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다음 날, 비가 그친 별궁은 운무가 자욱하게 끼어 한 치 앞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궁인들은 산중을 뒤덮은 안개보다 우울한 얼굴로 별궁을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안개가 짙은데 괜찮을까…….”
부지런히 짐을 나르는 궁인들을 지켜보던 연주가 뇌까렸다. 하지만 이런 근심은 모두 기우에 불과했다. 오래지 않아 다가온 아실의 얼굴에선 근심을 읽을 수 없었다.
“마마, 별궁을 떠날 채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내내 창가에 앉아 오래된 차나무를 바라보던 연주는 어느새 텅 빈 송연각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섰다. 발밑을 살피며 뿌연 안개 속을 지나, 느릿느릿 궁문 앞에 다다랐다. 그녀를 알아본 관리인이 깊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살펴 가시옵소서.”
“덕분에 잘 지내다 가네.”
짧은 인사를 마친 연주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까부터 통 정엽이 보이지 않았다. 아실이 입을 열었다.
“연친왕 전하를 찾으시는 것이옵니까.”
“그래, 전하께서는 어디 계시는가?”
“전하께서는 동이 트자마자 급히 별궁을 떠나셨사옵니다.”
언제는 포기하지 않겠다더니.
연주는 하루아침에 행동을 뒤집어 버린 정엽의 변덕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어젯밤 제법 상처가 큰 듯 보였던 그의 얼굴을 생각하면 예기치 못할 일은 아니었다.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모르지.”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정엽의 어두운 얼굴을 마주하면 쓸데없이 마음이 무거워지고 말 게 분명했다. 영문을 모르는 아실을 향해 애써 웃어 보인 연주가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너무 넓네.”
온기가 없는 마차에 홀로 앉아 있으려니 이곳으로 오는 동안 제법 안락하다고만 여겼던 마차가 쓸데없이 크고 허전하게 느껴졌다. 올 때와 달리 텅 빈 자리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오는 내내 건장한 몸을 구긴 채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던 정엽이 떠올랐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연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여전히 푹신하고 보드라운 비단 보료를 어루만졌다.
‘마차를 두고 갔으니 역시 말을 타고 떠났을까? 그렇담 오는 길에 구태여 마차를 고집했던 건 그래도 나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던 건지도…….’
머릿속을 떠도는 온갖 상념 때문에 금세 머리가 무거워졌다. 연주는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이제 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잠시 후 부드럽게 출발한 마차가 제멋대로 요동치며 산을 내려갔다. 아무래도 마차의 무게가 가벼워진 탓에 더 크게 흔들리는 모양이었다.
연주는 어지러운 눈을 꼭 감고 앞으로 결정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 * *
세자부로 돌아온 연주는 휴식을 취하며 몸과 마음을 재정비했다.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웃고 싶을 때 웃고, 이야기하고 싶을 때 이야기하는 평범한 일상이 이어졌다.
연주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늘 같은 자리에서 자신을 기다려 주는 가족들의 배려에 힘입어 금세 이별의 그늘에서 벗어났다. 그녀는 이날도 형제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치고 모여 앉아 있었다.
“오늘은 내가 후식을 준비했으니 배가 부르지 않다면 맛이라도 보고 가요.”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주거니 받거니 하며 잔잔하게 이어지던 대화는 연주가 만든 후식 이야기로 조금 더 활발해졌다.
“누님이 만드신 거라면 당연히 맛봐야죠.”
“이번엔 또 뭘 준비했느냐?”
“별것 아니에요. 정원에 장미가 가득 피어 있길래 선화병(鮮花餠)을 만들었어요.”
말을 마친 연주가 내실 한구석에 그림처럼 서 있던 금란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주인의 신호를 받은 금란은 다른 하인들과 함께 세 사람 앞에 선화병이 담긴 접시와 차를 내놓았다.
윤과 신은 망설임 없이 선화병을 베어 물었다. 입 안 가득 퍼지는 장미 향과 혀끝에 감도는 꿀의 단맛, 그리고 과자 자체의 고소한 맛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선화병 하면 전명성에서 만든 것을 최고로 치지만 저는 아직 누님이 만든 것만큼 맛있는 선화병을 먹어 보지 못했습니다.”
“네가 있으니 선화병을 맛보러 전명성까지 가는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과자 하나에 앞다퉈 칭찬을 늘어놓은 윤과 신이 연주의 표정을 살폈다. 뭘 해도 의욕이 없어 보이던 전과 달리, 이제 연주의 얼굴엔 조금씩 생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럼 향주에 정착하거든 이 선화병도 팔아 봐야겠네요.”
연주는 형제들의 극찬을 자연스럽게 받아쳤다. 신과 윤은 동시에 연주를 돌아보았다.
“향주?”
“누님.”
향주는 대륙의 서남쪽에 위치한 전명성의 성도(省都)로, 빼어난 산수와, 사시사철 꽃과 과일이 넘치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두 남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연주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기만 했다. 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결정한 거니?”
“네. 수도에서 향주까지 가려면 족히 두 달은 걸릴 테니 여름내 정착을 준비하고 무더위가 끝날 즈음 떠나려 해요.”
“……그렇구나.”
연주의 대답을 들은 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윤은 연주의 결정에 퍽 당황하는 눈치였다. 연주를 설득해 함께 고향인 해광성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던 윤으로선 당연한 반응이었다.
“한데 누님, 향주에서 홀로 지내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전명성이 해광성과 가깝긴 해도 꼬박 열흘은 말을 달려야 하는 거립니다. 혹여 누님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바로 알 수 없으니…….”
“나는 새 출발을 하려는 거야. 쉽지는 않겠지만 군주라는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지내고 싶어.”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영영 가족들을 보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잖니. 또 네 말처럼 열흘만 말을 달리면 고향에 갈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안 그래?”
이미 연주의 결심이 굳어진 것을 직감한 윤이 입을 다물었다. 잠자코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하던 신이 진지한 얼굴로 연주를 바라보았다.
“향주에 어떻게 정착하고 지낼지 이미 계획을 다 세운 거니?”
“네. 우선 가지고 있는 패물을 조금 팔아 최소한의 여비와 정착 자금을 마련할 생각이에요.”
“생계는?”
“다행히 제게 향을 다루는 재주가 있으니 향주에서 향과 관련된 일을 찾아 생계를 꾸릴까 해요. 일을 구하는 동안 드는 생활비는 살 집과 세간 살림을 마련하고 남은 비용으로 해결하고요.”
여기까지 말한 연주가 형제들의 얼굴을 살폈다. 예상대로 근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설령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아요. 삯바느질이든 책을 필사하는 일이든 가리지 않고 하다 보면 힘들긴 해도 먹고사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연주는 평해왕의 적녀였다. 말 한마디면 언제든 고래 등 같은 저택과 평생 다 쓰지도 못할 만큼의 금전을 손에 쥐고 이곳을 떠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패물을 팔아 여비를 마련하고 직접 일을 해서 생계를 꾸리겠다는 건,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홀로 서겠다는 뜻이었다.
그런 각오라면 하나뿐인 누이를 믿고 보내 주어도 되지 않을까. 어렵게 결심한 신이 말문을 열었다.
“네 뜻은 잘 알았다. 하지만 네가 죄를 짓고 조양을 떠나는 건 아니잖느냐?”
“네?”
“난 내 하나뿐인 누이가 속죄하듯 어려운 길만 골라 가는 건 원치 않는다. 그건 막내도 마찬가지일 거고. 그렇지, 윤아?”
“두말하면 잔소리죠.”
“부모 형제와 절연이라도 할 게 아니라면 우리가 너를 위해 뭐든 할 수 있게 해 다오. 작년 겨울 내가 네게 한 약속도 있지 않으냐.”
연주가 종정사에 갇힌 윤을 구하고 연왕부에서 돌아왔을 때, 신은 연주를 억지로 해광성으로 끌고 가려는 아우와 다툰 뒤 연주에게 약속했다.
먼 훗날 연주가 길을 정하면 그때 연주를 보내 주기로. 하지만 그전까지는 함께 지내며 충분히 고민해 보기로.
“……아, 분명 그렇게 약속했었죠.”
그때 제 편이 되어 주겠다던 오라비의 말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던가. 하지만 정작 연주는 주변에서 끊임없이 벌어진 사건 때문에 오라비와 한 약속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도 저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인걸요. 너무 마음 쓰실 필요 없어요.”
“널 믿지 못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너를 믿지 않으면 누가 널 믿겠느냐? 하지만 사랑하는 누이가 멀리 떠나는 마당에 오라비가 되어 아무것도 하지 말라니 서운하구나.”
“형님 말씀이 옳습니다. 저도 누님을 위해 뭔가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윤아, 왜 너마저…….”
어떻게든 자신을 도우려 애쓰는 형제들의 반응에 당황한 연주가 말끝을 흐렸다.
“누님, 형님과 저를 위해서라도 더는 사양하지 마세요. 누님께서 고집을 부리시면 형님과 제가 어찌 마음 편히 누님을 보내겠습니까.”
“그래. 여인 혼자서 연고도 없는 향주에 정착하는 게 쉽지는 않을 게다. 네가 향주에 정착한 후에는 무엇을 어찌하고 지내든 관여하지 않을 테니 가족들의 호의를 거절하지 말거라.”
말을 마친 신과 윤이 대답을 종용하듯 연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한참 대답을 망설이던 연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라비의 서글서글한 얼굴 뒤에 숨겨진 쇠심줄 같은 고집은 아무도 꺾을 수 없다. 이는 그의 누이인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알았어요. 대신 저를 위해 준비하는 것이 재물이라면 절대로 받지 않을 테니 그렇게 아세요. 혼자 사는 여인이 지나치게 부유하면 쓸데없는 말이 나돌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연주의 표정은 제법 단호했다. 하지만 신과 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하며 대답했다.
“명심하마.”
“저도요!”
정말 제대로 알아듣긴 한 걸까?
빠르게 고개를 드는 걱정을 애써 밀어 둔 연주가 작게 웃었다. 형제들의 고집도 어쨌든 다 저를 아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라 한편으로는 고마운 일이었다.
“내 뜻을 존중해 줘서 고마워요.”
연주는 그날 이후 향주로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두 형제 역시 덩달아 바빠짐은 물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