높이가 바깥 담장의 높이와 같았다.
“담장이…….”
보통의 저택은 채광을 위해 안쪽 담장이 낮은 게 일반적이었다. 이대로라면 누군가 저택에 침입한다고 해도 방 안에 사람이 있는지, 하다못해 불을 밝히긴 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연주는 안가의 독특한 구조가 오직 이곳에 머무는 자의 안전을 위해 설계된 거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면 좀 전에 만난 하인 역시 평범한 복장을 하고는 있었지만, 웬만한 정예 군사보다 다부진 체격을 가지고 있지 않던가. 어둠 속에서 느껴지던 심상치 않은 내공으로 보아, 안가를 관리하는 자들 역시 보통 하인이 아닌 듯했다.
‘이렇듯 철저히 방비된 곳이라면 더는 신변을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줄곧 안가가 발각된 이후의 위협을 염려하던 연주는 이제야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 그사이 정엽은 어느 아담한 건물 앞에 멈춰 서 있었다.
“오늘은 여기서 지내자.”
연주는 정엽의 말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물끄러미 건물을 올려다보니 영서각(靈犀閣)이라는 현판이 보였다.
“네.”
연주의 의사를 확인한 정엽이 먼저 깜깜한 건물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는 능숙하게 등불에 불을 댕긴 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방 안을 환히 밝혔다.
“들어와.”
연주는 정엽의 부름에 조심스럽게 영서각 안으로 발을 들였다.
아담한 탁자 하나와 의자 둘, 작은 침상 하나. 그리고 비단 휘장과 수정렴, 우아한 장식품으로 꾸며진 공간은 특별할 것이 없는데도 묘하게 낯이 익었다.
‘이런 곳을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연주는 오묘한 기분에 휩싸여 자리에 앉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방 안을 둘러보았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그녀는 이내 향산 별궁에서 지냈던 송연각 동재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영서각의 구조와 분위기가 그곳과 똑 닮아 있었다.
“……정엽?”
잠시 후, 어깨에 와 닿는 낯선 손길을 감지한 연주가 흠칫했다. 정엽이 방 한가운데 오도카니 서 있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고 있었다.
“왜 그래?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 방이 별로면 다른 곳으로 갈까?”
“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향산궁이 생각나서요.”
“아…….”
정엽은 짐작 가는 바가 있는 듯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연주를 탁자 곁 의자에 데려다 앉힌 뒤 그 역시 나란히 놓인 의자에 착석했다.
“향산궁에 있는 송연각은 부황께서 어머니를 위해 개축한 곳이었어. 부황께서도 소싯적 선황의 경계를 피해 이곳에서 잠시 지내신 적이 있다니 아마 그 영향일 거야.”
“그렇군요.”
영서각과 송연각 모두 황제와 선황후의 사연이 깃든 장소였다니. 연주는 새삼 정엽이 저를 이끄는 곳 하나하나가 의미 있는 장소였다는 깨달음에 숙연해졌다.
이렇듯 연주가 생각 많은 얼굴로 입을 다물자, 정엽이 주의를 환기하듯 헛기침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안가로 피신하긴 했지만, 당장 내가 가진 병력으로는 안가 전체를 경호하기에 한계가 있어. 그러니 경호 영역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당분간 이 방에서 함께 지내야 해.”
“알았어요.”
“여긴 여종이 없어서 네가 지내기 마냥 편하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이해해요. 내 걱정은 하지 말아요.”
복잡한 심사를 뒤로한 연주가 정엽을 안심시키듯 담담하게 화답했다. 연주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염려하던 정엽의 입매가 그제야 나긋하게 풀어졌다.
“여긴 어머니께서 지내시던 곳이니 여인에게 필요한 것들이 남아 있을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날이 밝는 대로 사람을 시켜 네게 필요한 물건을 구해 올게. 원하는 게 있으면 무엇이든 말해.”
“글쎄요…….”
“네 시녀들을 이리로 데려올까?”
연주가 망설이자 정엽이 의견을 제시하며 연주의 생각을 물었다. 연주는 제 의향을 묻는 정엽이 낯설어 별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 괜찮겠어?”
“네. 시녀들은 부르지 않는 게 좋겠어요. 당신 말마따나 자객들이 내 집을 주시하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시녀를 데려오려다 꼬리가 밟힐 위험도 있는데, 굳이 모험할 필요는 없어요.”
“그럼…….”
“시녀들에겐 만향방을 통해 내가 안전하게 지내고 있다고만 전해 줘요. 지금으로선 나도 갈아입을 옷가지만 있으면 충분할 듯해요.”
“알았어.”
“아, 만향방으로 사람을 보내는 김에 조향에 필요한 향료와 조향 도구를 구해 줬으면 좋겠는데. 가능할까요?”
옷이야 그렇다 치고 향료와 조향 도구라니. 정엽은 선뜻 연주의 부탁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연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설명을 덧붙였다.
“처리해야 할 주문이 많이 남아 있어요. 당신이 기우제를 마치고 떠날 때까지 일손을 놓으면 약속된 날짜에 맞춰 물건을 보내기 힘들어요.”
“그렇군.”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꼭 챙겨 주지 않아도 괜찮으니 무리하지 말고요. 당신의 안위가 최우선이잖아요.”
“그래. 알았어.”
정엽은 연주의 부탁을 되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밖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을 감지한 정엽이 소리가 나는 쪽을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듣지 못한 연주는 긴장한 눈으로 정엽의 행동을 지켜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잠시 후,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장명입니다.”
“알았다.”
경계 태세를 푼 정엽이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나갔다 올 테니 너는 침상에서 먼저 자고 있어.”
“……당신은요?”
“나는 어디서 자든 상관없어.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편히 자.”
“그래도…….”
“밤이 깊었어. 피곤하잖아.”
정엽은 저를 올려다보는 연주의 뺨을 살포시 어루만졌다. 복숭아처럼 부드러운 살결이 손끝에 닿자, 오늘 하루 동안 쌓인 피로가 사르르 녹는 것만 같았다.
오랜만에 미소를 지은 정엽이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겨진 연주는 그가 사라진 문 쪽을 오래 바라보다가, 느릿느릿 침상으로 향했다.
“하아…….”
연주는 침상에 무거운 몸을 눕힌 뒤, 침상 한쪽에 개켜져 있는 얇은 이불을 끌어당겼다. 온종일 놀라움의 연속이었던 탓인지, 머릿속에 금붕어가 살아 돌아다니는 것처럼 현기증이 밀려들었다.
‘그래도 한겨울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 다행이야.’
집을 떠나 맞닥뜨리는 현실적 문제는 보통 추위와 배고픔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곳에선 그것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좋았다.
비록 생명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긴 하지만, 정엽이 곁에 있고 충직한 용무군 군사들도 있으니 큰 걱정은 없었다.
‘가족들과 오래 떨어져 지내다 보니 그만큼 억세진 걸까.’
내가 강해진 건지, 아니면 정엽의 존재감이 주는 안도감이 그만큼 큰 것인지 명확히 구별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이 상황에서도 제가 쥐구멍에 숨은 생쥐처럼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떨고 있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복잡하긴 하지만 정엽과 재회한 일 역시 마냥 부정적으로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오늘 풍 대인의 제안을 거절하고 추화원에 나가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일을 피할 수 있었겠지만, 정엽이 향주에 머무는 동안 그 여파가 제게 미치지 않으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러야 하는 걸까.’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안가에서의 생활이 길어질 경우 고려해야 할 일이 많았다. 저택에 남아 있는 가화와 금란의 안전도 그렇지만, 귀한 향료가 넘치는 작업실과 정성껏 가꾼 정원의 관리는 어찌한단 말인가.
게다가 연주의 걱정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엽이 안가에 몸을 숨겨야 할 만큼 위험한 상황이라면, 수도에 있는 오라버니나 정엽을 지지해 온 우리 집안은 어떻게 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