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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수월-98화 (98/161)

98화.

연주가 향주로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 계절은 여름으로 접어들었다. 들판의 청보리가 익고 산중에 부엉이가 우는 때였다.

연주는 가지고 있는 패물 중 일부를 집사 표 씨에게 맡겨 처분했다. 그리고 여행에 필요한 물건과 반드시 가지고 가야 하는 물건을 추려 짐을 꾸렸다.

짐 속에는 선황후의 유품인 조향 도구와 교향서,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책 몇 권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름이 무르익어 별당 연못에 홍연화가 만발할 즈음, 연주는 황실에 보낼 편지와 선물을 준비했다. 시양을 위해 준비한 문방사우와 화구, 황후를 위해 만든 소유향과 금사향갑이 그것이었다.

연주가 자신을 오래 돌보아 준 황후와의 인연마저 정리하고 나자, 형제들은 그녀를 위해 준비해 온 일들을 속속 공개했다.

“네가 고른 시녀는 너보다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해 타지에서의 생활을 꾸리기엔 어려움이 있을 것 같더구나. 하여 시녀 하나를 더 구했다. 향주에서 나고 자라 그쪽 사정에 밝은 아이이니 꼭 데려가거라.”

오라비 신은 연주에게 그녀보다 나이가 다섯 살 많은 새 시녀를 소개했다. 연주는 그 시녀에게 직접 가화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함께하기로 했다.

“저는 누님과 향주까지 동행하겠습니다. 누님을 향주까지 모셔다드린 뒤 해광성으로 돌아가려고요. 시녀 둘만 데리고 먼 길을 떠나면 어려운 일이 많을 겁니다.”

윤은 향주까지 동행을 자처했다. 그렇지 않아도 두 달은 족히 걸릴 긴 여정이었다. 연주는 자신의 안위를 염려하는 동생의 마음을 마다할 수 없어 그의 동행을 허락했다.

덕분에 향주로 가는 연주의 교통수단은 말에서 마차로 바뀌었다. 명목상 왕자의 귀환 길이므로, 그를 위한 호위무사와 하인 역시 줄지어 거느리게 되었다.

연주는 그제야 자신이 죄인처럼 떠나기를 원치 않는다던 형제들의 말을 이해했다.

불미스러운 일을 겪고도 연주가 당당하게 수도를 떠난다는 건, 그녀가 평해왕의 딸로서 충분히 존중받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낼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이렇듯 연주를 비롯한 가족들이 새 출발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칠 즈음, 수도에는 무더위가 물러가고 가을이 찾아왔다.

* * *

끈적하고 뜨겁기만 하던 바람이 선선하게 느껴지는 아침, 연주는 막냇동생 윤과 함께 세자부의 붉은 대문을 나섰다.

“연주야, 부디 몸조심하거라. 자주 편지하고. 응?”

“네. 오라버니도 부디 안강하세요.”

연주는 대문 밖까지 배웅 나온 오라비를 꼭 끌어안고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정엽과 부부의 인연을 정리한 후부터 오늘까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오라비여서일까. 막상 오라비의 곁을 떠날 때가 되니 그의 존재감이 실감 나 연주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그간 정말 고마웠어요, 오라버니.”

“별말을 다 하는구나. 내게 고마우면 그만큼 향주에서 잘 지내야 한다. 알겠니?”

“네. 꼭 그럴게요.”

울음기 섞인 누이의 목소리에 채신이 연주의 등을 다정하게 토닥였다. 그 다정한 손길에 애써 슬픔을 삭인 연주가 오라비의 품에서 빠져나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신이 소매에서 쪽지 하나를 꺼내 연주의 손에 쥐여 주었다.

“향주에 도착하거든 이리로 가 보거라.”

“여기가 어딘데요?”

“향주에 내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이 있어. 향주는 물론 전명성 일대에서 꽤 유명한 사람이지. 네가 향주에서 정착하는 데 도움을 달라고 부탁해 두었다.”

“오라버니, 이러시지 않으셔도…….”

“향주에 도착하거든 괜히 객잔을 전전하며 여비를 쓰지 말고 곧장 이리로 가거라. 네가 내 누이라는 건 밝히지 않았으니 염려하지 말고.”

연주의 오라비는 어려서부터 수도에서 생활한 덕에 전국 각지에서 모인 유력가들과 교분이 있었다. 이 나라 어디를 가든 채신의 막역지우가 있다는 건 그와 가까운 사람이라면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오라비가 저 때문에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했다니. 연주는 오라비의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별수 없이 마음이 무거웠다.

“네가 재물은 절대 안 된다고 고집을 부리기에 오라비가 고심 끝에 준비한 선물이다. 그러니 내 성의를 무시하지 말거라.”

“알았어요. 감사해요, 오라버니.”

때로는 주는 대로 받는 것도 상대를 위한 배려. 연주는 신을 향해 예쁘게 웃어 보였다.

고운 미소에 그제야 마음을 놓은 신이 말없이 연주의 손을 힘주어 맞잡았다. 그러자 내내 소외되어 있던 윤이 불쑥 끼어들었다.

“형님께선 늘 이 막내를 홀대하시네요. 이래 봬도 막둥인데 저하고도 인사를 하셔야죠, 형니임.”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서운함을 표시한 윤이 연주가 했던 것처럼 신의 품에 안기려 들었다. 신은 질색하며 윤을 밀어냈다.

“아무리 동생이라도 시커먼 사내 녀석을 끌어안는 취미는 없다. 어서 떠나거라.”

“쳇. 형님도 참 너무하십니다. 그렇죠, 누님?”

윤은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저를 거부한 형 대신 연주를 끌어안았다. 막냇동생의 능청은 언제 봐도 웃음이 났다.

“너희 모두 갈 길이 멀다. 인사는 이만하면 됐으니 지체하지 말고 어서 떠나거라. 윤이 너는 어제 내가 한 당부를 잊어선 안 된다.”

“예, 형님. 누님을 잘 모실 테니 염려 마세요.”

“그래, 너만 믿으마. 연주야, 이제 마차에 오르려무나.”

신은 연주가 편히 마차에 오를 수 있도록 손을 내 주었다. 마차 안에 앉은 연주는 재빨리 비단 휘장을 걷고 홀로 남은 오라비와 시선을 맞췄다.

“자, 출발하자!”

“예!”

말에 오른 윤이 호령하자 마차가 출발했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연주가 오라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신은 화답하듯 연주에게 고개를 끄덕이곤 떠나는 행렬이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연주와 윤의 행렬을 눈으로 좇는 사람은 채신뿐만이 아니었다.

수도의 남쪽 성문과, 그 너머 강과 평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 위.

말에 오른 정엽이 창백한 얼굴로 연주의 행렬을 지켜보고 있었다. 향산궁에서 돌아온 뒤 여름내 열병을 앓았던 그는 눈에 띄게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이를 알 리 없는 마차는 연주를 싣고 금세 강을 가로지르는 넓은 다리를 지났다.

“이제 완전히 내 곁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꽤나 즐거운 모양이군.”

연주는 영영 수도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뽀얀 흙먼지를 일으키며 남쪽으로 멀어졌다. 정엽은 눈 깜짝할 새 아스라이 사라져 버린 연주의 행적을 바라보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래도 나는 너 포기 안 해. 절대로.’

연주의 마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그녀가 타고 있는 마차만 보고도 뜨겁게 쿵쾅대던 가슴이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연주가 자신만만하게 수도를 떠나겠다고 선언한 뒤, 그의 심장은 꼭 제 것 같지 않게 날뛰고, 또 죽은 것처럼 잠잠해지기를 반복했다.

“이랴!”

정엽은 곧장 말머리를 북쪽으로 돌려 바람처럼 내달렸다.

그가 향하는 곳은 제국의 북쪽 끝. 자신과 연주의 비극이 시작된 한수였다.

* * *

향주로 가는 동안 연주는 윤의 제안으로 명승지 곳곳을 유람했다. 그러다 보니 두 달 남짓이면 충분할 것 같았던 일정이 석 달로 늘어났다.

연주를 태운 마차가 향주에 닿은 때는 어느덧 겨울의 초입. 그럼에도 1년 내내 기후가 온화한 향주에서는 가는 곳마다 형형색색의 꽃향기와 잘 익은 과일의 달콤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아름다운 산수, 밝고 활기찬 사람들, 귀를 간지럽히는 친숙한 남방의 언어, 입을 즐겁게 하는 다양한 음식들.

“향주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구나.”

향주에 도착하자마자 그곳의 매력에 흠뻑 빠져든 연주는 윤과 함께 도시의 중심을 둘러보며 가볍게 끼니를 해결했다. 그 후 윤의 수행원들을 모두 객잔에 떼어 놓고, 신이 향주에 도착하면 가 보라 당부한 장소로 향했다.

신이 알려 준 곳은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양지바른 동산 위였다. 거기에는 전명성 일대를 주름잡는 유력가의 집이라기엔 많이 소박해 보이는 저택이 서 있었다.

“여기가…… 맞나?”

연주는 예상과 다른 풍경이 찜찜했다. 저택 앞을 서성이던 연주가 주변을 살폈다.

저택보다 낮은 지대에 예닐곱쯤 되는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아무래도 눈앞의 저택이 이 마을의 유일한 대저택인 모양이었다.

연주의 고민이 길어지자, 윤이 그녀를 설득했다.

“누님, 이런 곳에 기와집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남다른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연주가 윤의 의견에 긍정하자, 함께 온 시녀 금란이 대문의 문고리를 잡고 두드렸다. 그러자 저택 안쪽에서 스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나는 조양에서 문원왕세자께 이곳을 소개받아 왔네.”

“아! 어서 들어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낯선 이를 향한 경계도 잠시, 연주의 대답을 들은 사내는 반색하며 대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오라비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니 연주로선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고맙네.”

의아한 표정으로 저택에 들어선 연주가 안을 살폈다. 그런데 저택은 오랫동안 비어 있던 것처럼 별다른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왜 이렇게 집 안이 조용하지? 저택에는 자신을 안내해 준 사내 외에 다른 하인조차 보이지 않았다.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느라 분주한 사내의 모습을 이상하게 여긴 연주가 의자에 앉지 않고 응접실을 맴돌았다.

“무언가 심려하시는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그러기도 잠시, 부지런히 차를 준비해 온 사내가 웃는 낯으로 물었다.

“아무것도, 아닐세. 그런데 이 저택의 주인은 출타라도 하신 것인가?”

“아, 예. 선생께서 오시거든 연통하라시며 저를 남겨 두고 가셨습니다. 이리로 모셔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공손하게 말을 마친 사내는 부리나케 저택 밖으로 사라졌다. 연주는 사내의 입에서 나온 ‘선생’이라는 호칭이 낯설어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는 사내가 건넨 찻잔을 내려놓고 응접실 내부를 눈으로 훑었다.

가구를 비롯한 세간은 하나같이 새것이라 사람의 손때가 묻은 흔적이 없었다. 주인의 취향을 드러낼 법한 서화나 그림 역시 한 점 걸려 있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자문하던 연주가 맞은편에 앉아 태연하게 차를 홀짝이는 윤을 바라보았다. 이 저택에 들어온 뒤부터 윤은 말 한마디 없이 차를 음미하는 일에만 열중이었다.

‘설마 오라버니가 윤이와 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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