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90화 (90/161)

90화.

연주는 호 태의와 선황후 사이의 사연을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선황후가 누구보다 저를 아꼈다는 사실만큼은 아주 잘 알았다.

정엽이 출정을 떠나 홀로 남겨질 때면, 선황후는 어김없이 저를 상현궁으로 불러 함께 소일거리를 하고 담소를 나눴다. 정엽의 기호에 대해 상세히 알려 주며 연주의 사랑을 응원해 주던 사람도 다름 아닌 그녀였다.

그런 선황후의 인자함을 어찌 잊겠는가. 어쩌면 연주가 후회 없이 정엽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선황후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지만…….’

돌이켜 보면 하루하루 꿈같은 날들이었다. 연주는 과거를 추억하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물끄러미 연주를 지켜보던 황후는 조용히 허 상궁을 향해 손짓했다.

“내 너를 위해 보양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좀 준비해 왔단다.”

신호를 받은 허 상궁이 연주에게 영지버섯과 천년삼, 바다제비집, 진주 가루를 선보였다. 연주는 고개를 숙이며 사은했다.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시다니. 감읍하옵니다, 황후마마.”

“우리 사이에 이런 작은 일로 예의 차릴 것 없다. 몹쓸 사람들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았어. 3황자의 작위가 박탈되기는 했다만 어디 그 정도로 분이 풀리겠느냐.”

“서운한 것이 있더라도 폐하의 결정이니 따를 수밖에요.”

“그래. 어쨌든 네가 이렇게 무사하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느냐. 이런 때 정엽이 수도에 있어 참 다행이다.”

정엽이 수도에 있어서 참 다행이라.

연주는 물 흐르듯 지나가는 황후의 말에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까지 제가 겪은 사건들이 모두 정엽의 귀환과 연관되어 있다고만 여긴 그녀였다. 황후는 연주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녀의 손등을 다독이며 말을 이었다.

“정엽이 너를 모든 위험에서부터 지켜 내진 못했어도, 중요한 순간마다 네게 도움을 주지 않았더냐.”

“……마마의 말씀이 맞습니다.”

황후의 의견도 일리는 있었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연주가 생각에 잠겼다.

돌이켜 보면, 정엽은 언젠가 반드시 수도로 돌아올 사람이었다. 그리고 곽 귀비와 3황자는 정엽이 돌아오는 순간을 누구보다 벼르고 있었을 터였다.

‘황후와 정엽을, 그리고 그들의 지지 기반인 우리 평해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정엽만 아니었다면 모두 피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여겼는데, 실은 자신의 입궁을 막기 위해 정엽이 벌였던 모든 행동이 옳았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엽의 뜻대로 내가 황궁을 드나들지 않았더라면, 곽 귀비 모자의 마수에서 멀어질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연주는 지금도 황후의 제안으로 시양의 서화 스승을 맡은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황후의 배려가 아니었더라면, 연주는 지금쯤 극심한 우울감에 빠져 정엽이 귀환하기도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어쩌지 않아도 저들은 처음부터 나를 이용할 생각이었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죽이려고 했을 거야.’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나자 연주는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물론 거대한 운명에 비하면, 연주의 발버둥은 나비의 날갯짓처럼 아주 미약한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달라지는 것도 조금은 있었다. 무사히 살아 있기에 이제라도 변화를 꾀해 볼 기회를 얻었지 않은가.

연주는 다시 한번 수도를 떠날 결심을 굳혔다. 그러곤 황후에게 공손히 화답했다.

“연친왕 전하의 은혜는 잊지 않겠사옵니다.”

비록 내게 많은 상처를 안겨 준 사람이지만. 이제부터라도 어지럽게 뒤엉킨 마음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다 보면 더는 정엽을 미워하지 않게 되는 날도 오리라.

연주는 황후와 곧게 시선을 맞췄다. 그녀는 힘주어 제 손에 포개진 황후의 손등을 감쌌다.

“황후마마와 공주마마께서 제게 베풀어 주신 은혜 또한 잊지 않겠사옵니다.”

“꼭 떠날 사람처럼 구는구나.”

황후는 연주를 생각 많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연주가 이미 떠나기로 결정 내린 것을 직감했다. 황후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예전처럼 황궁에 자주 드나들지는 못하겠지만, 본 궁이나 공주에게 자주 서신을 띄우거라. 공주가 너를 무척 그리워할 테니까.”

“예…….”

연주는 시양을 늘 아픈 손가락처럼 여겼다. 단지 공주의 나이가 어려서가 아니라, 황실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자라나기 때문이었다.

“조만간 공주마마께 꼭 서신을 보내겠사옵니다.”

연주는 마치 송별연을 치르듯 황후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어느새 붉어진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반면 황후는 말을 아꼈다. 그녀는 언젠가 정엽과 연주의 인연이 다시 이어질 거라고 굳게 믿었다.

‘꼭 다시 만나게 되리라.’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황후는 급히 화제를 돌렸다.

“내 정신 좀 봐라. 실은 네가 종일 향경당 안에서만 지내고 있다기에 준비한 것이 있다. 허 상궁, 내가 일러두었던 물건을 가지고 들어오게.”

“예, 마마.”

허 상궁은 합문 밖을 향해 손뼉을 쳤다. 그러자 낯익은 덕교궁 궁녀가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상자를 가지고 들어왔다.

“이게 무엇이옵니까?”

“네가 직접 열어 보거라.”

연주는 황후의 권유에 손수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비단으로 겉표지를 감싼 서책 한 권과 은으로 만든 접시와 저울, 작은 수저 등 향을 만들 때 사용하는 조향 도구가 들어 있었다.

“‘교향서(交香書)’…….”

연주는 무심코 서책의 겉표지를 읽어 내렸다. 그런데 제목의 필체가 너무도 익숙했다.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황후를 바라보았다.

“이건……. 선황후마마의 필체가 아니옵니까?”

“알아보는구나.”

연주는 반가움에 서책의 겉표지를 쓸어 보았다. 그러고는 책의 첫 장을 조심스럽게 넘겼다. 책 속에는 선황후가 개발한 향의 제작법이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서책 아래 가지런히 누워 있던 도구들은 하나같이 윤이 반질반질하게 날 정도로 닦여 있었지만, 군데군데 사람의 손을 탄 듯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추측건대 상자에 담긴 물건 모두 선황후가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이라는 뜻이었다.

“선황후마마의 유품을 어찌 제게 내주십니까?”

“네가 평소 향을 배합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다. 너도 알다시피 선황후께서도 조향에 일가견이 있던 분이시지 않으냐.”

“예, 특히 말리화와 유자 향이 어우러진 소유향(素柚香)을 잘 만드시기로 유명했지요.”

“한데 본 궁은 향에 크게 관심이 없어. 내가 가지고 있어 봐야 먼지만 쌓이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져왔다.”

“마마…….”

울컥한 연주가 말끝을 흐렸다. 새삼 저를 위하는 황후의 마음이 느껴졌다.

“하찮은 물건 하나도 각자의 쓰임새가 있는데 하물며 이 도구들은 어떻겠느냐.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나야 이 물건들이 쓰임을 다할 수 있을 것 같아 네게 주는 것이다.”

황후는 예의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주는 상자 속 물건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대답을 망설였다. 저는 정엽과 이혼해 남남이 되었는데 선황후의 유품을 간직하는 게 옳은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마마, 정말로 이 유품을 제가 간직해도 되겠사옵니까?”

“너희가 끝내 헤어지긴 했어도 네가 선황후께서 선택하신 유일한 며느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설령 선황후께서 살아 계셨다고 해도 언젠간 네게 흔쾌히 이 물건을 내주셨을 게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연주는 상자를 잘 갈무리해 아실에게 넘겼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후가 연주를 일으키며 말했다.

“몸이 다 낫는 대로 본 궁에게 선황후께서 좋아하시던 소유향을 꼭 만들어 다오.”

“제 솜씨는 선황후마마에 비하면 하잘것없어서 마마의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사옵니다. 그래도 마마께서 부탁하시니 애써 보겠사옵니다.”

“그래. 푹 쉬어야 할 사람을 내가 너무 귀찮게 했구나. 이만 돌아가 봐야겠다. 나오지 말거라.”

연주에게 약속을 받아 낸 황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연주는 황후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향경당 밖으로 나왔다.

“나오지 말래도.”

“어찌 황후마마를 가만히 앉아서 보내 드리겠사옵니까. 연왕부 대문 앞까지만 배웅해 드리겠사옵니다.”

“그럴 필요 없다.”

황후와 연주는 수화문 앞에서 실랑이를 벌였다. 황후는 연주를 끝내 수화문 안쪽으로 밀어 넣고는 걸음을 재게 놀렸다. 황후의 행렬을 따라가려던 연주는 몇 걸음 더 가지 못하고 수화문 앞에서 황후를 배웅했다.

이윽고 황후는 연왕부의 붉은 대문을 나와 봉황 가마 앞에 섰다. 그녀는 허 상궁에게 명령했다.

“지금 당장 신의군 군영으로 가 보거라. 그 아이에게 당장 연왕부로 돌아오라고 해.”

“예? 마마, 어찌 그러시옵니까?”

“연주가 떠날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이대로 연주를 그냥 보내서야 되겠느냐?”

“알겠습니다. 석아야, 황후마마를 모시거라.”

표정이 어두워진 허 상궁은 제 뒤를 따르던 어린 궁녀에게 황후를 부탁했다. 그런 뒤 봉황 가마의 행렬과 정반대 방향으로 바삐 걷기 시작했다.

황후는 돌아가는 가마 안에서 연주의 애틋한 표정을 되새겼다.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더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늘가를 향해 읊조렸다.

“이제 언니가 그 애들을 지켜 주셔야 해요.”

* * *

저물녘, 허 상궁을 통해 황후의 전언을 들은 정엽은 우두커니 관사에 들어앉아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걸핏하면 찾아 물던 연초도, 음식이 아니라 연초를 주식 삼은 주군을 보다 못한 장명의 항명으로 바닥난 지 오래. 군영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금기 사항 중 하나이므로 맨정신으로 이 상황을 견뎌야 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결국, 이렇게 돼 버리고 마는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