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89화 (89/161)

89화.

장정들의 목소리는 침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당황한 연주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고맙네. 살펴 가게.”

한참 웃던 연주는 겨우 웃음을 멈추고 화답했다. 그녀의 얼굴에 핀 웃음꽃을 마주한 장명과 군사들은 뿌듯한 표정으로 우르르 침실을 빠져나갔다.

이윽고 아실과 단둘이 남게 된 연주가 말했다.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구나.”

“마마, 꿈이라니요. 이 많은 선물을 보시옵소서. 꿈이 아니라 생시이옵니다.”

아실은 정신없어하는 연주를 향해 타박하듯 대꾸했다. 그러고는 눈에 띄는 작은 선물들을 먼저 추려 한쪽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연주는 한숨처럼 읊조렸다.

“전하께서 공사다망하시다고 들었는데 어찌 선물을 챙기실 여력이 있으셨는지 모르겠군.”

“소인이 말씀드리지 않았사옵니까. 마마께서 사경을 헤매실 때 전하께서 만사를 제쳐 놓고 마마를 간호하셨다고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게 다 무슨 일이람. 아실이 아무리 정엽의 편을 들어도 연주는 이 상황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정엽이 생전 하지 않던 행동을 하는 걸 보니, 적어도 지난 사건으로 그가 매우 놀랐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스무날 동안이나 정신이 없었다고 했으니…….’

지금까지 연주는 정엽이 돌아와서 제게 잘못을 추궁하면 어쩌나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그동안 내가 정엽을 너무 못되게만 생각했던 걸까?’

연주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자문했다. 하지만 그녀가 기억하는 정엽은 무심하고 냉정한 모습뿐이었다. 사냥터 오두막에서 그의 다른 면을 엿보긴 했지만, 그건 그저 우연이 겹쳐 벌어진 일일 테다.

‘너무 큰일을 겪어 잠시 판단력이 흐려진 것뿐이겠지. 천하의 소정엽이 무슨 바람이 들어서 날 그토록 생각했겠어. 약에 중독되어 사경을 헤매는 걸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것뿐일 거야. 정신 차려…….’

별것 아닐 거라고. 정말 아무 의미 없는 일일 거라고. 연주는 솜털처럼 들뜨려는 마음을 내리눌렀다. 아실은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는 연주를 지켜보다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품에 안고 계신 작약도 귀하지만 다른 선물에도 전하의 정성이 담겨 있으니 하나하나 살펴보지 않으시겠사옵니까?”

“아닐세. 비단과 보석은 당장 쓸 일이 없으니 먼저 정리해 두게. 꽃도 이 작약만 남겨 두도록 하지. 참, 작약을 꽂을 화병을 부탁하네.”

“예? 예, 마마…….”

아실은 시무룩한 낯빛으로 말끝을 흐렸다. 연주가 정엽의 선물에 조금 더 기뻐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주는 계속해서 작약에만 신경을 쓸 뿐이었다.

“아, 그리고 화병의 물은…….”

“북쪽 우물에서 길어 올린 새 물로 갈아 놓겠사옵니다.”

“고맙네.”

연주는 옛 주인의 취향을 기억하고 있는 아실에게 새삼 감동했다. 그녀는 고마움을 담아 미소로 화답했다. 아실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별말씀을요. 그럼 비단은 상의국 장인에게 맡기고 보석은 예전처럼 패물함에 정리해 두겠사옵니다.”

“그래, 그렇게 하게.”

연주는 쌓인 물건을 돌아보지도 않으며 선선히 대답했다.

‘역시, 선물에 미련이라고는 없으시구나.’

선물로 들어온 비단과 보석을 일부러 언급했던 아실이 아쉬움을 숨겼다. 그녀는 이내 침실밖에 대기 중이던 궁녀들을 불러들였다.

“다들 안으로 들어오너라.”

궁녀들은 냉큼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아실의 지시를 기다리며 휘황찬란한 선물들을 곁눈질했다.

“취아는 장식장에 있는 청자 화병에 물을 받아 오거라. 반드시 북쪽 우물의 물이어야 한다. 나머지는 나와 함께 선물들을 정리하자꾸나.”

“예, 마마님.”

궁녀들은 분주하게 선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연주는 문득 제 품 안에서 진한 향기를 내뿜는 작약을 내려다보았다.

“살다 보니 이런 날이 다 있네.”

이렇게 엉뚱한 짓은 예전에 해 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 우리 사이가 끝나기 전에.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입 안이 무척 썼다.

* * *

정엽은 그 후로도 며칠간 선물 공세를 펼쳤다.

연주가 취미로 연주하던 비파와 칠현금부터, 수령이 오래된 비자나무를 깎아 만든 최고급 바둑판과, 백옥과 비취를 깎아 만든 바둑돌. 그리고 수심이 깊은 곳에서만 구할 수 있는 희귀한 벽록색 돌로 만든 벼루 조하연(洮河硯)까지.

정엽이 보낸 선물은 꽃, 비단, 보석을 제외하고 헤아려도 열 손가락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정엽이 잠시 헛바람이 들었을 뿐이라 생각했던 연주는 이쯤에서 이상을 감지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선물 공세가 계속되자, 연주는 선물을 방치하기 시작했다. 뜯어보지 않은 선물은 향경당 곳곳에 어지럽게 쌓여 있다가, 한꺼번에 경수당으로 옮겨졌다.

“두 분이 다 한집에 계시면서 이게 무슨 일이람.”

“그러게. 전하께서는 지치지도 않으시나?”

“지치시긴. 얼굴 한번 안 비치고 아랫것들을 시켜 선물만 보내시는데 무엇이. 나는 군주마마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뭐.”

“하기야…….”

궁인들은 한집 안에서 매일 선물 수레가 오고 가는 전대미문의 사태에 혀를 내둘렀다. 이 소식은 얼마 후 연왕부의 담장을 넘어 황궁 자미성에까지 닿았다.

“황후마마, 오늘도 연친왕 전하께서 상의국과 상공국에 사자를 보내 더 아름답고 독특한 물건을 만들어 내라며 궁인들을 닦달하셨다고 하옵니다.”

“또?”

“예. 상의국과 상공국 궁인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라 하옵니다.”

“정엽이 녀석도 참…….”

허 상궁의 전언을 들은 황후의 한숨이 깊어졌다. 요즘 상의국과 상공국은 그렇지 않아도 밤낮없이 일하고 있었다. 정엽의 명으로 연주를 위한 옷과 장신구를 제작하는 것 외에도, 봄단장을 벼르는 후궁들의 주문을 들어줘야 했기 때문이다.

이 탓에 상대적으로 힘이 없는 말단 후궁들과 궁인들의 요청은 거의 무시되어 후궁에서도 황후를 향한 원성이 쌓이는 중이었다.

“연주의 마음을 돌리려 애쓰는 것은 좋으나 참으로 엉뚱한 곳에 수고를 들이고 있구나…….”

“그래도 전하께서 군주를 위해 애쓰신다는 것 자체가 좋은 신호가 아니겠사옵니까? 너무 심려치 마옵소서.”

황후의 한탄에 허 상궁이 위로를 건넸다. 그러나 황후의 근심은 더 깊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군주가 어디 다른 여인들과 같더냐. 선물로 움직일 마음 같았으면 3황자가 오석산 같은 사특한 것을 이용해 군주를 취하려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마마…….”

“군주가 연왕비이던 시절, 정엽을 누구보다 위하고 사랑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도 이혼을 결심한 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 한데 정엽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선물로 입막음하듯 해결하려 하니 이 사달이 난 게다.”

황후는 말을 하면 할수록 쌓이는 갑갑함에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낙심한 그녀는 들고 있던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하아…….”

황후 역시 정엽과 연주의 관계가 회복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곽 귀비와 헌왕마저 연주를 노리고 덤비는 판국에 마냥 낙관적으로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황후는 밀려오는 두통 때문에 눈을 감았다. 그녀는 손짓으로 허 상궁을 불렀다. 허 상궁은 익숙하게 황후의 뒤로 가 관자놀이를 지압하며 말했다.

“지금 이 상황이 가장 답답한 사람은 연친왕 전하이지 않겠사옵니까. 마마께서 연친왕 전하를 좀 도와주시는 것이 어떠실지요?”

“이 문제는 정엽이 그 아이가 직접 풀어야 하는 문제다. 내가 나선다고 달라지는 것이 있겠느냐?”

“하다못해 지금 군주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만이라도 전하께 알려 주시면 도움이 되지 않겠사옵니까? 듣기로 전하께서 선물을 보내시는 동안 한 번도 군주를 직접 찾아간 적이 없다고 하옵니다. 실은 전하께서도 거절당할까 봐 두려워 그러시는 게 아니겠사옵니까?”

“대체 누굴 닮아 그리 미련한지…….”

허 상궁의 말을 듣는 내내 인상을 찡그리던 황후가 고심했다. 후궁의 원성도 원성이지만, 이대로 두었다간 정엽과 연주의 사이만 멀어질 게 뻔했다.

“좋은 생각이 있느냐?”

“마마께서 직접 출궁하시어 군주를 위로하심이 어떻겠사옵니까? 마마께서 먼저 핑계를 만들어 주시면 전하께서도 군주를 만나러 오실 것이옵니다.”

“그리된다면 좋겠구나.”

“어차피 마마께서도 계속 군주를 걱정하고 계시지 않았사옵니까? 이제는 군주가 입궁하는 것도 어려우니 마마께서 직접 병문안을 가시면 군주에게도 큰 위안이 될 것이옵니다.”

황후는 허 상궁의 간언에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굳혔다. 연주가 남들보다 심지가 굳은 아이이긴 해도 3황자 내외 때문에 연달아 큰 사고를 겪어 지금쯤 속이 말이 아닐 터였다.

“내일 당장 연왕부로 출궁할 테니 준비하거라.”

“예, 마마.”

황후를 향해 깊이 허리를 숙인 허 상궁이 출궁 준비를 위해 덕교궁을 나섰다.

다음 날, 황후의 봉황 가마가 연왕부의 붉은 대문 앞에 멈춰 섰다. 허 상궁의 부축을 받아 내린 황후는 곧장 연주의 처소인 향경당으로 향했다.

갑작스럽게 황후의 행차 소식을 전해 들은 연주는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침상에서 내려와 예를 갖췄다.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아직 몸도 성치 않을 텐데 예의 차릴 것 없다.”

황후는 인자한 얼굴로 연주를 손수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연주를 다독이며 침상에 함께 마주 앉았다. 그러고는 연주의 마른 손을 맞잡은 채 대화를 이어 나갔다.

“많이 마르긴 했어도 얼굴색은 좋아 보여서 다행이구나.”

“다 황후마마께서 살펴 주신 덕분이옵니다. 연왕부에 호 태의가 상주할 수 있도록 신경 써 주실 줄은 미처 몰랐사옵니다.”

“호 태의는 내가 궁중에서 믿는 몇 안 되는 태의니라. 실력이 뛰어나고 성품이 강직해서, 돌아가신 선황후께서도 아끼시던 의원이지. 하여 너의 치료를 맡을 적임자라고 여겼다.”

“그러셨사옵니까.”

“그래. 어쩌면 선황후께서 훗날 네게 도움이 될 자를 알아보셨는지도 모르겠구나. 너를 많이 아끼셨으니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