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의심 가는 점이 있어 연주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그때, 밖에서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값비싼 비단옷을 걸친 후덕한 인상의 중년 사내가 연주를 발견하자마자 웃음 띤 얼굴로 다가왔다.
“그나저나 예정보다 일정이 많이 밀리셨군요. 오시는 길에 무슨 변고라도 생기신 것은 아닐까 염려했습니다.”
“수도에서 내려오는 길에 여러 명소를 들르다 보니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송구합니다.”
“아닙니다. 이렇게 무사히 저택을 찾아와 주셨으니 됐지요. 저는 향주에서 만향방(滿香房)을 운영하는 풍석현입니다. 왕세자께서 실력 좋은 조향사를 보내 주시겠다기에 이렇듯 선생께서 지내실 집을 구해 놓고 기다렸지요.”
만향방을 운영하고 있다고? 풍 씨의 낯익은 이름을 되뇌던 연주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세자 저하께서 찾아뵈어라 한 분이 풍 대인이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만향방은 전명성의 중심인 향주에서 가장 유서 깊은 향료 가게였다. 그리고 그 가게의 주인인 풍석현은 전명성에서 생산되는 최상급 향료의 유통권을 틀어쥔 거상이기도 했다.
“하하, 저야말로 왕세자께서 추천해 주신 조향사가 이렇듯 젊은 여성분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가요?”
“저택은 좀 둘러보셨습니까? 혹여 생활하시기에 부족한 점이 있다면 편히 말씀하십시오. 그게 가구든 의복이든 음식이든, 모두 채워 드리겠습니다.”
“아니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아직 둘러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당장 사람이 살기에 부족함은 없어 보이는 것을요. 그보다…….”
“예?”
“대인께서 저를 위해 거처를 준비하셨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향을 다루는 실력을 직접 확인하신 것도 아닌데, 이토록 큰 호의를 베푸신다는 게 도통…….”
아무리 왕세자의 추천이 있었다고 한들, 연주는 아무 조건 없이 자신에게 이토록 파격적으로 대우하는 풍 대인의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연주가 아는 한, 만향방의 주요 고객은 전국 각지의 향료상이었다. 만향방에서 조향사를 두고 자체 제작한 향을 판매한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대인의 호의를 고깝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궁금해서요.”
풍 대인과 마주 선 연주의 눈에는 의구심이 가득했다. 일평생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보아 온 풍 대인이 느긋한 얼굴로 답했다.
“선생께선 향을 만드시는 것뿐만 아니라 장사의 이치에도 밝으신 모양이군요. 예, 사실 이 저택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건 앞으로 석 달뿐입니다.”
“석 달이요?”
“그렇습니다. 단 석 달 안에 저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 특별한 향을 만들어 주신다면 이 저택은 선생의 소유가 되지요. 선생이 만든 향을 판매해 이익이 발생한다면 그만한 대가 또한 지급하겠습니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요?”
“저택을 떠나 주셔야겠지요. 아, 만향방을 위해 애써 주시는 동안은 제가 선생의 생활 전반을 책임지는 것으로 사례할 겁니다. 이후의 일들은 전적으로 선생께 달린 셈이지요.”
말인즉 사람들이 기꺼이 값을 치를 만큼 매력적인 향을 개발해 내면 이 저택은 물론이고, 판매에 따른 대가까지 얻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앞날이 조금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풍 대인의 제안은 당장 석 달간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오라버니가 풍 대인을 만나게 한 건 낯선 땅에서 시간을 두고 적응할 수 있도록 도우려는 거였구나.’
그러고 보면 오라비는 향주의 지인에게 연주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고 했다.
텅 빈 저택과 하나같이 새것인 살림살이를 확인한 순간, 오라비와 윤이 저 몰래 합심하여 거처를 마련해 준 게 아닐까 의구심을 품었던 것이 외려 민망했다.
만에 하나 형제들의 계략에 말려든 것이라 해도, 실력으로 풍 대인을 비롯한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생각하면 오라비는 분명 제게 기회를 준 것이 아닌가.
‘이제 기회를 잡는 건 내 몫이야.’
뜻을 굳힌 연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풍 대인과 곧게 시선을 맞췄다.
“앞으로 석 달간 잘 부탁드립니다, 풍 대인.”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
두 사람은 밝게 웃으며 서로 묵례를 주고받았다. 향주에서 맺은 첫 번째 인연이었다.
* * *
다음 날, 연주는 곧장 수도에 남은 오라비에게 향주에 잘 도착해 풍 대인을 만났다는 서신을 띄웠다.
그리고 저택에서 한동안 머물며 여독을 푼 윤은 연주가 부모님께 쓴 서신을 가지고 수행원들과 함께 해광성으로 떠났다.
난생처음으로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서기를 시작한 연주에게 돌아온 것은 기쁜 소식으로 가득 채워진 오라비의 답신이었다.
[사랑하는 누이에게.
네가 무사히 향주에 도착하여 풍 대인의 제안을 수락했다니 다행이다. 부디 마음껏 실력을 발휘해 보길 바란다.
수도의 소식을 궁금해할 것 같아 몇 자 더 적는다.
황후마마께서 회임을 하셨다. 마마의 말씀으로는 네가 선물한 소유향 덕분인 것 같다고 하시더구나.
공주마마께서도 건강하고 평안하시다. 네가 새 서화 스승으로 추천한 위 부인을 잘 따르고 계시니 염려 말거라.
언제나 너의 평온을 빈다. 부디 머나먼 타지에서 무탈하거라.]
황후의 회임 소식을 접한 연주는 뛸 듯이 기뻐하며 그날로 새 소유향을 만들어 수도로 올려 보냈다. 그러곤 그 과정에서 떠오른 발상을 참고해 새로운 향 개발에 착수했다.
연주는 한동안 저택 안에 마련된 작업실에 틀어박혀 향 배합에 몰두했다. 하지만 얼마 후 발신인을 알 수 없는 의문의 서신이 날아와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차가운 한수 땅에서 자라는 나무는 네 말대로 백매화를 닮았어.
네 편지를 다시 읽고 나니 늘 차갑게만 보이던 눈꽃이 한편으론 정말 봄을 알리는 것처럼 보이더군.
네 덕분에 겨울과 봄의 경계가 흐려졌어. 겨울이 봄 같고, 봄이 겨울 같으니 몸도 마음도 꽁꽁 얼어 가는 것 같아.
이곳에 네 흔적이 가득해. 정작 너는 내 곁에 없는데.]
활자로 찍어 낸 듯 반듯하고 힘이 넘치는 필체는 분명 정엽의 것이었다. 뜻하지 않게 정엽의 서신을 받아 든 연주는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6년 전에 띄웠어야 할 답장을 이제야 보내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연주는 정엽의 엉뚱한 행동에 극심한 혼란을 느꼈다. 밤하늘에 걸린 달이 뜬금없이 제집 앞마당에 떨어져 빛나는 걸 발견한 기분이었다.
새삼 향산궁에서 저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하던 정엽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끝없이 메아리쳤다.
‘이러다 말겠지.’
연주는 정엽의 서신을 그저 우연으로 치부하고 다시 일에 집중했다. 그러나 한 번뿐일 거라 여겼던 정엽의 서신은 사나흘에 한 번씩 꼬박꼬박 전해졌다.
정엽이 보낸 서신에는 예전에 연주가 정엽에게 보냈던 편지에 대한 답문이 적혀 있었다. 잘 지내냐는 변변한 인사 한마디 없이 무뚝뚝하게 제 용건만 담은, 참으로 정엽다운 서신이었다.
이렇듯 정엽의 서신이 꾸준히 이어지자, 연주는 아예 서신을 확인조차 하지 않고 시녀 가화에게 맡겼다.
“이 사람에게 온 서신들은 한데 모아 따로 보관해 주겠니?”
“갖고만 있으란 말씀이십니까?”
“그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 두기만 하면 된단다.”
“예, 알겠습니다.”
가화는 말수가 적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여인이었지만, 연주가 부탁한 일들을 아주 완벽하게 해냈다. 덕분에 연주는 풍 대인과 약속한 석 달 안에 새로운 향을 개발할 수 있었다.
말리화와 유자의 향을 기본으로 한 소유향에, 해홍화와 측백나무의 향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향기는 마치 나무가 빽빽한 산림 속에 숨겨진 낙원을 연상케 했다.
연주는 이 새로운 향을 상연향(爽然香)이라 이름 지었다. 풍 대인은 상연향에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그는 또 다른 제안을 건넸다.
“상연향의 제조 방법을 우리 만향방에게 넘기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지만 향의 제조 방법은 곧 조향사의 자산이었다. 연주는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으며 난색을 표했다.
풍 대인은 새로운 미끼를 던졌다.
“상연향을 통해 생긴 수익의 절반을 선생께 드리지요. 어떻습니까?”
어차피 군주의 신분으로 직접 상업에 뛰어들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정당한 대가를 받고 함께 공조하는 것 또한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좋습니다. 단, 제가 내거는 조건을 수락하신다면요.”
“말씀하십시오.”
“상연향은 반드시 질 좋은 재료로 만들어져야 합니다. 차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찾든 간에, 향의 품질은 반드시 최상급으로 일정해야만 해요.”
“질 좋은 재료라. 내가 가진 게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장사에 있어 고객과의 신뢰를 깨뜨리지 않는 건 기본이지요. 그 점은 염려 마십시오.”
이렇게 해서 연주는 풍 대인의 두 번째 제안을 수락했다.
그 후 풍 대인은 연주의 요청대로 그녀를 소개한 왕세자 채신에게 서신을 띄웠다. 서신에는 그가 연주와 약속한 내용과 약속을 이행하겠다는 확언, 그리고 붉은 인주로 찍은 풍 대인의 지장이 담겼다.
이를 받아 본 채신은 내용을 확인하고 서신을 잘 보관하겠다는 의미로 왕세자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풍 대인에게 회신했다. 그가 풍 대인과 연주 사이에 벌어진 거래의 증인이 된 것이었다.
* * *
연주가 요청한 절차가 모두 마무리되자 풍 대인은 곧장 향을 제조하는 데 필요한 최고급 향료를 공수했다. 그러곤 아주 소량의 상연향을 만들어 세상에 내놨다.
상연향은 순식간에 전명성의 사교계를 휩쓸었다.
“만향방에서 처음으로 내놓은 특제 향 모두 맡아 봤나요?”
“아, 최고급 향료로만 만든다는 그것 말이죠?”
“맞아요. ‘세상에 둘도 없는 특별한 낙원의 향’이라고 하던데. 어떤지 아는 분 있나요?”
“나도 아직까지 못 맡아 봤어요. 매일 딱 열 사람에게 열 돈씩만 판매한다니 구경하기도 하늘의 별 따기인걸요.”
“듣기로는 비취 조각을 붙여 장식한 흑단 나무 상자에 담아 판다는데, 그 나무 함조차 웬만한 보석 상자보다 아름다워서 텅 빈 것조차 고가에 거래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요? 그토록 특별한 향이라니 꼭 구해 봐야겠네요.”
독특하고 매력적인 향기, 그 자체로 예술품인 나무 함, 그리고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희소성으로 이목을 끈 상연향의 명성은 금세 생산지인 전명성을 넘어 수도 조양에까지 닿았다.
이 모든 일이 연주가 향주에 도착하고 정확히 석 달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상연부인.
만향방의 유일한 조향사.
연주는 더 이상 평해왕의 적녀나 연왕 소정엽의 아내로 불릴 필요가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