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원하는 대답을 해 주지 않았으니 이거나 먹고 체하라는 뜻인가?’
연주는 점점 이상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질려 마지못해 젓가락을 들었다.
‘집에 가려면 별수 있나.’
한숨을 폭폭 내쉬던 연주가 억지로 수정교 하나를 입에 넣고 꼭꼭 씹었다. 얇은 피로 빚은 수정교에서 터져 나온 감칠맛 넘치는 육즙이 혀끝에 감겼다.
평소 같으면 음식의 맛에 감탄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텐데, 불행히도 지금 연주는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반면, 정엽은 연신 오물거리는 연주의 작은 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살면서 처음으로 먹는 것만 보아도 배부른 기분이 어떤 건지 실감했다. 연주가 제 앞에서 음식을 먹는 모습만으로도 엉망이었던 기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
연주가 마지막 수정교까지 먹은 걸 확인한 정엽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풍석현은 네가 내 아내인 것도, 내 신분도 전혀 몰라. 채신이 내 협박에 굴복할 사람은 더더욱 아니고.”
“……?”
“나는 아무도 괴롭힌 적 없어. 그러니 오해 풀어. 이제 자리를 옮겨야 해.”
겨우 수정교 한 접시를 다 비우고 차 한 모금을 마신 때였다. 연주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헤어진 남편과 갑자기 밥을 먹게 된 것만 해도 황당한데 뜬금없이 자리를 옮겨야 한다니, 그저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자리를 옮기다뇨? 그게 무슨…….”
“더는 이곳에 있으면 안 돼. 일어나.”
식탁을 돌아 연주에게 다가온 정엽이 막무가내로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대뜸 가느다란 허리를 당겨 안았다.
콰앙-!
그 순간,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더니 굉음과 함께 객실의 문이 부서졌다. 박살 난 문 앞에는 검은 복면을 쓴 장정 여럿이 날이 시퍼렇게 선 검을 들고 서 있었다.
“눈 감아.”
정엽은 연주에게 낮게 속삭였다. 연주는 그가 시키는 대로 눈을 꼭 감았다. 연주를 단단히 끌어안은 정엽이 순식간에 객실의 난간 밖으로 몸을 던졌다.
밖으로 뛰어내린 정엽과 연주는 하천 위에 정박해 있던 나룻배에 안착했다. 연주가 혼이 나간 듯 아찔한 기분을 느끼기도 잠시, 나룻배는 분주히 하류로 미끄러졌다.
발밑이 물결에 요동쳐 속이 더욱 울렁거렸다. 연주는 토악질이 치미는 속을 억누르며 정엽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품에서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향기가 진하게 풍겼다.
유자향, 말리향, 해홍화향, 그리고 침향.
연주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이것이 연 대인에게 만들어 줬던 안식향과 상연향이 뒤섞여 나는 향취임을 알아챘다.
‘거짓말이 아니었구나.’
그제야 연주는 자신이 연 대인이라던 정엽의 말이 진실임을 깨달았다. 수도를 떠나고 나면 영영 닿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사람이 실은 내내 제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니.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괜찮아?”
정엽이 통 몸을 가누지 못하는 연주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연주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 충격이 가시지 않는 듯 아까부터 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정엽은 연주를 품에 꼭 당겨 안고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따스하고 너른 품속에서 안정을 되찾은 연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
정엽은 어두운 표정으로 연주의 젖은 눈가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제야 자신이 놀라 눈물까지 흘렸다는 사실을 알아챈 연주가 황급히 소매로 눈가를 찍어 냈다.
“괜찮아요. 그냥,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밀려드는 무안함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연주가 정엽을 외면했다. 그러자 뱃머리에서 조용히 노를 젓던 사공이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군주마마, 이젠 안심하셔도 됩니다.”
“……장 부관?”
“소신을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삿갓을 깊게 눌러썼던 장명이 삿갓을 슬쩍 밀어 올리곤 환하게 웃어 보였다. 뒤늦게 마음을 조금 놓은 연주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나룻배는 추화원에서 한참 떨어진 곳까지 내려와 있었다. 사방을 벼린 눈으로 살피며 다시 한번 안전을 확인한 정엽이 연주를 다독였다.
“일단 좀 앉자.”
연주는 정엽의 손에 의지해 흔들리는 배 위에 앉았다. 그녀는 몸이 딱딱한 바닥에 닿고야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저 자객들은 다 누가 보낸 거예요?”
“…….”
“설마 황제 폐하께서 당신을 다시 해치려 하시는 건가요?”
현실감을 되찾은 연주가 연이어 질문을 쏟아 냈다. 그녀는 오두막에서 정엽이 해 준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출정길에 자객을 붙여 아들을 죽이려고 했다던 황제가 아닌가.
일부러 기우제를 지내라 떠나보내고, 그곳에 자객을 보낸다는 것부터가 과거의 양상과 비슷했다. 그러나 정엽은 묵묵부답이었다.
한참 만에 답을 내놓은 쪽은 장명이었다.
“차라리 황제 폐하 때문에 이런 위협을 겪는 거라면 이토록 억울하지도 않을 겁니다.”
“그게 무슨…….”
“저들은 황태자가 보낸 자객입니다.”
“황태자라니? 여기 계신 전하 말고 감히 누가 국본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말인가?”
3황자 소기가 황태자에 책봉된 줄은 꿈에도 몰랐던 연주가 발끈해 되물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설마…….”
“예. 올봄 3황자가 황태자로 책봉되었습니다. 폐하께서 급병으로 쓰러지신 뒤에 말이지요.”
장명이 우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연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정엽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3황자가 동궁을 차지할 수 있죠? 정상적인 절차를 밟은 게 맞나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옥새가 찍힌 성지는 아무도 거역하지 못한다는 걸 알잖아?”
“그래도…….”
“다행히 부황께선 아직 살아 계셔. 여전히 귀비의 치마폭 싸여 지내시는 시간이 길긴 하지만.”
정엽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래도 저를 위해 분노하는 연주를 마주하노라니, 내내 응어리져 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반면, 연주는 너무나 쉽게 단념해 버린 듯한 정엽의 모습에 오히려 화가 났다.
“그럼 지금 조정은 태자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는 건가요?”
“공식적으로 대리청정 명령이 떨어진 건 아니지만 사실상 그런 상황이야. 부황께서 국정을 돌보지 않고 계시거든.”
“그럼 기우제에 당신을 보낸 것도…….”
“네 생각이 맞아. 뭐, 수락한 건 나지만.”
정엽은 진심으로 이 모든 상황이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태평하기 그지없는 정엽의 반응에 연주가 한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기우제를 지낸 후 비가 내리든 내리지 않든 어떤 경우에도 당신에게 불리한 걸 알고 있어요?”
“알아.”
“그런데 왜 순순히 수락했어요? 이렇게 자객에게 쫓길 것까지 예상했으면서!”
조곤조곤하던 연주의 음성이 끝내 높아졌다.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르는데 스스로 함정에 빠진 정엽의 속내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추화원 아래서 장명이 나룻배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무슨 뜻이겠는가. 정엽이 태자의 계략을 사전에 눈치채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어서 수정교를 먹으라 재촉하던 그의 행동 역시 자객이 들이닥칠 것을 예상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엽은 아주 이상한 질문을 들은 사람처럼 의아한 얼굴로 답했다.
“네가 이곳에 있잖아.”
“…….”
“말했잖아. 네가 보고 싶어서 왔다고.”
간결한 고백에 연주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진심이 담긴 목소리는 세상의 어떤 진귀한 악기보다도 울림이 컸다.
“…….”
연주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정엽의 모든 얘기를 거짓말로 몰아세운 것이 뒤늦게 마음에 걸렸다.
정엽은 조용히 연주의 작은 손을 그러쥐고 엄지로 보드라운 손등을 문질렀다. 고작 손을 잡고 있을 뿐인데도 서로의 온기가 가슴 깊이 사무쳤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자, 눈치를 보던 장명이 말문을 열었다.
“한데 전하, 소신은 좀 전에 들이닥친 자객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은 게 영 마음에 걸립니다. 어찌 생각하십니까?”
“아무래도 수도에서 함께 출발한 수행원들 중에만 자객이 섞여 있는 게 아닌 듯하다.”
“전하의 말씀은……?”
“조정에서 마련해 준 관사와 그곳의 사용인 중에도 태자가 보낸 자객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뜻이지.”
사실 정엽이 예정보다 일찍 향주에 도착한 건 비단 연주를 만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조정에서 붙여 준 수행원 속에 섞여 있을지도 모르는 자객을 따돌리고, 비밀리에 그를 경호하던 용무군과 합류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거북이나 다름없는 수행원들을 반은 떼어 놓고 달려왔으니 일정이 보름이나 앞당겨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추화원을 습격하는 무리가 있다니. 이는 향주 곳곳에 태자의 사람들이 포진해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하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저희 용무군이 전하를 지켜 드리고 있기는 하지만, 관사에서 지내시는 건 너무 위험할 듯한데요.”
장명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정엽을 바라보았다. 고심하던 정엽이 입을 열었다.
“기우제 전까진 안가(安家)에서 지내야겠다. 너는 당장 우리 거점으로 가 용무군을 이끌고 그리로 오너라.”
“예.”
정엽의 명을 받은 장명이 점점 가까워지는 하천의 교각을 확인하곤 훌쩍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러고는 교각 위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놀랄 새도 없이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연주와 단둘이 남은 정엽은 직접 노를 젓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그런 그를 향해 연주가 물었다.
“향주에 안가가 있었나요?”
“이곳도 화서 지역에 속하잖아. 어머니께서 소싯적 향주에서 머무실 때 사용한 저택이 있어. 혼인 전에 계셨던 곳이라 그간 내 외숙께서 관리해 오셨지.”
말인즉 안가는 황실에서 파악하지 못한 교씨 가문의 재산이란 뜻이라. 현 상황을 두고 내심 불안을 감추지 못하던 연주가 조금 안도했다. 아우에게 동궁을 빼앗긴 상황에선 적장자인 정엽의 처지가 웬만한 서자보다 고달프고 위험했다.
그러나 정엽의 생각에, 저 자신보다 안위가 위태로운 사람은 따로 있었다. 다름 아닌 연주였다.
“너도 나와 함께 가지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