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수도를 떠나겠다는 결심은 변함이 없는데 이상하게 정엽에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언젠가 정엽의 옆자리를 채울 새 왕비의 존재를 생각하니 얼굴도 모르는 그녀가 벌써 부러워지기까지 했다.
소정엽의 사랑을 받는 아내라니. 저는 이루지 못한 꿈을 누군가는 이루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부질없는 시샘마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이제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얘기인걸.’
소정엽은 더 이상 나의 미래가 아니니까.
연주가 잡념을 떨치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사이 새 옷과 장신구, 새 신발로 연주의 단장을 마친 아실은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 여길 좀 보시옵소서.”
연주는 아실의 말에 무심코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확인했다. 그녀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제 모습에 깜짝 놀라 몸을 휘청였다.
몸에 딱 맞게 재단된 바다색 예복에는 연주가 가장 좋아하는 붉은 해홍화가 수놓아져 있었다. 금사를 섞어 짠 푸른 공단에는 투명하고 작은 수정 구슬을 촘촘하게 박아 마치 밤하늘의 별을 가루 내 뿌려 놓은 것처럼 반짝거렸다.
뿐인가. 귀와 목에는 심해처럼 짙푸른 청옥을 중심으로 작은 금강석을 알알이 박은 귀걸이와 목걸이가 드리워져 있었다. 머리 위에는 오색 보석으로 세공된 금관이 황홀한 광채를 발했다.
“이런 차림은 내게 너무 과분하지 않은가?”
차림새만 보면 친왕비의 위세를 능가하고도 남을 모습이었다. 연주는 당황한 얼굴로 곁에 선 아실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실은 외려 연주의 이런 반응이 이해 가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소인은 전하께서 준비하신 것들로 마마를 단장해 드렸을 뿐이옵니다. 분에 넘치는 것이 있을 리 없지요.”
정엽이 직접?
뒤늦게 정엽의 정성을 알아차린 연주는 거울 속에 걸린 제 모습을 다시 한번 꼼꼼히 살폈다. 그때, 약속 시각이 다 되었는지 문밖에서 양해의 정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한껏 들뜬 아실이 서둘러 동재의 문을 열었다. 그 움직임을 따라 연주가 자연스럽게 문간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검붉은 친왕의 예복을 근사하게 차려입은 정엽이 서 있었다. 오색구름에 휩싸여 여의주를 희롱하는 황룡이 생생하게 수놓인 의복은 정엽에게 무척 잘 어울렸다.
‘다른 사람에게 입혀 놓았다면 오히려 옷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처럼 보였을 텐데.’
황룡은 금방이라도 승천할 듯, 구불구불 휘어진 몸 가득 응축된 힘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신기하게도 온몸으로 정엽을 에두르며 그를 수호하는 것처럼 보였다.
‘용손이라더니. 그 말이 딱 맞네.’
새삼 정엽에게 내려진 용손의 예언을 상기한 연주가 소리 없이 웃었다. 정엽은 한사코 우연일 뿐이라고 손사래를 쳤지만, 세상에 자기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았다.
반면 정엽은 매 순간 아름다움이 더해지는 연주의 자태에 숨이 멎는 듯해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연주를 관찰하고 있노라면, 엊그제 땅에 심은 꽃씨가 눈 깜짝할 새에 싹을 틔우고, 어느새 꽃을 피운 것처럼 놀랍고 신기하기만 했다.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매번 이렇게 달라 보일 수가 있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황당할 지경이었다.
“왜 그렇게 보고만 있어?”
“……그냥. 친왕 예복이 무척 잘 어울려서요.”
“별말을 다 하는군. 시간이 다 됐으니 이만 가지.”
한참 연주의 미태를 감상한 정엽은 그녀를 향해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연주는 크고 듬직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문득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이 순간이 각자의 행복을 빌어 주며 헤어지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요. 가요.”
하지만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욕심을 내도 괜찮겠지.
연주는 정엽의 근사한 얼굴을 바라보며 곱게 웃었다. 그녀는 정엽과 손을 맞잡고, 함께 저녁 식사 장소로 이동했다. 저도 모르게 귓불이 붉어진 정엽은 애꿎은 연주의 손을 힘주어 잡고는 앞만 보며 걸었다.
식사 장소는 연주와 정엽이 처소로 삼은 송연각 후원 한가운데 있었다. 연주는 싱그러운 꽃과 나무로 가득 찬 드넓은 후원을 가볍게 산책하듯 걸어 팔각전으로 향했다.
팔각전을 에워싼 반투명한 비단 창문에는 부부의 금슬을 상징하는 새털 같은 자귀꽃이 날염되어 있었다.
“곱네요.”
“마음에 들어?”
연주는 대답 대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양해와 아실이 열어 주는 문 너머로 들어서자, 너비가 아홉 자쯤 되는 긴 장방형 식탁이 연주와 정엽을 맞이했다.
정엽은 연주를 먼저 의자에 앉힌 뒤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향기로운 작약과 솔가지, 초록 열매가 달린 망개나무 가지를 운치 있게 꽂아 놓은 화병과, 붉게 타오르는 나비촛대, 그리고 가짓수를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요리가 빼곡하게 차려져 있었다.
“만찬이라기보단 꼭 연회 같네요.”
“왜. 별로야?”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조금 의외여서요.”
“의외는 무슨. 네가 좋아하는 음식 위주로 준비하라고 했어. 마음껏 들어.”
말을 마친 정엽은 양해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양해가 앞접시를 들고 기다란 식탁 가운데에 놓인 여러 가지 음식을 조금씩 덜어 연주 앞에 놓아 주었다.
접시에는 연주가 연왕부에서 즐겨 먹던 음식이 가득했다. 거기에는 지난겨울 함께했던 식사처럼 정엽이 즐겨 먹지 않는 해산물 요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마워요.”
연주는 멀리 앉은 정엽을 향해 따듯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그러곤 정엽와 마찬가지로 곁에 서 있는 아실에게 고갯짓을 보냈다. 연주의 신호를 받은 아실은 양해가 그랬듯 식탁에 놓인 음식 중 정엽의 취향에 맞는 것을 골라 그에게 전했다.
‘처음부터 이 정도 관계였어도 좋았겠지.’
어느 한쪽만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나란히 사랑하고 평등하게 배려했더라면.
심복을 통해 음식을 주고받는 건 지극히 격식 있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예전의 연주는 딱딱한 예법이 안 그래도 먼 부부 사이를 더 멀어지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정엽과의 거리를 좁히고자 그의 식사를 일일이 챙겼다.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음식을 덜어 권하고, 정엽의 곁으로 의자를 끌어 앉아 조잘조잘 떠들며 식사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주 오랜만에 식탁 앞에서 예의를 갖추고 있으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아무리 혼인한 부부라 해도 이렇듯 거리가 필요하다는 걸. 사랑은 불꽃을 대하듯 해야 한다는 걸, 그땐 왜 몰랐을까.
‘너무 늦어 버렸네.’
생각을 정리한 연주는 양해가 접시에 덜어 준 음식을 조금씩 맛보았다. 연주가 식사를 시작한 것을 확인한 정엽 역시 그녀를 따라 천천히 수저를 들었다.
조용한 만찬이 이어지는 가운데, 두 사람은 각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속으로 차분하게 가다듬었다.
‘중요한 얘기는 조금 천천히 하자.’
연주가 식사를 마치면.
정엽이 저 접시만 비우고 나면…….
그러나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두 사람의 접시에 담긴 음식은 각자의 복잡한 심사를 대변하듯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식탁 위엔 그저 서로를 탐색하는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 뿐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시작을 말하려는 정엽과 완전한 이별을 알리려는 연주, 두 사람 모두를 만족시킬 만한 답이 존재할 리 만무했다.
정엽은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되자 슬슬 조바심이 일었다. 그는 옆에 놓인 다 식은 찻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기 시작했다. 연주는 빈틈을 놓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이곳에는 얼마나 머무를 생각이에요?”
정엽은 갑작스러운 연주의 질문에 조금 당황했다. 선수를 빼앗기긴 했지만 다행히 그리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사흘쯤. 네가 원한다면 더 있어도 좋고.”
“……그렇군요.”
“한데 그건 왜?”
“……돌아가는 길에, 나를 세자부에 내려 주었으면 해서요.”
연주는 가볍게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드디어 올 게 온 건가.’
정엽은 예상보다 담담한 표정으로 헤어짐을 말하는 연주 앞에서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제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한마디도 못 한 채 이별이라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마음이 급해진 정엽이 정신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급할 필요가 있어? 왕부에서 며칠 여독을 풀고 움직여도…….”
“아뇨. 이제는 이 생활도 정리해야죠.”
“…….”
“조만간 수도를 떠날까 해요. 다른 곳에 정착하려면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고요.”
정엽은 너무도 쉽게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하는 연주를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감정적으로 동요하든, 멀리 떨어져 앉은 연주에게는 모두 닿지 않았다.
이는 떨리는 손끝을 모아 쥐고 애써 초연한 척 얘기하는 연주의 감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
연주는 무거운 침묵 속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고개를 떨궜던 그녀는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얼굴을 들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의 상황이 불편한 게 나 혼자는 아니잖아요. 그러니 더는 수도에 남을 이유가 없지요. 무엇보다 당신도 내가 떠나야 편할 거고요.”
“…….”
“친왕으로서 이뤄야 할 업적들이 많은 걸 알아요. 이런 때 내가 당신 곁을 맴돌면 방해가 될 뿐이죠. 당신은 친왕 자리에만 머무를 사람이 아니고, 또…….”
머지않아 새 아내도 맞이해야 할 테니까.
그러나 마지막 말은 가시처럼 목에 걸려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정엽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또 뭐?”
연주는 정엽의 송곳 같은 질문에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그녀는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호화로운 만찬석에 사람을 질식시키는 물안개 같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어쨌든, 이젠 떠나려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