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이듬해 늦봄, 황후가 황자를 출산했다. 황실에 적통 황자가 둘로 늘어나자, 왕작을 박탈당한 이후 안 그래도 좁아졌던 곽 귀비와 3황자의 입지가 더욱 좁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역대 제왕의 위패를 모신 태묘 제례가 다가왔다. 막내아들을 얻은 뒤 건강이 예전 같지 않아진 황제는 정엽에게 제례 주관을 맡기고 칩거했다.
정엽이 제례를 맡게 된 것은 분명 기쁜 일이지만, 소식을 들은 황후는 정엽을 향한 걱정을 지울 수 없었다.
“제례를 주관하려면 이레 동안 재계를 해야 할 텐데, 정엽이 예전 같지 않아 걱정이구나.”
근심을 토로하는 황후를 허 상궁이 위로했다.
“마마,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연친왕 전하께서 그래도 예전처럼 군영에 매일 상주하며 빈틈없이 일하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게 대수겠느냐. 오히려 아무렇지 않아 보이려고 애를 쓰는 쪽이 더 위태롭고 안쓰러워 보이는 법이다.”
허 상궁이 무슨 말을 늘어놓든 정엽의 걱정뿐인 황후를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실 정엽과 가까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엽이 낭떠러지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죽하면 나이 어린 시양조차 오라비의 눈이 슬퍼 보여서 속상하단 말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정엽에게 필요한 사람은 자신도, 허 상궁도, 시양도 아니었다. 이것이 황후의 근심이 날로 깊어지는 이유였다.
“어차피 이기지도 못할 거, 정엽인 무슨 생각으로 연주 그 아이에게 그토록 모질게 굴었는지 모르겠구나.”
“연친왕 전하께서도 태묘 제례를 받드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아실 것이옵니다. 총명하신 분이니 이번에도 보란 듯이 이겨 내시겠지요.”
황제를 대신해 제례를 받드는 것은 제국 만방에 차기 황제로서의 위용을 드러내는 일. 그 의미는 권력의 향방에 관심을 가지는 자라면 누구든 알았다.
“……부디 그랬으면 좋으련만.”
황후는 정엽을 걱정하면서도, 차마 그의 앞길을 막지는 못했다. 정엽을 황제의 옥좌에 앉히는 것이 먼저 세상을 떠난 언니와의 약속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었다.
* * *
정엽은 태묘에 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초헌관을 맡았다. 그는 7일 동안 태묘에 있는 신소전(神霄殿)에서 재계한 뒤, 종실 왕공과 관료들을 이끌고 제례를 주관했다.
그리고 3황자 소기가 두 번째 술잔을 올리는 아헌관을 맡아 정엽의 뒤를 따랐다. 앞서가든 뒤따르든 평생 마주치고 싶지 않던 아우와 대면한 정엽은 제례 내내 불편한 심기를 억누르느라 부단히 애를 썼다.
그러나 겉보기에 흔들림이라곤 없는 정엽의 냉담한 모습은 황제의 적장자라는 배경이 아니더라도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수려하고 반듯한 이목구비, 태산 같은 풍채, 오랑캐를 벌벌 떨게 하는 불사왕의 명성과 그에 걸맞은 절륜한 무예 실력과 지략을 고루 갖춘 적장자라니.
무엇 하나 부족하지 않아 오히려 인간답지 않은 정엽의 완벽함은 이 나라의 미래가 어느 때보다 밝을 것이라는 확신을 불러왔다.
‘과연 사천감의 예언이 틀린 것이 아니야. 성군의 자질이로구먼.’
태묘를 찾은 사람들은 제례 내내 정엽을 우러러보며 경외했다. 그리고 3황자 소기 또한 정엽의 모습에 어느 한 곳도 모자람이 없음을 인정했다.
“형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정엽이 모든 예식을 마치고 의복을 정제하려 신소전으로 돌아가려던 때였다. 3황자가 정엽에게 다가와 살갑게 인사했다.
‘제 벗이라는 작자들까지 끌어들여 불손하게 굴 때는 언제고.’
갑자기 예의를 갖추는 3황자를 못마땅한 얼굴로 굽어보던 정엽이 마지못해 말했다.
“너도 고생 많았다. 한데, 제례 내내 표정이 좋지 않아 보이던데, 무슨 불만이라도 있었던 것이냐.”
3황자는 누가 들어도 시비조인 정엽의 말에도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그는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제례 내내 형님의 위엄 넘치는 모습에 넋이 나가 있었을 뿐입니다.”
“난 또 네가 부황을 극진히 모신 결과가 겨우 아현관이라 실망해 그런 줄 알았다. 그것도 아니면 아직도 금이 간 얼굴뼈가 다 붙지 않아 불편해서라던가.”
3황자는 연초부터 황제를 배행하며 사냥을 나가고, 이름난 법사를 궁으로 데리고 들어와 황제에게 단약(丹藥)을 지어 바쳤다.
그런데 이팔청춘으로 되돌려 준다는 단약을 복용한 황제는 정작 기력을 국정에 쏟지 않고 귀비의 치맛자락에 쏟으며 몸을 축내고 있었다.
그리고 정엽은 그게 다 3황자가 태묘 제례에서 제가 맡은 초헌관의 자리를 노리고 벌인 농간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침묵을 지키며 알 수 없는 미소를 띠던 3황자가 입을 열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적장자인 형님께서 계신데 제가 어찌 초헌관 자리를 욕심내겠습니까.”
“분수를 아니 다행이구나.”
정엽은 입에 발린 소리를 태연하게 늘어놓는 아우를 더 마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찬바람을 일으키며 먼저 자리를 떠났다.
3황자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정엽의 뒤를 지켜보았다. 정엽이 움직이는 모습만 봐도 감동하는 대중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아무래도 용손은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좌중의 마음을 사는 능력이 있는 모양이지.’
그런들 어떠랴. 어차피 지상은 신이 아닌 인간의 세계. 하늘 아래 사람이 뜻을 세워 이루지 못할 일은 없다.
선한 미소 뒤에 비릿한 욕망을 숨긴 3황자는 이윽고 정엽을 따라 신소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제례가 끝난 지 3일째 되던 날, 황궁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됐다. 황제가 급병을 얻어 쓰러진 것이다.
깊은 밤 황실에서 급파된 사자로부터 소식을 들은 종친들은 전통에 따라 황제의 침전 앞에 모여들었다. 여기에는 이제 갓 백 일이 넘은 15황자를 제외한 모든 황자들이 입궁해 황후와 자리를 지켰다.
“안에서는 아직도 소식이 없는 게냐.”
종친들이 모두 모이자 황후가 긴장한 얼굴로 어전 태감에게 하문했다. 지금 황제의 곁에는 황제가 쓰러질 당시 옆에 있었던 곽 귀비와 그녀가 부른 태의뿐이었다.
게다가 황제가 쓰러진 후 곽 귀비가 침전의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도 침전에 들지 못하도록 막아서고 있기에, 황후조차 황제의 용태에 관하여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난처한 표정을 짓던 어전 태감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황후마마. 소인도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길이 없사옵니다.”
“그게 무슨…….”
황망함에 말을 잇지 못하던 황후가 아까부터 종친들 사이에 석상처럼 서 있는 정엽을 응시했다.
황제가 이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날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모골이 송연해져 자꾸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렇듯 황제의 침전 앞에서 모두가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갑자기 침전의 빗장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 모이셨군요.”
곽 귀비가 침전 안에서 우아한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샛노란 비단으로 감싸인 성지가 들려 있었다.
“폐하의 뜻입니다!”
곽 귀비가 외치자, 상양궁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잠시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황후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곽 귀비가 엄숙한 얼굴로 성지를 펼쳐 들었다.
“짐의 옥체가 미령하다. 제국의 천년 대계를 위해서는 한시라도 후계자 책봉을 서두르는 것이 바람직한 바, 짐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 3황자 소기를 황태자에 봉한다!”
곽 귀비가 성지 낭독을 마치자 침전 앞에 모인 사람들이 경악했다. 적장자가 황제를 대신해 태묘 제례를 받든 지 3일 만에 지정된 후계자가 곽 귀비의 아들이라니!
곽 귀비의 출신이 미천한 것은 둘째 치고, 황제의 노여움을 사 왕작을 박탈당했던 3황자가 황태자에 책봉되는 것을 예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귀비는 그 성지를 내놓으라.”
도무지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황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자 귀비는 태연자약한 얼굴로 황후에게 성지를 건넸다.
성지에는 황제의 옥새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지만, 황제의 필적이 아니었다.
“황제 폐하의 친필이 아니군. 누가 이 성지를 작성했는가?”
“접니다. 하지만 신첩은 폐하의 옥음을 그대로 받아 적은 것뿐입니다.”
“그 말을 어찌 믿지? 게다가 자네는 지금 황태자로 지목된 3황자의 친모이지 않은가?”
황후가 아는 황제는 제국의 명맥을 잇는 일을 이토록 허술하게 처리할 사람이 아니었다. 권력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보다 철저한 그가 교활한 애첩에게 제국의 미래를 맡길 리 없다는 뜻이었다.
설령 그가 진정으로 3황자를 황태자로 지명할 생각이었다고 한들, 유사 시 성지를 받드는 것은 일반적으로 황후나 종친의 몫이었다. 황제의 뜻을 옮기는 이의 권위가 황명의 정당성을 보장했기 때문이다.
황후는 곽 귀비를 향한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귀비는 모든 걸 예상했단 듯 답했다.
“신첩의 이야기는 함께 있던 태의가 증명해 줄 것입니다.”
이제 황후의 매서운 눈길이 구석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태의에게로 향했다.
“성지를 거짓으로 꾸미는 것은 구족을 멸할 대역죄이니라. 태의는 답하라. 정녕 폐하께서 3황자를 황태자에 봉하셨느냐?”
“예, 황후마마. 그렇사옵니다.”
황후의 하문에 태의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두의 앞에서 태의가 공언했으니, 이제 황제가 직접 침전 밖으로 나와 뜻을 번복하지 않는 이상 사태를 반전시킬 수 없었다.
황후의 고운 얼굴이 낭패감으로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귀비가 매끄럽게 웃었다.
“황후마마, 폐하의 뜻이 아니면 옥새는 절대 태정전(泰定殿)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아시지 않사옵니까. 신첩, 하늘에 맹세코 성지를 조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제국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불필요한 오해는 거두어 주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