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연주는 저 자신을 비롯한 모두에게 마지막을 고하듯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결말이 정해져 있는데 쓸데없이 뒤를 돌아보거나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는 건 의미 없는 짓이었다.
정엽은 한순간에 상황이 엉망이 되어 버리자 이루 형용할 수 없는 허탈감에 사로잡혔다. 지금껏 연주에게 속내를 꺼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 온 게 무색했다.
그리고 아실과 양해는 위태로운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들은 서로 눈치만 보다가, 바보같이 합문 사이로 고개를 빼꼼 들이민 소렴자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저 이제 여지(荔枝)를…….”
“썩 꺼져라.”
양해가 소렴자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호통쳤다. 그러자 본래 이쯤 과일과 함께 정엽이 준비한 선물을 들이기로 약속했던 소렴자가 당황하여 울상을 지었다.
‘마지막만큼은 웃으며 잘 끝내고 싶었는데.’
역시 이별은 몇 번을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연주는 중요한 순간을 모두 망치고 만 자신을 책망했다. 그런 그녀에게 바깥에서 들리는 소란은 오히려 기회였다.
“무슨 일인가?”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어린 태감이 실수로 벌써 과일을 가져왔기에…….”
“나는 별로 생각이 없네. 식사도 이만하면 충분하고. 먼저 일어나지.”
할 말을 마친 연주는 도망치듯 팔각전을 나섰다. 먼저 밖으로 나가 버리는 연주의 뒷모습과, 홀로 남겨진 정엽의 모습을 번갈아 보던 아실이 황급히 연주의 뒤를 따랐다.
정엽은 연주가 떠난 식탁의 빈자리를 한참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멍하니 서서 숨을 고르던 정엽은 이내 치미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공들여 준비했던 식탁을 신경질적으로 엎어 버렸다.
와장창-!
“전하!”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것처럼 요란한 파열음이 얼어붙은 내실을 뒤흔들었다. 그 소리가 꼭 제 가슴 속에서 나는 것만 같았다. 표정이 완전히 굳어 버린 정엽이 빠른 걸음으로 팔각전에서 멀어졌다.
* * *
정엽에게 이별을 고한 나들이 첫날 밤, 산중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봄비는 요란하지 않게, 하지만 그치지 않고 오래 내렸다. 그리고 이 빗소리는 이명처럼 밤새 연주의 신경을 자극해 그녀를 잠 못 이루게 했다.
둘째 날, 연주는 날이 밝자마자 홀로 우산을 받쳐 쓰고 어제 정엽과 함께 있던 정자에 올랐다. 산안개가 자욱하게 낀 능선에서는 더 이상 어제의 황홀한 광경을 찾을 수 없었다.
눅눅하고 습한 공기 속에선 흙의 비린내와 뒤섞인 매화 향기가 느껴졌다. 연주는 홀로 씁쓸해했다.
“하룻밤 새 꽃이 다 져 버렸구나.”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었다. 이대로 비가 계속되면 내일 아침엔 지금보다 더 많은 꽃송이가 질 테고, 그럼 더는 만개한 매화를 볼 수 없으리라.
떠나려는 와중에 비바람에 휩쓸린 매화를 걱정하는 처지가 우스웠다. 하지만 그 가련한 모습은 어쩐지 내일 아침 이곳을 떠나는 제 모습을 똑 닮아 있을 것 같았다.
“비가 점점 거세지네.”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를 확인한 연주는 어딘가에 털어 버릴 수도 없는 우울한 감정을 고스란히 품고 정자를 내려왔다. 처소인 송연각으로 들어서자, 텅 빈 방 안에서 주인을 기다리던 아실이 곧장 간단한 아침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식기 전에 드시옵소서.”
연주는 의자가 하나뿐인 작은 탁자에서 홀로 음식을 받았다. 그녀는 무심코 정엽의 식사 여부를 물었다.
“전하께서는?”
“전하께서도 아마 식사를 하고 계실 것이옵니다.”
“전하께서도, 아마?”
평소답지 않은 불분명한 대답이었다. 연주는 물끄러미 아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의아함 가득한 연주의 시선을 느낀 아실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전하께선 어젯밤 이후로 침소에서 어떤 기척도 없으시옵니다.”
“……그래?”
아실의 말을 들은 연주가 고개를 기울였다.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아실의 목소리는 마치 정엽이 실의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어렵게 시간을 내어 달라고 했던 사람인데. 나들이 첫날부터 이별을 고해 나름의 계획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걸까?’
연주는 뒤늦게 나들이를 공들여 준비한 정엽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누가 무슨 짓을 해도 달라지지 않을 결말이었다. 설령 정엽이 행궁을 떠나는 순간까지 이별을 막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고 해도, 결국 남는 것은 좌절과 허무감뿐.
연주는 하루라도 일찍 현실을 받아들이는 편이 정엽을 비롯한 모두에게 이로울 거라고 여겼다.
* * *
밤 내내 그치지 않던 비는 둘째 날에도 종일 이어졌다. 꼼짝없이 처소에 틀어박힌 연주는 수령이 오래된 차나무가 보이는 창가에 앉아 생각 없이 밖을 응시했다.
“여전히 안개와 하늘이 하나가 된 것 같네.”
지금 바깥은 빗소리로 가득해서 이곳이 산중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새소리도,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는 산이라니. 산뜻하고 즐거워야 할 봄나들이는 손으로 아무렇게나 찢어 버린 종이처럼 엉망진창이었다.
“그래도 그 사람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안한 나들이니까.”
연주는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어떻게든 시간을 가치 있게 활용하려고 애를 쓰지도 않았다.
물론 정엽과 헤어진 후 언제, 어디로, 어떻게 떠날지 명확하게 구상해 둔 바는 없었다. 하지만 불확실한 계획의 빈틈을 하필 정엽을 위해 비워 둔 시간에 메우고 싶지는 않았다.
연주는 정엽에 관한 기억이 스치면, 창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볍게 흔들며 조용히 웃었다.
더는 정엽을 미워하지 않기로 한 덕분일까. 이별을 말하고 나면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릴지도 모른다는 염려와 달리, 마음은 잔잔한 호수처럼 느리고 부드럽게 일렁였다.
그렇게 특별하지만 특별하지 않은 나들이의 마지막 밤이 찾아왔다.
“침수 준비가 모두 끝났사옵니다. 그럼 소인은 이만…….”
아실은 가지런히 침상을 정리했다. 아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연주가 문을 나서려는 그녀를 붙잡았다.
“고맙네, 아실.”
“마마…….”
연주는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는 듯 담담하게 인사를 건넸다. 울컥한 아실이 창가에 앉은 연주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실은 연주의 손을 그러쥐고 울먹였다.
“……제발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시옵소서.”
“벌써 우는 것인가.”
아실은 벌써 아쉬움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연주는 아실의 얼굴을 다정하게 쓸어내렸다. 그러곤 아실의 거친 손을 마주 잡으며 말했다.
“나는 내일 곧장 세자부로 가네. 자네에게 따로 인사할 시간이 없을 거야. 언제 어디서든 자네의 안녕을 빌겠네.”
“마마…….”
“그간 정말 고마웠네. 고맙다는 말로 내 마음을 모두 전할 수는 없겠지만, 진심일세.”
연주의 진심 어린 인사를 들은 아실은 기어이 눈물을 떨궜다.
“소인도 마마께서 아껴 주신 덕에 분에 넘치는 행복을 누렸사옵니다. 감읍하옵니다, 왕비마마.”
말을 마친 아실이 바닥에 이마를 조아리며 연주를 향해 예를 갖췄다. 내내 담담하던 연주는 이 대목에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가를 붉혔다.
눈꼬리를 가볍게 훔친 연주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아실을 손수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따뜻하게 아실을 안아 주었다.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네. 이제 편히 쉬게.”
행여 추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을까. 연주를 향해 한 번 더 깊이 허리를 숙인 아실이 도망치듯 방을 나섰다.
‘오늘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겠구나.’
홀로 남은 연주는 어쩐지 좋지 않은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담요를 어깨에 두른 뒤, 온종일 앉아 있던 창가로 돌아왔다.
연주는 빗방울이 튕기는 서늘한 유리창에 이마를 댔다. 그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 속을 응시했다. 별빛도 달빛도 없는 산중의 밤은 인간의 근원적인 외로움을 온몸으로 체감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연주는 불규칙하게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를 벗 삼아 멍한 표정으로 상념에 잠겼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똑똑-.
갑자기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연주는 화들짝 놀라 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밤에 무슨 일이냐.”
“…….”
“무슨 일이냐는데도.”
하지만 아무리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윗사람을 모시는 처지라면 응당 자신이 누구인지, 무슨 일로 자신을 찾아왔는지 밝히는 것이 정상이거늘.
“설마…….”
어쩌면 저를 찾아온 사람이 궁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스쳤다. 연주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 앞에는 정엽이 우산도 없이 비에 젖은 채 서 있었다.
“이 밤에 무슨 일이에요?”
놀란 연주가 물었지만, 정엽은 말이 없었다. 조급증이 인 연주가 재촉하듯 말했다.
“정엽.”
연주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정엽은 잠긴 목소리로 느릿느릿 되물었다.
“들어가도 되나?”
“……네?”
연주는 예기치 못한 정엽의 행동에 조금 당황했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근처에는 정엽을 처소로 안내하거나 시중들 궁인조차 보이지 않았다.
정엽이 완벽하게 혼자임을 확인한 연주가 엉거주춤 뒤로 물러났다. 비 맞은 사람을 매몰차게 내치자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실례하지.”
정엽은 연주의 허락이 떨어지자 빗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알아서 작은 탁자 앞에 하나밖에 없는 의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잠깐만 기다려요.”
불빛 아래서 본 정엽은 오랫동안 빗속에 서 있었던 것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어 있었다. 정엽의 상태를 확인한 연주는 서둘러 제가 두르고 있던 담요를 끌러 그의 어깨에 둘렀다. 그러곤 아실이 떠나기 전 끓여 놓고 간 차를 잔에 따라 정엽에게 건넸다.
“수건이 여기 어디 있었는데…….”
연주는 차를 내어주는 것만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아실이 저를 시중들 때 필요한 물건을 넣어 두었던 버들고리짝을 찾았다. 그녀는 수건을 꺼내 와 정업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어딜 다녀오는 길이에요? 왜 산중에서 비를 맞고 다녀요.”
“…….”
“그런데 무슨 일 있어요? 갑자기 이 밤중에 왜…….”
“…….”
“정엽?”
내내 침묵하던 정엽은 곁에 서 있던 연주의 팔목을 힘 있게 끌어당겼다. 얼떨결에 정엽의 무릎 위에 걸터앉게 된 연주가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정엽은 두 팔로 연주의 허리를 단단하게 옥죄며 그녀를 제 무릎 위에 눌러 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