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91화 (91/161)

91화.

물론 선물을 쏟아붓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됐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연주가 선물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보고가 들어온 순간부터, 정엽은 승세가 기울었음을 직감했다.

그래도 연주의 마음에 드는 선물을 찾아내면 상황이 반전되지 않을까. 아니,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주지 않을까.

아직도 지금의 연주보다 예전의 연주가 익숙한 정엽은 좀처럼 기대를 버릴 수 없었다. 연주는 작은 일에도 쉽게 울고 웃는 사람이었고, 또 쉽게 사람을 용서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후의 전언으로 연주와의 1차전은 완전한 정엽의 패배로 끝났다. 지금까지 어떤 전투에서도 패배해 본 적이 없는 정엽은 낯선 좌절감에 속이 뒤집혔다.

게다가 단순히 세자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주 수도를 떠날 것 같다니. 악화되기만 하는 상황에 정신이 아찔했다.

‘설령 수도를 떠난다고 해도 해광성으로는 돌아가지 않겠지.’

연주의 고향인 해광성은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짐작할 만한 장소였다. 하지만 수도에서 연이어 불미스러운 사건을 겪은 이상, 곧장 평해왕부로 돌아가는 건 연주답지 않은 선택이었다.

정엽이 아는 한, 연주라면 차라리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곳을 택할 터였다.

문제는 그녀의 오라비인 채신이었다. 그는 황실이 끊임없이 제 누이를 위협하는 모습을 지켜본 이상, 직접 발 벗고 나서 연주의 증발을 도울 가능성이 있었다.

‘평해왕의 사람들은 모두 충직하니까.’

평해왕 일가에게는 황실보다 그들을 신뢰하고 목숨 바쳐 충성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러니 채신이 마음만 먹으면 정엽은 물론 황제조차 절대로 찾아내지 못하도록 연주를 꼭꼭 숨기려 들 게 뻔했다.

이대로 영영 연주를 떠나보내야 한다니. 상상만으로도 낭떠러지에 몸을 던지는 것처럼 등골이 오싹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진귀한 선물도, 마음을 담아 준비한 꽃도 모두 거절당했다. 더는 줄 선물도, 보여 줄 마음도 없었다. 대체 이 여자의 마음은 무엇으로 만들어졌기에 이토록 견고하고 단단한 것일까?

정엽은 결국 연주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낙심했다. 그는 오석산에 중독되어 맨손으로 땅을 파헤치던 연주의 모습을 떠올렸다.

깊게 파인 흙 웅덩이, 부러진 손톱, 손톱이 뒤집힌 자리에서 흘러나오던 붉은 피.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연주를 힘들게 했던 것은 돌아오지 않는 아이와 그 아이를 버린 저에 대한 원망이었다.

“아직도 나를 미워하고 있을까?”

정엽이 생각하기에 지금의 연주는 자신을 예전만큼 미워하지 않았다. 그저 이혼을 선언하고 떠나기 전만큼 살갑지 않을 뿐이었다.

“아이…….”

그렇담 다시 아이를 가지면 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하던 정엽이 고개를 흔들었다. 헌왕이 연주를 제 신부 삼겠다며 그녀를 종유궁으로 유인한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이제 겨우 몸에 난 상처가 아물어 가는데 아이를 핑계로 헌왕과 똑같은 짓을 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된다면 또다시 원점이었다.

“이대론 안 돼.”

정엽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는 무엇이든 떠올리려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그저 연주가 계속 제 곁에 머물렀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어차피 예전과 별로 다른 것도 없는데.”

연주가 왕부에 머무른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갔다. 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이제 둘 사이에 아이가 없다는 것 정도일까.

“차라리 혼인을 다시 하는 쪽이 더 쉬울지도…….”

다 포기한 사람처럼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다가, 주먹으로 초조하게 책상 위를 두드리다가. 정엽은 연주가 저를 밀어내는 모습을 상상하며 홀로 불안을 삭였다. 밤을 지새운 그는 창가에 희미하게 여명이 드리운 후에야 느릿느릿 관사를 나섰다.

* * *

“쉿, 조용히 해라.”

정엽은 근 보름 만에 왕부로 돌아왔다. 그를 발견한 궁인들은 화들짝 놀라 우왕좌왕했다. 정엽은 궁인들을 입단속시키며 연주의 처소로 향했다. 예상대로 연주는 그가 돌아온 줄도 모른 채 단잠에 빠져 있었다.

‘그래도 표정은 좋아 보여서 다행이네.’

오석산에 시달리는 내내 연주는 악몽을 꾸는 사람처럼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짓거나 눈물을 떨궜다. 정엽은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게 연주가 저를 향해 원망을 쏟아 내는 것만큼이나 힘겨웠다. 그런데 이렇듯 평온하게 잠든 모습을 보니 바윗돌이 얹힌 것처럼 묵직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나아서 다행이야. 정말로.”

정엽은 잠든 연주에게 속삭였다. 그는 뒤척이느라 흐트러진 연주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귀 뒤로 넘겼다. 어느새 굳어 있던 입매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곧이어 정엽은 그녀의 작은 이마에 습관처럼 제 손바닥을 올렸다. 연주를 간호하던 때처럼 체온을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 연주가 어깨를 움찔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말을 몰고 달려오는 동안 새벽바람을 맞아 차가워진 손에 놀란 모양이었다.

“……깬 건가?”

무안해진 정엽은 엉거주춤 손을 거뒀다. 느릿느릿 풍성한 속눈썹을 깜빡이던 연주는 이내 정신이 든 듯 커다란 눈망울을 동그랗게 떴다.

“전하?”

……전하, 라.

너무나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딱딱한 호칭에, 정엽의 심장이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쿵 내려앉았다.

연주가 중독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후에 연주가 보일 사소한 변화들까지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제는 연랑이라는 말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굴더니.’

정엽은 저도 모르게 울컥해 굳은 얼굴로 어금니를 악물었다. 하지만 연주가 이런 정엽의 속내를 알 리 만무했다. 연주는 갑자기 눈에 띄게 사나워진 정엽의 표정에 긴장해 마른침을 삼켰다.

연주의 반응을 마주한 정엽은 정말 못 할 짓을 저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후…….”

정엽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연주는 어쩐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정엽은 연주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그녀를 도로 침상에 눕혔다.

“왜…….”

“그냥. 깨울 생각은 없었거든.”

“아…….”

“잠은 다 깬 것 같으니 할 얘기만 하고 가지.”

“네.”

이 새벽에 할 말이라니. 잠이 모두 달아난 연주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정엽을 올려다봤다. 그러나 내일 아침 양해를 통해 이야기를 전할 생각이었던 정엽은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여요?”

“……다 나았으니 이제 떠날 건가?”

“그래야지요.”

“그럼…… 이제 언제 다시 볼지 모르니 내게 며칠만 시간을 내 줘.”

며칠만 시간을 내 달라고?

의도를 알 수 없는 부탁에 연주가 고개를 기울였다. 정엽은 그녀의 작고 예쁜 입술에서 못된 말이 튀어나올까 봐 서둘러 말을 이었다.

“왜냐고는 묻지 말고. 그냥, 내가 널 간호하느라 꽤 고생했으니까 애쓴 내게 주는 상이라고 생각해.”

“뭘 할 건지 물어봐도 되나요?”

“향산에 있는 별궁에 갈 거야. 너도 건강을 회복하느라 줄곧 향경당 안에서만 지냈잖아.”

연주는 정엽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녀는 꿈처럼 비현실적인 상황에 잠깐 미간을 좁혔다. 요약하자면, 정엽은 갑자기 이 새벽에 찾아와 그간의 노고에 대한 보상으로 향산에 있는 별궁 나들이를 함께 가 달라고 부탁 중이었다.

대개 보상이라고 하면 수고한 쪽이 이득을 봐야 정상이다. 그런데 이 상황은 어쩐지 그간 수고한 정엽이 손해를 보는 듯했다. 연주는 대체 그 보상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헷갈렸다.

“기분 전환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지. 마침 하고 싶은 얘기도 있으니까.”

연주의 침묵이 길어지자 불안을 느낀 정엽의 말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알았어요.”

향산궁까지 가서 할 이야기가 시답잖은 농담은 아니겠지. 잠시 고민하던 연주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엽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연주 역시 정엽에게 할 이야기가 있었다. 처음 이별을 선언할 때는 아무런 인사도 없이 떠났지만, 이번에는 정엽에게 도움을 받은 마당이 아닌가. 수도를 떠나기 전에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건네는 게 도리였다.

하지만 정엽은 이런 연주의 속내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연주에게 나들이 승낙을 받아 낸 것만으로도 마음이 들떠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럼 날이 밝는 대로 준비하고 나와.”

“네.”

대화를 마친 정엽은 연주가 덮고 누운 이불을 가볍게 정리해 주고 침상을 떠났다. 홀로 남은 연주는 아직 날이 밝지 않아 무늬가 희미한 천장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잘됐어.”

갑작스럽긴 하지만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연주는 다 달아나 버린 잠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려 애썼다. 불쑥 찾아와 사람을 놀랜 정엽 때문인지, 가슴이 이상하게 콩닥거려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이윽고 아침이 밝았다. 왕부 전체가 때아닌 나들이 준비로 부산스러웠다. 하지만 중독 사건 이후 잠이 많아진 연주는 평소보다 더욱 늦은 시간에 눈을 떴다. 새벽에 정엽 때문에 깬 뒤로 선잠에 빠진 탓이었다.

아실과 궁녀들은 아침나절부터 연주가 일어나길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다가 연주가 침상 휘장을 걷자마자, 아실은 따뜻한 물이 담긴 대야를 들이밀며 부산을 떨었다.

“마마, 소셋물을 들이겠사옵니다.”

연주는 궁인들의 성화에 떠밀려 눈 깜짝할 새에 소세를 마쳤다. 이어서 그녀는 자단목 경대 앞에 앉혀졌다. 경대 위에는 평소 연주가 애용하는 진주분과 신선한 장미 연지, 그리고 눈썹먹이 준비되어 있었다.

여인을 치장시키는 데 이골이 난 궁녀들은 능숙한 손길로 상아 빗에 계화유를 바른 뒤 흑단 같은 머리카락을 꼼꼼하게 빗어 내렸다. 그러고는 옆머리를 종종 땋고, 윗머리를 구름처럼 높게 틀어 올려 한껏 멋을 부렸다.

빗질을 마무리한 궁녀들은 곧이어 경대 위에 놓인 수많은 화장품을 능수능란하게 다루어 연주의 화장을 마쳤다.

“오랜만에 치장하시니 더 곱네요.”

“마마의 머리카락이 비단보다 보드라워서 만져 드릴 때마다 기분이 좋아요.”

지금껏 이렇게 빠르고 빈틈없는 시중을 받아 본 적이 있던가? 연주는 쏟아지는 칭찬 속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거울 속에 걸린 화려한 제 얼굴이 낯설어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모든 광경을 지켜본 아실은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다.

“마마, 이제 의복과 장신구를 고르셔야 합니다. 소인과 함께 가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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