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102화 (102/161)

102화.

연주는 금란의 등쌀에 못 이겨 오랜만에 저자로 나섰다. 그런데 길목마다 사람이 북적이는 것과 달리, 거리의 가게 대다수가 영업하지 않고 있었다.

“왜 이렇게 문을 닫은 가게들이 많지? 네가 상심이 크겠구나.”

오랜만에 나들이를 나왔는데 이럴 수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금란을 다독인 연주가 만향방을 찾았다. 처리해야 할 볼일도 있거니와, 그곳에 가면 이 기이한 상황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다행히 만향방은 문을 열었구나.”

연주는 안도감을 안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만향방 안팎으로 이상하리만치 손님이 바글바글했다.

“상……! 아니지. 선생님, 어서 오십시오!”

풍 대인의 심복 홍검이 연주를 발견하고 알은체를 했다. 그는 연주를 평소처럼 상연 선생이라고 부르려다가, 그녀에게 쏠릴 손님들의 관심을 의식해 서둘러 말을 바꿨다.

연주는 홍검에게 눈인사를 건네고는 인파를 뚫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얼마 전 제작 의뢰를 받아 만든 향을 건넸다.

“여기, 은 부인께서 주문하신 향일세.”

“아이쿠. 벌써 완성하셨습니까? 은 부인께 약속한 날짜는 한참 남았는걸요.”

“하루라도 빨리 전해 드리면 은 부인께서 더 기뻐하시지 않겠는가.”

“그래도 소인이 사흘 후 댁에 들르겠다 약속드리지 않았습니까. 풍 대인께서 아시면 선생께 폐를 끼쳤다며 혼쭐을 내실 겁니다.”

홍검의 너스레에 작게 미소 지은 연주가 염려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마침 저자에 볼일이 있어 나온 참일세. 풍 대인께는 내가 잘 설명하지.”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지요.”

연주의 말에 한층 표정이 밝아진 홍검이 그녀가 준 향을 품에 소중히 안았다. 그사이 아까보다 북적이는 가게 안을 둘러본 연주가 입을 열었다.

“오면서 보니 저자에 사람은 넘치는데 식당과 점포 대부분이 문을 닫았더군. 무슨 일이 있는 겐가? 게다가 만향방에 이렇게까지 손님이 넘치는 것은 처음 보네.”

“어라. 모르셨습니까? 가뭄이 계속되다 보니 황실에서 귀한 분이 내려와 기우제를 지내신답니다. 바로 여기 향주에서요.”

“그래?”

“예. 그런데 아휴……, 보름 뒤에나 오신다던 그분이 갑자기 오늘 향주에 도착한다고 해서 이 난리가 난 겁니다. 다들 급히 향을 사러 나온 거지요. 저희도 향을 마련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아직 가게 문을 닫지 않은 거고요.”

황명을 받은 관료나 황족이 내려오면 성도의 백성들은 일제히 향로를 들고 거리로 나와 행렬을 맞이하는 것이 대화국의 풍습이었다. 그리고 행렬이 지나는 곳에 있는 가게는 특사의 안전이 위협당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모두 문을 닫아야 했다.

‘대체 누가 오는 걸까?’

황제를 대신해 예식을 거행할 정도의 신분이라면 연주도 아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기우제는 비를 부르는 의식이 아닌가.

‘설마…….’

어쩐지 좋지 않은 예감에 연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홍검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께선 수도에서 오셨으니 이런 사정에 대해 잘 아시겠군요. 이번에 향주로 내려오시는 분이 무슨 왕이라고 들었습니다.”

“……글쎄. 내가 수도에서 오래 지낸 건 사실이네만 일개 백성에 불과한 내가 어찌 황실에 계신 분을 알겠는가.”

“하기야. 그것도 그렇네요.”

홍검은 연주의 대답에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무심코 가게 한쪽에 놓인 물시계를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아이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시간이 다 되었으니 이제 가게 문을 닫고 나가 봐야겠습니다.”

“그렇군. 하면 풍 대인께는 따로 안부 전해 주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연주는 홍검의 인사를 뒤로하고 서둘러 만향방을 나섰다. 그녀는 인산인해를 이루는 큰길을 빠져나와 상대적으로 인적이 덜한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안색이 좋지 않으세요. 오늘은 나들이도 틀린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갈까요?”

급격히 안색이 안 좋아진 연주를 살피던 금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차피 사람이 너무 많아 당장 귀가하기는 그른 것 같구나. 차라리 행렬이 모두 지나간 뒤에 움직이는 게 좋겠다.”

“예, 아가씨.”

언제 두 사람을 따라 나왔는지 갑자기 나타난 가화가 연주의 의견에 동의했다.

“행렬이 도착했나 봐요.”

잠시 후 거리 끝에서 편종과 편경 소리가 들렸다. 그를 시작으로 온 거리에 장엄한 악곡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특사의 도착을 알리는 신호였다.

길의 양쪽으로 갈라진 사람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들은 향을 피운 향로를 머리 위로 공손하게 들어 올렸다. 연주는 이상하게 콩닥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큰길 쪽을 내다보았다.

먼저 황룡이 수놓인 비단 깃발을 높이 든 기수들이 지나갔다. 음악 소리가 점점 고조되는 가운데, 마침내 커다란 흑마 위에서 위풍당당한 자태를 뽐내는 헌헌장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엽?”

단박에 사내의 정체를 알아챈 연주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불길한 예감은 왜 항상 틀리는 법이 없는 건지.’

연주는 이루 형용할 수 없이 심란해졌다. 그녀는 무수한 상념을 억누른 채 행렬을 눈으로 좇았다.

사실, 연주가 기우제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다름 아닌 정엽이었다. 용손은 비와 구름을 부리는 재주를 가졌다고 여겨지지 않는가. 적장자라는 고귀한 신분을 차치하더라도, 그가 기우제를 책임질 적임자라는 데엔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또다시 황제의 시험대에 오른 건가?’

연주는 자연스럽게 정엽이 처한 상황을 예측했다. 밀려드는 갑갑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녀의 생각이 맞는다면, 정엽은 기우제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될 터였다.

‘정엽이 비를 내리게 한다면 용손의 예언이 힘을 얻어 백성들의 지지가 높아지겠지. 하지만…….’

사천감은 정엽이 황제를 위협하고 천지개벽을 일으킬 것이라 경고했으니, 황제의 미움 역시 깊어질 것이다.

반대로 정엽이 비를 부르지 못한다면 황제는 마음의 안정을 찾겠지만, 적장자라는 명분과 예언을 믿고 정엽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하나둘 흩어지리라.

‘그야말로 사면초가로구나.’

아무래도 황제는 죽는 날까지 정엽을 가만히 둘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연주는 조정의 정세를 다 알지는 못했지만, 정엽이 함정을 알면서도 받아들였을 거라 짐작했다.

‘황제의 아들로서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믿을 테니까.’

그놈의 책임감이 다 뭐라고.

연주는 고개를 내저었다. 온종일 살아남을 궁리만 해도 모자랄 판에 대나무처럼 올곧기만 한 행보에 기가 막혔다.

동시에 대의를 앞세우느라 예나 지금이나 저 자신을 돌볼 줄 모르는 정엽이 안타까웠다. 함정임을 알면서도 기꺼이 빠지는 그의 용기는 보통 사람인 자신에겐 없는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알아서 잘하겠지.’

무의식중에 정엽을 염려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연주가 입술을 짓이겼다. 그러곤 칡덩굴처럼 끝없이 뻗어 나가려는 상념을 서둘러 잘라 냈다.

그러는 사이 긴 행렬은 멀어진 지 오래였다.

“이만 돌아가자꾸나.”

가화가 아까부터 진지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주는 머쓱한 표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렇게 몇 걸음 걷는데 어쩐지 곁이 허전했다.

돌아보니 금란이 얼굴을 붉힌 채 멍하니 정엽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란아, 돌아가자꾸나.”

“예? 예, 아가씨.”

말까지 더듬을 일인가?

금란은 정엽에게 영혼이라도 빼앗긴 것처럼 굴었다. 실소한 연주가 그녀를 챙겨 집으로 향했다.

* * *

귀가한 연주는 다시 외출을 줄이고 조향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풍 대인이 찾아와 의외의 소식을 전했다.

“연 대인께서 오늘 저녁 선생을 만나고 싶다고 연통을 보내왔습니다.”

“연 대인께서요……?”

“그렇습니다. 오늘 저녁, 추화원에서 만찬을 대접하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연 대인은 만향방을 통해 연주에게 처음으로 조향 의뢰를 맡긴 손님이었다.

그가 연주에게 정기적으로 주문하는 것은 숙면을 돕는 안식향. 만향방을 돌보는 홍검의 이야기에 따르면, 연 대인은 지금까지 상연향을 가장 자주, 또 많이 구매한 사람이기도 했다.

‘나를 찾는다니. 대체 왜?’

연주는 전례 없는 상황이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그녀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자, 풍 대인이 덧붙였다.

“듣자니 연 대인도 꽤나 딱한 사정이 있는 분이시더군요. 한데 선생의 안식향 덕을 크게 봤다며 꼭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여러 번 청을 넣으셨습니다.”

“대체 무슨 사정이 있기에 그런 건지요?”

“그건 선생께서 직접 연 대인을 만나 듣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풍 대인의 반문에 연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 대인은 만향방의 중요 고객이기도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의 사연을 멋대로 옮기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하지만 연주는 여전히 낯선 사내와 마주 앉아 식사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정 불안하시다면 홍검을 붙여 드리지요. 깃털처럼 가벼워 보여도 선생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무예 실력이 쓸 만합니다.”

“아,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예. 약속 시간은 유시입니다. 홍검도 늦지 않게 보내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대인.”

풍 대인을 배웅한 후, 연주는 곧장 외출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가화와 함께 약속 장소인 추화원으로 나갔다.

하지만 연 대인이 기다리고 있다던 곳에는 엉뚱하게도 정엽이 앉아 있었다.

“당신이 왜 여기…….”

연주는 고풍스러운 객실을 독차지하고 있는 뜻밖의 얼굴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속았다는 생각에 당혹감과 불쾌감이 일시에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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