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할 말이 있어서 온 건가?’
뒤늦게 정엽이 향산궁 나들이를 제안하며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저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으니 정엽에게도 똑같이 기회를 주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들어는 봐야지.’
마음을 정리한 연주는 제 허리를 끌어안은 정엽의 손을 도닥였다. 정엽은 언제 봐도 얄미울 정도로 순진한, 그래서 더 사랑스럽게만 보이는 연주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잠시 후, 그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어.”
“네.”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그래서 이리로 오자고 했잖아.”
“기억해요.”
짧게 대답한 연주는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포갰다. 들어 줄 준비가 됐으니 무슨 말이든 해 보라는 뜻이었다.
차분하게 숨을 고르던 정엽이 말했다.
“상황이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아서, 더는 수도에 남을 이유가 없어서 떠날 거라고 했지.”
“맞아요.”
“내가 해결책을 알아. 그러니 만들어 줄게. 네가 남아야 하는 이유.”
“……?”
“연왕부로 돌아와.”
지금, 뭐라고?
연주는 정엽의 제안을 선뜻 이해하지 못해 인상을 찡그렸다. 이내 정엽의 속내를 짐작한 연주는 당황감을 감추지 못했다.
연주의 맑은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정작 말도 안 되는 제안을 꺼낸 정엽은 연주와 곧게 시선을 맞춘 채 또박또박 말했다.
“나, 소정엽에게 돌아오라고.”
작은 새가 날아다니듯 콩닥거리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어느새 표정마저 싸하게 굳어진 연주가 정엽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하…….”
연주는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들이마신 뒤 긴 한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니 그제야 중독에서 벗어난 뒤 시작된 정엽의 이상 행동이 조금 이해가 됐다.
그러나 이 순간 연주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건 정엽이 떠나려는 저를 붙잡아 주었다는 놀라움이나 기쁨 따위가 아니었다.
“돌아가면, 뭐가 달라지는데요?”
놀라움이 가신 자리에 밀려드는 건 역시 이 관계를 돌이키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다는 확신에 가까운 체념뿐이었다.
이런 속내를 알 리 없는 정엽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내가 다시 너를 지킬 거야. 우리가 떨어져 있는 동안 있었던 일들은 깨끗하게 묻히겠지. 예전처럼 아무도 너를 모욕하지 못할 거야.”
“그런 얘기 말고요.”
“그럼?”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잖아요.”
그때도, 지금도.
그리고 어쩌면 평생.
말을 마친 연주의 얼굴에 초연하다 못해 지친 기색이 비꼈다. 더는 흔들리지 않는 연주의 눈동자에선 아주 작은 미움이나 원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예상과 다른 연주의 반응에 정엽이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다시금 긴 한숨을 내쉰 연주가 입을 열었다.
“당신의 마음속엔 사랑은커녕 내가 들어갈 자리조차 없어요. 한수와 이 나라 강산의 안위만이 전부인 당신에게, 내가 왜 돌아가야 하죠?”
“…….”
“당신에게 내가 무슨 의미인데요?”
네가 무슨 의미냐고? 선뜻 연주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정엽이 미간을 좁혔다.
채연주는 하나뿐인 나의 아내. 살아서도 죽어서도 내가 품에 안고 함께할 여자. 이 이상 무슨 의미가 필요하단 말인가?
“…….”
정엽의 침묵이 길어지자 연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곤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나는 사랑을 원해요. 하지만 당신이 나를 향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이든,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3황자가 벌인 일 때문에 이러는 거라면 더더욱 사랑일 리 없어요.”
“……네게 와닿지 않으면, 다 사랑이 아닌 건가?”
연주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정엽이 실소했다. 대체 그녀가 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을뿐더러, 늘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던 여자가 유독 제게만 삐딱하게 구는 것도 거슬렸다.
고개를 비뚜름하게 기울인 정엽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우리가 헤어지기 전에도, 지금도 내게 사랑은 지키는 거였어. 내가 널 계속 위험에서 구하는 게 다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렇다면 당신이 지금껏 지킨 건 내가 아니라 이 나라예요. 황자로서의 책임 앞에선 그 무엇도 당신을 설득할 수 없잖아요. 심지어는 당신이 지금 말하는 나를 향한 사랑조차.”
연주의 눈은 정엽을 향해 제 말이 틀렸느냐고 되묻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연주의 말은 조금도 그른 것이 없었다.
그렇다 해도 정엽은 마치 제 삶의 방식이 틀렸다는 듯 말하는 연주의 태도가 당혹스러웠다. 요동치는 정엽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연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설령 내가 지금 당신에게 돌아간다고 해도, 내가 볼 수 있는 건 여전히 당신 뒷모습뿐일 거예요. 그걸 부부라고 할 수 있나요?”
“……대체 네가 생각하는 부부가 뭔데. 네가 원하는 사랑은 또 뭔데. 알려 주면 되잖아.”
정엽의 어조에선 약간의 원망마저 느껴졌다. 제 마음을 몰라주는 연주가 미우면서도 애가 타는 이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연주가 바라는 것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화목한 부부라는 건 정엽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엽은 살면서 그런 부부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어린 시절, 궁인들의 입을 통해 부모가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이야기를 주워들었을 뿐이었다.
“연주야.”
직접 겪거나 본 적 없는 일들은 아무리 이야기를 들어도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렸다.
정엽이 세상에서 경험한 유일한 사랑은 그를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자 애쓴 어머니의 것뿐이었다. 어머니의 방식이 그러했기에, 정엽은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것이 사랑이라 믿었다.
누군가의 애정에 보답하는 방법 또한, 죽을 각오로 전쟁터를 누벼 그들의 안위를 지키고, 나아가 그들의 곁에 살아 돌아오는 것만이 최고의 선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연주는 이 모든 게 틀렸다고 이야기하니 마음이 갑갑하다 못해 짜증스럽기까지 했다.
“채연주.”
갈피를 잃은 정엽이 연주에게 해답을 독촉했다. 연주는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는 정엽을 안타깝게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이 무의미한 대화에서 연주가 건넬 수 있는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았다.
“고작 말 한마디에 사람이 바뀔 수 있다면, 세상에 불행한 부부는 없겠지요.”
“……채연주.”
“이상하지 않나요? 우리가 부부로 산 세월이 3년인데, 이제 와 사랑이 무엇인지, 부부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는 게.”
“…….”
“천 일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린 대체 뭐였을까요?”
연주는 담담하게 되물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엔 희미한 미소마저 어려 있었다. 왜인지 몰라도 이 상황은 아주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
무언가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졌다는 것을 직감한 정엽이 얼음 조각처럼 굳었다. 길이 하나뿐인 협곡에서 예상 밖의 매복군을 만난 것처럼 간담이 서늘했다.
연주는 천천히 정엽을 다독였다.
“이런 질문들은 앞으로 당신이 함께할 사람에게 묻는 게 좋겠어요. 더는 내 미래에 당신이 없듯, 당신의 미래에도 내가 없을 테니까요.”
연주의 두 번째 고별은 봄볕처럼 다정했다. 하지만 정엽이 듣기에, 그녀의 말은 갓 피어난 꽃을 시샘하는 모래바람처럼 따갑고 매몰찬 구석이 있었다.
이대로 정말 끝이라니. 돌이킬 수 없다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허탈감이 밀려들었다.
“…….”
하지만 지금껏 자신이 뜻을 세우고 노력하여 이루지 못한 일은 없었다. 당장 연주의 마음이 돌아선 것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언제든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사람의 마음 아니던가?
정엽은 파도를 맞은 모래성처럼 부서지면서도 습관처럼 다음을 생각했다.
무너진 성은 파도에서 먼 마른자리에 다시 세우면 되고, 하는 수 없이 파도 위에 지어야 한다면 단단한 돌을 깎고 틈을 메워 해일에도 휩쓸리지 않을 철옹성을 세우면 그만이었다.
“……처음부터 단번에 네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나는 너 포기 안 해.”
비를 맞으며 내키는 대로 산중을 헤집고 다니는 동안, 정엽은 제 삶에서 결코 채연주를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 잠깐의 이별이 대수인가. 수도로 돌아오기 전까지 정엽은 연주와 2년 가까이 떨어져 지냈다. 또다시 멀어진다고 해도 못 견딜 이유가 없었다.
“네가 살아 있는 한, 너는 언제고 다시 돌아오게 될 거야. 내가 그렇게 정했으니까.”
연주를 곧게 바라보던 정엽이 그녀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저를 숨 막히게 옥죄는 정엽의 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연주가 작게 한숨지었다.
지금 이 행동은 실패를 모르고 자란 자의 오만한 태도일까, 아니면 성숙하지 못한 사내의 유치한 아집일까.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지만, 양쪽 모두 반갑지 않았다.
“좋을 대로 하세요. 나는 떠날 테니.”
아무리 불같은 열정이라도 시간이 흐르면 식기 마련이다. 지금은 3황자가 저를 탐낸다는 이유로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고 있지만, 관심이 식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모른 척할 게 뻔했다.
연주는 이제 이 피곤한 대화를 그만두고 싶었다.
“이제 할 얘긴 다 한 것 같은데. 나 좀 놓아줄래요?”
연주는 저를 으스러뜨릴 듯 죄어 오는 정엽의 굵은 팔뚝을 제지하듯 손을 얹었다. 혹여 놓으면 이대로 영영 날아가 버리는 게 아닐까, 고뇌하던 정엽이 마지못해 힘을 풀었다.
“쉬고 싶어요. 이만 돌아가 주세요.”
정엽의 바람과 달리 연주는 곧장 그의 무릎 위에서 일어났다. 정엽은 연주의 재촉에 등 떠밀리듯 방 밖으로 나갔다.
우여곡절 끝에 정엽을 다시 빗속으로 몰아낸 연주는 문을 닫고 그 앞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어지러운 이마에 손을 얹고 숨을 고르다가, 이내 무거운 몸을 침상으로 이끌었다.
“…….”
정엽은 문가에 서서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는 굵은 빗줄기를 맞으면서 오랫동안 어둠 속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