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93화 (93/161)

93화.

연주는 관자놀이에 진득하게 달라붙은 상념을 떨치기 위해 차창을 열었다. 그녀는 산만하게 스치는 바깥 풍경을 감상했다.

별궁으로 향하는 동안 일부러 연주의 시선을 피하던 정엽은 그제야 연주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내내 굳어 있던 정엽의 입매는 비로소 조금 나긋해졌다.

그사이 마차는 부지런히 달려 봉우리 중턱에 있는 향산궁 앞에 멈춰 섰다.

“다 왔네요.”

마차에서 내린 연주는 향산궁을 둘러싼 산의 경관에 천천히 녹아들었다. 지난번 별궁을 찾았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문 데다 비까지 쏟아져 미처 알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향산궁의 담백한 정취가 가히 일품이었다.

완만하게 솟은 행궁의 처마는 웅장한 멋이 있는 황궁보다 고즈넉한 사찰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산에 있는 돌과 나무를 그대로 살려 꾸민 정원은 황궁의 후원과 달리 소박하고 우아했다.

이렇듯 연주가 향산궁의 정경에 푹 빠진 사이, 손님의 방문을 기다리던 관리인이 두 사람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시옵소서. 산길을 올라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사옵니다.”

“먼저 올려 보낸 짐은 정리가 다 끝났느냐?”

“송구하오나 전하께서 처소로 고르신 송연각은 몇 년간 찾으시는 분이 없어 청소를 새로 하고 짐을 정리하는 중이옵니다. 별궁을 한 바퀴 둘러보시다 보면 짐 정리가 모두 끝나 있을 것이옵니다.”

“알았다.”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워낙 갑작스럽게 결정된 일이라 한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정엽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요즘 별궁의 백매화가 절정이니 처소로 들어가시기 전에 먼저 감상하시지요.”

관리인은 과묵한 정엽이 태생적으로 풍기는 위엄에 압도돼 쩔쩔맸다. 그러자 연주가 입을 열었다. 마침 봄 내내 병석에 누워 지내느라 올해 매화를 제대로 구경한 적이 없었다.

“산 아래는 이미 백매화가 떨어진 지 오래잖아요. 산중은 평지보다 기온이 낮으니 산 아래보다 매화가 늦게까지 피는 모양이에요. 저는 매화를 구경하고 싶은데, 향산의 별궁은 처음이라…….”

“아, 여기는 처음이던가?”

“네. 그래서 어디로 가야 제일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는지 모르겠네요. 관리인 자네가 추천을 좀 해 주겠나?”

물러가라는 말이 없어 우물쭈물 자리를 지키던 관리인이 연주의 요청에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하지만 대답하는 쪽은 정엽이었다.

“이 근처에 매화 군락을 감상하기 좋은 정자가 있으니 내가 안내하지.”

“전하께서요?”

“그래.”

이렇게 좋아하는데 계획이 조금 달라져도 큰 문제는 없겠지. 정엽은 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마치고 연주의 손을 잡았다. 그러곤 별궁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연주는 기대와 달리 정자로 향하는 내내 불편을 겪었다. 치렁치렁한 치마에 다리가 휘감겨 좁은 길목을 제대로 오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엽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녀와 보폭을 맞췄다.

“……?”

연주는 정엽의 낯선 행동에 그의 옆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다. 지금 곁에 있는 이 사람이 정말 제가 기억하는 냉혈한이 맞나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부질없이 이어지던 생각도 잠시, 연주는 곧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넋을 잃었다. 능선을 하얗게 물들인 백매화 군락의 맑고 깨끗한 풍경과, 거기에 덧입혀진 아찔한 매화 향기가 연주의 모든 감각을 집어삼켰다.

‘이 절경을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까.’

무릉도원(茂陵桃園), 아니 향산의 매원(梅園). 그것도 아니면 낙원(樂園).

‘아, 어부를 유혹한 꽃잎이 하필 복숭아 꽃잎인 것이 서글프구나……!’

연주는 눈꽃처럼 만발한 매화를 바라보며 어려서 보았던 그림 한 장을 떠올렸다. 복숭아 꽃잎에 정신을 빼앗겨 무릉도원에 들어선 어부를 표현한 그림이었다. 연주는 저 자신이 매화에 혼을 앗겨 별세계에 발을 들인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온몸을 휘감는 황홀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연주는 커다란 행복감만큼이나 느리게 밀려드는 아쉬움에 한숨을 삼켰다.

‘어디로 떠나든 매화나무는 있겠지만 이런 울림을 주는 풍경이 어디 흔할까.’

너무나 아름다운 이 풍광을 두 번 다신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연주를 흔들었다.

“꽃이 만개한 모습이 아름다워서 더 아쉽네요…….”

“저 꽃도 조만간 다 떨어질까 봐?”

“……네.”

“그래도 꽃은 다시 필 거야. 그게 하늘이 정한 약속이니까.”

“…….”

“내년 봄에 매화가 피면 다시 오지.”

내년, 내년 봄. 정엽의 말을 천천히 곱씹던 연주의 안색이 흐려졌다. 그녀는 얼마 후면 수도를 떠나 정엽이 없는 곳에서 사계절을 혼자 보내게 될 터였다.

물론 낯선 일은 아니었다. 남편을 전장으로 떠나보내던 시절에도 그랬고, 이별을 선언한 후 세자부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연주의 곁에 정엽은 없었다.

정엽의 말은 그저 지나가는 것에 불과한데 왜 이렇게 마음 한편이 시큰한 건지. 연주는 괜스레 눈길을 먼 하늘가에 두었다.

“어디 안 좋아?”

“아니요.”

“안색이 좋지 않아. 들어가자.”

묘한 기류를 감지한 정엽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연주의 팔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정자의 난간에 바짝 붙어 선 연주는 처소로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정엽과 함께하는 이 순간도 머잖아 허무하게 흩어지리란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좀 더 따뜻한 외투를 챙겨 올게. 아니면 화로. 어떻게 할까?”

“뭐든요.”

정엽은 어딘지 우울해 보이는 연주에게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외투를 벗어 연주에게 둘러 주었다. 궁인들을 부르려면 또 한참을 내려가야 하는데, 연주를 혼자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

오늘따라 이 사람은 왜 이리도 다정한지.

정엽은 마치 제가 곧 떠날 것을 아는 사람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세심하게 저를 챙겼다. 연주는 씁쓸하게 고개를 떨궜다.

‘왜 하필 지금인가.’

내가 한수를 떠나던 3년 전, 아니 정엽이 한북 전투를 마치고 수도로 귀환한 그날부터라도 지금처럼 나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더라면 많은 것이 바뀌었을 텐데.

어긋난 과거를 향한 미련이, 희망 가득한 가정이 연주를 지독하게 괴롭혔다.

“날 여기 데려와 준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그렇게 챙기지 않아도…….”

“그래서. 싫어?”

정엽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연주는 고심 끝에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정엽의 이런 행동들이 싫었다면, 진절머리 나도록 미웠다면 이토록 마음이 무거울 리 없었다.

다정도 병이라더니. 마음 쓸 일과 그렇지 않은 일도 구분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탓하던 연주가 끝내 울컥했다.

“지난 세월이 무섭긴 무섭네요.”

“그게 무슨 말이야, 갑자기.”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니긴, 우는데. 정엽은 어느덧 촉촉하게 젖어 가는 연주의 눈망울을 발견했다. 당황한 그의 손이 연주의 어깨 부근을 맴돌았다.

어쩐지 연주를 달래 줘야 할 것 같은데, 지금 연주는 살짝만 건드려도 흩어질 시든 꽃처럼 무척 연약해 보였다.

허공을 맴돌던 정엽의 손이 이내 가련하게 빛나는 눈망울 아래 안착했다. 눈물을 멈추려 해도 잘 안 되는지, 연주가 고운 아미를 설핏 찡그렸다. 그러자 새하얀 뺨을 타고 투명한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연주의 눈물은 마치 가을 이슬처럼 굴러떨어졌다. 이를 확인한 정엽이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눈물 자국을 지웠다.

“왜 이래, 오늘따라.”

“…….”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군.”

웃다가 울다가. 연주의 행동은 오늘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를 지켜보던 정엽은 조용히 연주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연주가 당장 훌쩍 저를 떠나 버릴 것만 같았다.

연주는 산중의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홀로 감정을 추슬렀다. 그녀는 이내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올해 매화는 실컷 봤네요.”

“……”

“이쯤이면 처소 정리도 다 끝났을 거예요.”

연주는 이제 손을 놓아 달라는 듯 정엽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정엽은 어쩐지 심각한 얼굴로 연주를 말없이 굽어볼 뿐이었다.

“……전하?”

화가 난 걸까. 정엽은 그렇지 않아도 꽉 잡은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엄청난 악력에 점차 손끝이 저려 왔다.

난처해하던 연주가 작은 목소리로 정엽을 불렀다. 연주의 속삭임을 들은 정엽은 하얗게 질린 연주의 손을 알아챘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아귀를 조금 느슨히 풀며 말했다.

“처소로 데려다줄게.”

정엽은 복잡한 얼굴을 황혼에 숨긴 채 한 걸음 앞서 나갔다. 그는 정자에 오를 때와 다르게 연주를 거침없이 이끌었다.

연주는 좁은 길목을 정신없이 내려왔다. 그녀는 송연각 앞에 나와 있는 아실과 양해를 발견하고 흠칫 놀라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정엽은 무슨 생각인지 정말로 연주를 데리고 처소 안까지 진입했다. 송연각 동재(東齋)로 들어온 정엽은 연주를 침상에 앉혔다.

“좀 쉬어. 저녁 식사 시간이 되면 데리러 올게.”

말을 마친 정엽은 침상 한편에 놓여 있던 담요를 끌어내 연주의 무릎에 덮어 주었다. 그러곤 빠른 걸음으로 송연각을 떠났다.

연주는 정엽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묘하게 배려심이 느껴지는 행동과 달리, 멀어지는 그에게선 결전을 앞둔 장수와 같은 결연함이 읽혔다.

* * *

연주는 정엽이 데려다준 모습 그대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실은 날이 저물자마자 연주를 억지로 경대 앞에 끌어 앉혔다.

“갑자기 왜 이러는가?”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요. 전하께서 성대한 만찬을 준비하신다고 들었사옵니다.”

아실은 다른 궁녀들을 불러 연주의 머리를 곱게 빗고, 화장을 고쳐 주었다. 그리고 언제 가져왔는지 알 수 없는 옷상자와 패물함을 들고 와 새로 단장시켜 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주는 아실이 뭘 하든 전혀 관심이 없었다. 매화 구경을 하다가 볼썽사납게 정엽 앞에서 눈물을 보인 후였기 때문이다.

연주는 오늘 만찬에서 정엽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제 모습을 끊임없이 상상했다.

‘내가 없어도 잘 지내요. 새 왕비에게는 내게 했던 것처럼 못나게 굴지 말고요.’

이 정도면 될까? 음, 아니 이건 너무 미련해 보인다. 그냥 담백하게 수도를 떠난다는 사실만 전달하는 게 좋을지도…….

“생각보다 어렵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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