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하지만 정엽 앞에서 빈틈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연 대인은 어디에 있죠?”
“일단 앉아.”
정엽은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연주는 정엽의 요구에 굴하지 않고 꼿꼿하게 자리를 지켰다.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하건 휘말리지 않으리라. 연주의 결연한 의지는 점차 싸늘해지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절대로 앉지 않겠다는 얼굴이네.”
“…….”
“앉아. 설명해 줄 테니까.”
답답한 표정을 짓던 정엽이 한숨을 삼키며 채근했다. 그의 낮은 음성에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연주는 잠시 망설이다가 맞은편에 앉았다.
어쨌거나 풍 대인의 주선으로 마련된 자리인 만큼 왜 이런 엉뚱한 상황이 벌어졌는지 알 필요가 있었다.
‘혹시 정엽이 진짜 연 대인이나 풍 대인을 겁박하기라도 한 걸까?’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연주가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한가롭게 딴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
“…….”
연주는 차분히 정엽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는 이별한 지 1년이 지난 지금도 탄성을 자아낼 만큼 수려한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과거와 차이가 있다면, 스물여덟에 접어든 정엽에게선 풋내 나는 젊음이 아니라 세련되게 정제된 남성미가 물씬 풍긴다는 점이었다.
‘……사람이 사람 같지 않은 건 여전하네.’
물론 정엽의 날카로운 턱선과 고압적인 눈빛에선 여전히 야성적인 면모가 돋보였다.
다만 그는 언제든 사람을 찢어발길 준비가 된 맹수처럼 굴던 때와 달리, 최소한의 예절을 체득한 것처럼 보였다.
천하의 소정엽이 언제까지 착실히 예의를 지킬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이제 말해 줘요. 당신이 여긴 어쩐 일이죠?”
“……답장을 받으러 왔어.”
“……뭐라고요?”
“내가 보낸 서신에 대한 답장을 받으러 왔다고. 내 서신, 네가 무시했잖아.”
덤덤하게 대답한 정엽이 연주를 빤히 응시했다. 밤바다처럼 일렁이는 그의 눈동자에선 원망이 느껴지는 듯했다.
하지만 연주는 자신의 감정만 앞세우는 정엽의 태도가 황당하기만 했다. 애당초 그에게 먼저 서신을 보낸 건 자신이니, 그가 뒤늦게 향주로 띄운 서신들은 답신이라고 표현해야 옳지 않겠는가.
“하…….”
한참을 고민하던 연주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는 전적으로 그의 마음에 관한 문제라, 제가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 듯했다.
“그래서. 내게 화풀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요?”
“처음엔 그럴 생각이었어. 그런데 막상 만나니 화가 안 나네.”
말을 마친 정엽이 피식 웃었다. 내가 이런 황당한 말을 다 늘어놓다니. 그는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한번 물꼬가 트인 감정은 막힘없이 쏟아졌다.
“오지 않는 답장을 기다리는 것도,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도, 꽤 힘든 일이더군.”
“…….”
“그래서 그냥 달려왔어. 네 얼굴이라도 보면 좀 나을 것 같아서.”
속마음을 토로하는 정엽의 얼굴에는 어느덧 씁쓸함이 감돌았다. 반면, 연주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 사람은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는 하는 걸까?’
정엽의 이야기는 마치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그를 사랑했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했다는 뜻처럼 들렸다.
하지만 연주가 마치 해바라기처럼 정엽만을 바라보며 지낸 세월이 자그마치 3년이었다. 천 일 넘게 품어 온 감정과 고통을 어떻게 편지 몇 통으로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
연주는 1년 전과 전혀 다른 정엽의 태도에 혼란을 느꼈다. 그녀는 탁 트인 난간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붉게 칠한 2층 난간 밑으로 달빛을 품은 하천이 도도하게 흘렀다. 물길에는 붉은 등을 밝힌 나룻배 여러 척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연주는 평화롭고 고요한 정경을 내다보며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윽고 다시 정엽을 마주 보는 그녀의 표정은 이별을 고하던 그때처럼 단호했다.
“나 때문이 아니라 기우제 때문에 내려온 걸 알고 있어요. 당신은 나라와 백성이 최우선인 사람이잖아요.”
“…….”
“그러니 엉뚱한 이야기는 그만두고 이제 내 질문에 대답해 줘요. 나는 연 대인의 초대를 받고 왔는데, 왜 당신이 있는 거죠?”
“그걸 꼭 설명해 줘야 알아?”
정엽이 황당하단 듯 반문했다. 하지만 연주는 여전히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혹여 진짜 연 대인은 따로 있고, 정엽이 그를 사칭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였다.
연주의 기색을 살피던 정엽이 별수 없다는 듯 순순히 대답했다.
“내가 연 대인이야. 네가 지어 준 별칭인 ‘연랑’에서 따왔지.”
“그럼 풍 대인이 들었다는 딱한 사정이란 건…….”
“‘아내가 떠난 후로 잠을 이루기 힘들다. 안식향이 꼭 필요하다.’ 그렇게 말했더니 나를 아주 안쓰럽다는 듯 쳐다보더군.”
연주는 자꾸만 믿을 수 없는 소리를 하는 정엽 때문에 머리가 멍해졌다.
‘아내가 떠난 후로 잠을 이루기 힘들다고?’
정엽은 저를 붙잡던 순간조차 어린아이처럼 사랑과 부부의 의미를 되묻던 사람이었다. 한데 이제는 그리움의 고통을 토로할 정도가 됐다니.
연주는 이 모든 상황이 마치 연극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눈에 정엽은 극의 흐름을 따라 충실히 연기를 펼치는 배우일 뿐이었다.
‘말도 안 돼.’
물론 연주는 누구든 사랑을 깨닫고 변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정엽의 변화만큼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게다가 연주의 감정은 그것만으로 온전히 설명하기 어려웠다.
사실, 연주는 정엽의 변화가 조금 기꺼웠다. 그의 말을 어느 정도 믿어 주고 싶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그가 저 때문에 힘겨웠다니 후련한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 순간 연주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든, 정엽은 그가 하고 싶은 말을 빠르게 쏟아 냈다.
“잘 지냈어? 얼굴은 괜찮아 보이는데.”
“……덕분에요. 당신은요?”
“못 지냈어. 네가 왕부에 남겨 두고 간 물건들만으론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더라고.”
“이제 거짓말은 그만하고요.”
“내 말이 거짓말처럼 들려?”
정엽은 제 입에서 아니라는 말이 나오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러나 연주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지금 당신은 내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 뿐이에요.’라고.
한참을 망설이던 연주는 결국 침묵을 택했다. 연주의 모호한 태도를 지켜보던 정엽의 눈매가 가늘게 변했다. 그는 연주의 눈동자를 꿰뚫어 버릴 것처럼 곧게 주시했다.
사나운 눈빛을 받으며 미동 없이 앉아 있던 연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이곳에 해야 할 일이 있어 온 거잖아요.”
“그 일에 너를 만나는 것도 포함된다면?”
“……나는 앞으로 당신이 뭘 하든 상관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당신도 기우제에만 집중해요.”
“너를 귀찮게 하지 말라는 말처럼 들리는데.”
“맞아요.”
평행선을 내달리는 대화가 속도감 있게 이어졌다. 정엽은 철옹성을 에두른 듯한 연주의 태도에 막막함을 느꼈다.
조용히 어금니를 깨물던 정엽이 말했다.
“너 때문에 보름이나 일정을 당겨 왔어. 그런 내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고작 이런 것뿐이야?”
정엽의 목소리에서 서운함이 묻어났다. 그러나 대꾸하는 연주의 눈빛은 한결같이 무심했다.
“일정을 당겨 온 건 순전히 당신의 선택이었잖아요. 내가 당신에게 만나 달라고 사정이라도 했나요?”
“채연주.”
“오늘은 풍 대인의 얼굴을 봐서 자리를 지키는 거예요. 하지만 다음은 없을 테니 더는 내 오라버니와 풍 대인을 괴롭히지 마세요.”
연주는 오늘의 만남을 위해 정엽이 당연히 제 오라비나 풍 대인을 곤란하게 만들었을 거라 여겼다. 게다가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면 그는 언제고 오늘보다 더한 짓을 벌이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정엽은 기대와 다른 연주의 반응에 심사가 크게 틀어진 뒤였다. 오랜만에 만난 연주 앞에서 정제된 언행을 보이려 애쓰던 정엽은 기어이 억눌렀던 성질을 드러냈다.
“싫다면?”
“뭐라고요?”
“네 오라비든 풍석현이든 모두 내 발밑에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들이야. 내가 이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당신, 정말…….”
“최악이라고? 나는 너 없이 지내는 게 지금보다 훨씬 괴로웠어. 그러니까 이상한 말로 성질 돋우지 마.”
연주는 제멋대로 말을 내뱉는 정엽에 설핏 인상을 구겼다.
그사이 음식이 다 준비되었는지 점원들이 줄줄이 올라와 식탁 위에 먹음직스러운 요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호화로운 재료들을 사용해 만든 음식들이지만, 두 사람이 먹기엔 가짓수가 너무 많았다.
“음식이 너무 많아요.”
“이제 먹을 것 가지고도 타박인가?”
정엽은 기껏 준비한 음식 앞에서 불퉁한 말을 내뱉는 연주가 밉살스러웠다. 한숨을 내쉰 그는 새우 수정교가 담긴 접시를 연주 쪽으로 밀었다.
“됐으니까 이거나 먹어. 먹을 만할 거야.”
모든 게 엉망인 상황에 식사라니. 연주는 먹음직스러운 수정교가 담긴 접시를 못마땅한 듯 흘끗 내려다보았다.
새우 살로 만든 수정교는 연주가 무척 좋아하는 음식이라, 세자부에서 지낼 때 오라비 채신이 꼭 식탁에 올려 주던 음식이었다.
이 심란함은 정엽에게 시달렸을 오라비 때문인 걸까. 아니면 기우제를 지낸다며 내려와 엉뚱한 짓을 벌이는 정엽 때문인 걸까. 어느 쪽으로 생각하든 마음이 편치 않았다.
“됐어요. 배고프지 않아요.”
“날 그렇게 몰라? 나는 여기서 너와 밤을 새울 수도 있어. 나는 너를 더 오래 볼 수 있으니 손해 볼 것 없고.”
“…….”
“그러니 아무리 싫어도 이 수정교 접시는 비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