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아실은 연주를 일으켜 처소에 딸린 곁채로 이끌었다. 어영부영 자리에서 일어난 연주가 마지못해 따라가며 말했다.
“예전에 착용하던 옷과 장신구 중 소박한 것으로 몇 가지 꺼내 주면 내가 그중에 고르겠네.”
“처음으로 전하와 나들이를 떠나시는 길이 아닙니까. 마마께서 쾌차하시어 오랜만에 하는 외출이기도 하여 옷이라면 벌써 잔뜩 꺼내 두었사옵니다.”
“그저 며칠 머물렀을 뿐인데 무슨 옷이 그리 많단 말인가?”
“어머나, 그새 잊으셨사옵니까? 전하께서 선물로 보내신 비단을 모두 상의국에 맡겨 옷을 지었지 않사옵니까.”
“내 옷을……?”
연주는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언제 따라왔는지 모를 취아가 발랄한 목소리로 말을 거들었다.
“그간 전하께서 선물하신 보석들도 모두 이 방에 있사옵니다. 마마께서 거들떠보지도 않으셔서 모두 패물함 속에서 엉엉 울고 있지요!”
연주는 그제야 정엽에게 돌려보낸 선물들이 고스란히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돌아 나가려고 했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궁녀들의 등쌀에 정신없이 시달리다 보니, 어느새 병풍 너머로 이어진 곁채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발들인 옷방은 흡사 고급 상점을 연상케 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방의 벽면을 따라 빼곡하게 늘어서 있는 오동장, 그리고 칸칸이 패물함이 놓여 있는 장식장이었다. 내실 한가운데엔 스무 벌 남짓한 비단옷이 하나씩 의가(衣架)에 걸려 눈부시게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또 의가 옆에 하나씩 놓인 협탁에는 머리 장식, 귀걸이, 목걸이, 팔찌, 반지가 담긴 패물함이 가지런히 펼쳐져 있었다. 모두 의가에 걸린 옷의 색상과 문양을 고려해 어울릴 법한 장신구를 모아 놓은 것이었다.
“이게 다 어디서 난 것인가?”
“모두 전하께서 선물하신 것들이옵니다. 받으신 게 너무 많아 마마께서 고르기 힘드실까 봐 소인들이 색깔별로 미리 구분해 놓은 것이지요.”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많은데…….”
“하나도 많지 않사옵니다! 예쁜 옷들이 훨씬 많은데 의가를 몇 개 더 놓으려다가 못 놓은 게 한이지요. 여기 없는 옷과 장신구들은 옷장과 패물함에 모두 정리해 두었사옵니다!”
취아가 들뜬 얼굴로 조잘거렸다. 연주는 왕비 때도 누려 보지 못한 호사에 당황했다.
“마마, 어서 골라 보시지요.”
아실은 얼떨떨해하는 연주에게 다정히 속삭였다.
그러나 한꺼번에 너무 많은 선택지를 받아 든 연주는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자 연주의 뜻을 오해한 취아가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마음에 드는 게 없으시다면 잠시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옷이라면 아직 보여 드릴 게 많사옵니다. 옷이 바뀌면 장신구도 새로 보여 드려야 하고요. 마마님, 다녀오겠습니다!”
이러다간 끝이 없겠어.
궁인들이 하자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간 오늘 안에 이 옷방을 떠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나는 저것이면 충분하니까.”
연주는 아실과 궁녀들이 미리 골라 놓은 옷 중 가장 눈에 띄지 않고 수수한 옷을 가리켰다.
연주가 고른 물빛 의복은 옹기종기 모여 핀 보라색 제비꽃을 치맛단에 잔잔하게 수놓은 것으로, 마치 봄철 풀밭에 서 있는 듯 평화롭고 고즈넉한 정취가 느껴졌다.
“그 옷은 여기 아실 마마님께서 고르신 옷이옵니다. 역시 마마님께선 군주마마에 대해 모르는 게 없으시네요.”
“어찌 이리 입이 가벼우냐?”
“사실인걸요, 뭐.”
취아는 아실의 핀잔에 입술을 비죽이곤 소리 내 웃었다. 그때, 향경당 밖을 지키던 궁녀가 들어와 아실의 귀에 무어라 속닥였다. 궁녀의 전언을 들은 아실은 곧장 연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마마, 전하께서 이미 향경당 앞에서 기다리고 계시다고 하옵니다. 단장을 서두르시지요.”
아실의 말을 들은 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엔 늘 자신이 먼저 치장을 마치고 정엽을 기다렸는데, 오늘은 반대로 정엽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럼 부탁하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 연주는 기다렸다는 듯 제게 달려드는 궁녀들에게 몸을 맡겼다.
단장을 마친 연주가 향경당 뜨락으로 내려섰다. 정엽은 오랜만에 보는 화사한 연주의 자태에 슬그머니 미소를 짓다가, 모르는 척 헛기침을 하며 돌아섰다.
연주가 골라 입은 제비꽃 치마는 정엽이 작약과 모란밖에 모르는 상의국 궁인들에게 특별히 주문했던 것이었다. 오라버니 꽃을 찾았다며 즐거워하던 시양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 둔 덕분이었다.
‘그래도 연주의 마음에 드는 물건이 하나는 있었군.’
남몰래 뿌듯함을 만끽한 정엽은 자연스럽게 연주의 허리께에 팔을 둘렀다. 그는 곧장 마차가 대기 중인 대문으로 향하려 했다.
“마마!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때 곁채에서 헐레벌떡 뛰어나온 취아가 연주를 향해 소리쳤다. 연주는 갑자기 저를 부르는 소리에 놀라 뒤돌아섰다. 취아는 양손에 든 신발을 흔들어 보이며 부리나케 달려왔다.
“마마, 신발은 이것으로 갈아 신으시옵소서. 옷에 맞는 신을 신으셔야지요!”
취아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연주의 발치에 자수정과 흑진주로 장식된 하늘색 비단신을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연주는 저 때문에 주변 사람 모두가 걸음을 멈춘 것을 확인하곤 재빨리 입을 열었다.
“어차피 신발은 치마에 가려서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이대로도 괜찮으니 신은 넣어 두거라.”
“마마, 그게 무슨 서운한 말씀이시옵니까.”
“아니, 서운할 것까지야…….”
연주는 실망을 내비치는 취아의 반응이 당혹스러웠다. 그녀는 반짝이는 비단신을 난처한 듯 내려다보았다. 곱긴 하지만 꾸밈새가 여간 화려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정엽이 나섰다.
“기왕 나가는 것 신발까지 맞춰 신으면 좋지, 뭘 그래?”
그러더니 정엽은 연주의 발치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는 겨우 앞코만 드러나는 기존의 신발을 유심히 살폈다. 확실히 지금 연주가 신고 있는 신발은 새 신에 비하면 낡고 수수해 보였다.
“역시 갈아 신는 게 좋겠군.”
정엽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낮게 내밀어 보였다. 신을 갈아 신겨 줄 테니 발을 내어 달라는 뜻이었다.
“뭐, 뭘 하는 거예요?”
하지만 이 상황이 영 민망한 연주는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였다. 주인의 외출을 거들기 위해 향경당 안팎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던 궁인들은 저마다 얼굴이 빨개진 채로 돌아섰다. 정엽은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했다.
“신발 좀 갈아 신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려워. 넘어질까 봐 그래?”
“그런 게 아니에요. 부끄러우니까 얼른 일어나세요.”
“뭐가? 얼른 갈아 신어. 내가 도와줄 테니까.”
정엽은 주변에 눈이 몇 개나 있든 아랑곳하지 않으며 연주의 발끝을 검지 끝으로 톡톡 쳤다.
“여기서 신발을 갈아 신자고요?”
“아니면 맨발로 갈래?”
별궁 나들이도 모자라 이게 갑자기 무슨 고집이람? 낯선 상황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연주가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안타깝게도 정엽은 제가 무슨 짓을 해도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궁인들이 모두 돌아서 있는 모습만 봐도 쓸데없이 시간을 끌어 봤자 뒷말만 무성할 듯싶었다.
“……아니에요.”
연주는 별수 없이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발 하나를 조심스럽게 들어 정엽의 커다란 손바닥 위에 올렸다. 처음엔 오른발. 다음엔 왼발. 정엽의 도움을 받아 새 신으로 갈아 신은 연주는 한숨을 폭폭 내쉬었다.
하지만 이 사태의 주범인 정엽은 외려 뿌듯한 표정이었다.
“마음에 들어?”
“……네.”
연주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정엽의 미소가 한층 깊어졌다.
‘이 사람이 이렇게 잘 웃는 사람이었나?’
예전에는 만금보다 귀한 것이 정엽의 미소였다. 연주는 만감이 교차했다. 작별 인사를 하러 가는 길에 저렇게 멋진 미소를 짓다니. 꼭 제가 나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왜 그래?”
정엽은 심란해하는 연주를 알아채곤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금세 본래의 표정을 되찾은 연주는 아무런 대답 없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이제 가지.”
말을 마친 정엽은 실없이 예쁘게 웃는 연주의 팔을 잡아끌어 그녀를 마차로 인도했다. 정엽과 마차에 몸을 실은 연주가 행궁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 * *
한참을 달린 마차는 향산의 초입에서 멈춰 섰다. 산에 오르기 전, 산 아래서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요기를 마친 두 사람은 그 후 다시 마차를 타고 산 중턱에 있는 행궁으로 향했다.
산길을 달리는 마차는 지난번 헌왕과 함께할 때와 달리 별다른 흔들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넓고 평탄하게 닦여 있는 길 덕분이기도 하지만, 마차 좌석과 등받이를 보료가 푹신하게 감싸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산길을 가는데 이렇게 편한 건 처음이네요.”
“그렇담 다행이군.”
“또 왜…….”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 정엽을 향해 한마디 하려던 연주가 멈칫했다. 말 두 마리가 끄는 마차치고는 내부 공간이 제법 넉넉했지만, 정엽은 긴 다리를 주체하지 못해 다리를 불편하게 꼬고 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정엽은 마차보다는 말을 타는 쪽을 선호했다. 그와 함께 마차에 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예전에는 한 공간에 나와 어색하게 마주 앉아 있는 게 싫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어지간히 큰 마차가 아니면 그의 장대한 몸을 감당할 수 없으니 자연스럽게 마차를 피하게 된 모양이었다. 게다가 느긋함과는 거리가 먼 정엽의 성격상 마차보다 빠르고 편한 말이 최선의 교통수단이기도 할 터였다.
‘기대를 버리니 이렇게 잘 보이는데. 난 이 사람에게 뭘 그렇게 기대했던 걸까? 이 사람에 대해 아는 게 그렇게 많지도 않으면서.’
예전에 유황관에서도 그랬지만, 연주에게 있어 정엽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었다. 존재 자체가 수수께끼 같다고나 할까.
한때는 정엽에 대해 무척 잘 안다고 생각했고, 다시 만난 후에는 내가 알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진 정엽이 신기하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정엽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거나, 다가가고 싶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는 정엽이 제 앞에 온전히 속을 내보인다고 해도, 연주는 절대로 그를 다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어차피 이번 나들이가 마지막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