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황후는 빈정거리듯 혀를 놀리는 귀비를 향해 두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귀비의 말은 모두 사실인지라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
황후는 대답 대신 성지를 움켜쥐고 파르르 떨었다. 그러자 내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3황자가 위풍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그는 황후 앞에 공손히 예를 갖추고 말했다.
“소자 비록 미욱하오나, 부황의 뜻을 받들겠나이다.”
3황자는 황후를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황제의 성지를 제게 넘겨 달라는 뜻이었다.
“…….”
황후는 정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연주와 이별할 때와 마찬가지로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3황자는 폐하의 성지를 받들라.”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연 황후는 망설임 끝에 성지를 넘겨주었다. 드디어 성지를 손에 넣은 3황자가 모두의 앞에 우뚝 섰다.
침전 앞을 지키던 모두가 눈치만 보며 침묵을 지켰다. 그 가운데 평소 3황자를 따르던 6황자가 가장 먼저 목소리를 높였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천세 천세 천천세!”
“……천세 천세 천천세!”
6황자가 선창하자, 더는 반발할 여지가 없음을 직감한 종친들이 잠시 술렁였다. 하지만 그들은 곧 일제히 황제의 후계자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모두가 엎드려 표정을 숨긴 가운데 정엽만은 요지부동이었다. 황태자 소기가 느린 팔자걸음으로 다가와 정엽의 앞에 섰다.
“형님께서는 분수를 모르시는군요.”
태자는 단어 하나하나를 짓씹듯 말했다. 말씨에 가시가 가득했다. 정엽은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인상을 쓰며 태자를 노려보았다.
소기는 마치 태묘에서 들었던 말을 고스란히 되돌려 줄 날만 벼르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저는 형님과 달리 자애로운 제왕이 될 테니까요.”
승리감에 도취된 태자가 비열하게 웃었다. 항상 우러러봐야 했던 정엽을 아래로 굽어보는 기분이 무척 흐뭇했다.
반면, 낯선 치욕감에 사로잡힌 정엽은 주먹을 말아 쥐며 이를 악물었다.
* * *
태자는 황제의 와병을 틈타 책봉식을 치렀다. 산과 들에 신록이 일고 논밭에 해충이 늘어날 무렵이었다.
그러나 수도의 소식과 멀어진 연주는 아무것도 모른 채 평화로운 일상을 만끽하고 있었다.
“지금이 몇 시지?”
느지막이 일어난 연주는 횃대에 걸어 둔 모자가 달린 비단 외투를 뒤집어썼다. 그녀는 문간에 놓아 둔 바구니를 챙겨 정원으로 나섰다.
바구니에는 새 모이와 화초 관리에 필요한 가위가 들어 있었다.
“자, 밥 먹을 시간이야.”
연주가 나타나자, 뜨락 곳곳에 숨어 있던 참새들이 기다렸다는 듯 날아와 짹짹거렸다. 앙증맞은 참새들의 재촉에 빙그레 웃은 연주가 바구니 속에서 좁쌀 한 줌을 꺼내 흩뿌렸다.
참새들은 흙바닥을 종종거리며 바지런히 좁쌀을 주워 먹었다. 고작 좁쌀 한 톨을 더 먹겠다고 아옹다옹 싸우는 녀석들도 있었다.
“너희 건 여기 있어.”
여느 때처럼 먹이 싸움에서 진 녀석들이 구석으로 밀려났다. 이를 확인한 연주가 마당 한구석에 좁쌀을 소복하게 쌓았다. 양껏 배를 채우지 못한 녀석들이 연주의 그림자 아래 몰려들었다.
“천천히 먹어. 천천히.”
연주는 잠시 쪼그려 앉아 몸집 작은 새들도 모이를 먹을 수 있도록 지켜봐 주었다. 한결 활기차진 새들은 고마움을 표시하듯 그녀의 주변을 맴돌다 사라졌다.
이윽고 좁쌀이 모두 사라진 것을 확인한 연주가 몸을 일으켰다. 참새 돌보기는 끝났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바로 화단을 가꾸는 일이었다.
“하룻밤 새 더 컸네? 기특해라!”
듬성듬성 새싹이 자라나던 화단은 여름을 맞아 훌쩍 큰 화초들이 무성했다. 연주는 방실방실 웃는 아기처럼 흐드러진 작약 꽃을 요리조리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꽃송이에 코끝을 대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신선한 아침 공기와 함께 다디단 작약의 향기가 가슴속을 뿌듯하게 채웠다.
“가화와 금란에게도 보여 줘야지.”
연주는 바구니에서 가위를 꺼내 개화가 절정에 이른 꽃송이를 골라 잘랐다. 그러곤 꽃잎이 떨어지지 않도록 바구니에 조심스럽게 담았다. 그녀는 흐뭇한 얼굴로 잘 꾸며진 정원을 빙 돌아보았다.
“역시 그간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어.”
연주는 상연향을 만든 보상으로 풍 대인에게서 저택을 넘겨받자마자 집 안에 정원을 마련했다. 그녀는 눈이 펄펄 내리던 한겨울에도 가화, 금란과 함께 열심히 흙을 고르며 정원의 터를 다졌다.
이를 본 풍 대인은 연주에게 향주에서 나는 작약 구근을 품종별로 선물했다. 선물을 받았으니 어찌 그냥 있을 수 있겠는가. 연주는 선물받은 작약을 욕심껏 화단에 심었다.
이 탓에 다른 화초를 키울 공간이 부족해지자, 연주는 정원을 넓혔다. 그녀는 담장 아래 또 다른 화단을 일구고 은방울꽃, 금낭화, 국화, 수국, 부용화, 해바라기를 줄지어 심었다.
그리고 정원 곳곳에 백일홍, 해홍화 같은 꽃나무와, 귤, 유자, 사과, 배, 앵두, 살구, 석류나무 같은 과실수도 심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연주는 정원을 가꾸며 자신만의 공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깨달았다. 수도에 있을 때는 꽃을 키울 때조차 주변의 시선을 살펴야 했고, 어딜 가든 시기에 찬 눈빛과 차가운 말을 견뎌야 했기 때문이다.
“이제 작약은 저 구석에 심은 녀석만 잘 피면 되겠는데…….”
흰색, 분홍색, 자주색. 색깔별로 작약을 꺾은 연주가 화단 끄트머리로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사탕 같은 봉오리를 올린 채 한참 소식이 없던 꽃대에 얼굴을 수줍게 드러낸 꽃송이가 보였다.
“드디어 피었구나!”
다른 작약과 달리 유독 개화 속도가 느린 탓에 이대로 꽃봉오리가 말라 떨어져 버리지는 않을까 마음을 졸이던 차였다.
연주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작약 군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고대하던 꽃을 마주한 그녀의 표정은 실망한 것처럼 흐려졌다.
“이건…….”
연주는 낯익은 작약의 자태에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연분홍 꽃잎과 연노랑 꽃잎이 한 송이에 모여 있는 신기한 작약은 정엽이 장명을 통해 선물했던 바로 그 꽃이었다.
‘이렇게 화려한 작약은 처음 보는군.’
‘마마께서 처음 보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 작약은 올해 처음으로 꽃을 피워 향주 자사가 전하께 바친 신품종이거든요. 전하께서 이 작약 꽃의 이름을 군주마마께서 지어 주시면 좋을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장명은 이 작약이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귀한 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부디 꽃에 담긴 정엽의 진심을 알아 달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연주는 이제 와 정엽의 마음이 무슨 소용이겠냐며 꽃에 변변한 이름조차 붙여 주지 않고 떠났다.
연주는 작약 앞에 세워져 있는 팻말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팻말에는 ‘무명(無名)’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름 없는 작약이라니. 그 사람도 참……. 설마 내가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다고 생각 없이 방치해 놓은 건가?’
연주는 풍 대인에게서 작약을 선물받은 때를 떠올렸다. 당시, 그녀는 꽃의 이름이 어쩌다 무명이 되었는지 무척 궁금해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저와 연관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제라도 꽃에 어울리는 이름을 지어 주어야 하는 걸까.’
연주는 이렇듯 아름다운 꽃이 제대로 된 이름조차 가지지 못한 게 안타까웠다. 그러나 이제라도 작약의 이름을 지어 정엽에게 보내자니, 쓸데없는 일을 벌이는 것만 같았다.
“이제 더는 서신도 오지 않는데 무슨 수로.”
한동안 줄기차게 이어지던 정엽의 서신은 지난달부터 소식이 없었다.
‘어쩌면 이제 작약의 이름을 지을 사람은 내가 아닐지도 모르는걸.’
연주는 정엽이 보낸 서신을 일일이 확인하지 않았지만, 그가 계속 서신을 보내 온 사실만은 알았다. 가화가 서신을 숨겨 줄 수는 있어도, 서신을 전하러 오는 사람까지 감출 재주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서신이 뚝 끊긴 마당이라, 연주는 정엽의 마지막 서신에 새 연왕비를 맞이했다는 소식이 담겨 있지 않을까 추측하던 중이었다.
“그냥 내 집에서만이라도 불릴 이름을 지어 주지 뭐.”
생각을 정리한 연주가 어렵사리 피어난 꽃송이를 조심스레 어루만져 주고 돌아섰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 봐도 마땅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그녀는 무명이라 적힌 팻말을 오랫동안 치우지 못했다.
* * *
그해 여름, 대화국은 가뭄으로 몸살을 앓았다. 특히 연주가 터를 잡은 전명성의 피해가 극심했다.
풍 대인으로부터 소식을 들은 연주는 상연향으로 축적한 재산 일부를 가뭄으로 고생하는 이들을 위해 내놓았다. 동시에 만향방을 통해 귀족들의 조향 의뢰를 받아 쉴 새 없이 일했다.
하지만 연주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일은 뭐니 뭐니 해도 상연향의 명성을 이을 새 향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종일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는 그녀를 지켜보던 금란은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가씨, 향주까지 와서 왜 감옥살이를 자처하세요? 저자도 구경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지내시면 얼마나 좋아요. 네?”
“난 괜찮다. 바깥나들이를 하고 싶으면 가화와 함께…….”
“네? 가화요? 지금 저 놀리시는 거죠?”
금란은 가화만 보면 속이 터져 죽을 것 같았다. 이 집에서 그녀가 편하게 말이라도 붙일 수 있는 사람은 가화 하나뿐인데, 어쩜 그렇게 과묵한지 마주할 때마다 벽을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홀로 뭐가 그렇게 분주한지 저택 안에서도 매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시녀인데도 주인 곁에 붙어 있지 않아 엉뚱한 데서 발견될 때가 훨씬 많았다.
금란은 작정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저는! 오늘 꼭! 아가씨랑! 저자 구경 나갈 거예요!”
“얘가 오늘따라 왜 이런담.”
“왜긴요. 이러다 우리 아가씨 세상 하직하실 것 같아서 그렇죠!”
“알았다.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