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연주는 아실과 호 태의의 정성 어린 간호에 힘입어 차츰 건강을 회복했다. 하지만 스무날이나 앓고 쇠해진 몸이 한순간에 씻은 듯이 나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연주는 하루의 대부분을 침상에서 보냈다. 이런 연주를 위해 향경당 궁녀들은 침상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궁녀들은 해바라기 씨나 땅콩, 호두 같은 간식을 까먹으며 끊임없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이들에게는 연왕부 곳곳에서 일어나는 시시콜콜한 일상이 모두 화젯거리였다.
“오늘은 날씨가 무척 따뜻하지 않아요?”
“그러게. 오늘 보니 제비가 처마에 새끼를 쳤더라. 봄이 오긴 온 모양이야.”
“암, 봄은 봄이지. 이번에 새로 선발된 용무군 군사들 봤어요? 정말 잘생겼던데!”
“나 봤어! 그런데 연친왕 전하에 비하면 한참 멀었더라.”
“세상에 연친왕 전하보다 잘생긴 사내가 있을 리 있겠어? 그분은 논외로 쳐야 해, 논외!”
요 며칠 궁녀들의 최대 관심사는 용무군의 신규 군사들이었다. 그들에게 정인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종종 끼니를 챙기는 것보다 중요시됐다.
“난 용현이라는 분이 제일 잘생긴 것 같더라. 왜 그 키가 멀대같이 크신 분 말이야!”
“에이, 난 그분 말고 다른 분이 더 멋지더라.”
“설마 무영인지 무연인지 하는 그분? 그분은 정인이 있으신 것 같던데…….”
“아냐, 그럴 리 없어!”
“치, 없기는? 없으면 또 어떻게 할래? 그분은 너한테 손톱만큼도 관심 없을걸? 그렇죠, 군주마마?”
어린 궁녀들은 서로 맞장구치고 다투기도 하며 갓 피어오르는 연심을 슬며시 내비쳤다. 연주는 티격태격하는 궁녀들을 내려다보며 작게 웃었다.
그러자 향경당의 주방을 책임지는 홍산댁이 궁녀들을 짓궂게 놀리기 시작했다.
“아이구, 항아님들이 젊기는 젊네요. 한데 얼굴만 잘나면 뭐 해요? 사내라면 모름지기 얼굴 말고 다른 게 빼어나야지!”
“아니, 홍산댁, 그게 무슨 망측한…….”
“망측하기는 뭐가 망측해요? 다 사람 사는 얘긴데.”
“아휴, 이제 다들 일어나. 일해야지, 일!”
궁인들의 수다는 언제나처럼 홍산댁과 아실의 실랑이로 끝이 났다. 작은 일탈을 마친 궁인들은 할 일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귀동냥하며 한참 즐겁게 시간을 보낸 연주는 침상 머리맡을 돌아보았다. 그러곤 아직 다 읽지 못한 서책을 꺼내 들었다.
궁녀들이 떠난 자리를 말끔히 정리한 아실은 그런 연주를 보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몸도 낫지 않으셨으니 좀 쉬시지 그러십니까.”
“궁녀들도 모두 물러가 할 일이 없지 않은가.”
“그야 그렇지만……. 한데 그 서책은 어디서 나신 건지요? 소인은 처음 보는 책 같사옵니다.”
“자네가 향경당 물건은 늘 같은 자리에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엊그제 취아에게 부탁해 찾아오게 했네.”
궁금증을 해결한 아실은 서책을 의아한 표정으로 살펴보다가 이내 미간을 좁혔다. 꾸역꾸역 책을 읽으려는 연주도 연주지만, 서책은 책장을 펼치는 것조차 위험할 만큼 낡아 보였다.
“책이 무척 낡아 보이옵니다. 대체 무슨 책이옵니까?”
“‘소요기(逍遙記)’라는 책일세.”
“소요기요?”
“일평생 남편과 대화국 곳곳을 유람했던 섭초영이란 여류 시인이 쓴 책일세. 이 책을 읽다 보면 몸은 침상에 있어도 전국을 유람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지.”
“마마, 답답하십니까?”
어느새 근심 가득한 얼굴이 된 아실이 물었다. 하지만 연주는 대답 대신 작게 미소 지으며 서책을 펼쳐 들었다.
사실 연주가 소요기를 꺼내 든 이유는 장차 수도를 떠나 정착할 곳을 고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실에게 그런 속내를 털어놓을 필요까지는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실은 어떻게든 연주를 웃게 만들려 애썼다.
“벌써 반은 읽으셨군요. 그럼 책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곳은 어디시옵니까?”
“전명성의 향주(香州)일세.”
“향주! 소인도 향주가 무척 아름다운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사옵니다. 기후가 온화한 곳이라 사시사철 꽃이 핀다지요.”
“그렇다네. 하여 대화국에서 나는 향료는 대부분 향주에서 온 것이지.”
“소인은 만년설이 쌓인 산 아래에 있다는 비취색 호수에 꼭 가 보고 싶사옵니다. 이름에 ‘취’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것 같았는데…….”
연주를 위해 말을 꺼냈다가 도리어 자기가 더 신난 아실이 말끝을 흐렸다. 연주는 다정하게 대답했다.
“취옥호(翠玉湖) 말인가?”
“맞습니다. 취옥호요! 언젠가 나이가 들어 궁을 떠나게 되면 그곳에 가 보는 것이 소인의 꿈입니다.”
“나도 그렇다네. 언젠가 꼭 이 두 눈에 그 절경을 담고 싶어.”
연주는 아실을 향해 예쁘게 웃어 보였다. 그러곤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것만 같은 책장을 소중히 쓸어내렸다. 아실은 연주의 언행에서 은연중에 드러나는 독립 의지를 감지했다.
“마마……?”
아실이 연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연주가 무어라 대답할 새도 없이, 향경당 밖에 서 있던 취아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마마 앞에서는 행동거지를 조심해야지!”
“송구합니다, 마마님.”
취아는 아실의 호통에 기가 죽어 연신 허리를 숙였다.
“괜찮네. 아직 어린아이가 아닌가. 한데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리 호들갑을 떠는 것이냐?”
연주는 아실과 취아를 차례로 달래며 물었다. 취아는 금세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전하께서 선물을 보내셨사옵니다. 향경당 앞에 꽃과 선물을 든 용무군 군사들이 엄청나게 몰려왔어요!”
선물이라고? 정엽은 정무가 바빠 계속 신의군 관사에서 지내고 있다고 들었는데?
연주는 의아한 얼굴로 아실을 돌아보았다. 정엽이 공사다망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가 이유 없이 선물을 보내는 건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실은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할 뿐이었다.
“마마, 전하께서 선물을 보내셨다니 일단 안으로 들여 확인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으음, 글쎄…….”
아실은 환한 얼굴로 연주를 부추겼다. 얼떨떨해하던 연주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훈련에 매진해야 할 군사들을 계속 문밖에 세워 두는 것도 도리는 아니었다.
“얼른 밖에 소식을 알리겠습니다.”
연주의 허락이 떨어지자 신난 취아가 부리나케 밖으로 뛰어나갔다.
“모두 들라 하십니다!”
이윽고 양손 가득 큼직한 선물 상자와 화병을 든 용무군 군사들이 차례차례 침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져온 선물들을 침실 곳곳에 부지런히 내려놓았다.
색이 고운 홍연화로 가득 채운 거대한 화병부터 청금석, 비취, 홍마노, 금강석, 흑진주 같은 보석을 각양각색으로 세공한 머리 장식과 장신구, 그리고 금사와 은사를 섞어 짠 오색 비단까지.
서른 명 남짓한 군사들 덕분에 연주의 침실은 금세 꽃밭으로 변했다. 뿐인가. 비단과 보석, 장신구는 또 얼마나 많은지 그것들이 내뿜는 광채 때문에 궁전 안에 휘황찬란한 무지개가 떠올랐다.
“이게 대체…….”
모란과 연꽃, 벚꽃과 배꽃, 자목련과 수선화, 석류꽃과 말리화…….
연주는 당장 눈에 보이는 꽃 종류를 천천히 헤아려 보았다. 이내 사방에서 풍기는 달콤한 꽃향기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황홀하게 빛나는 보석과 비단은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부셔서, 제대로 살펴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장 부관, 연친왕 전하께서 정말 이걸 다 내게 보내셨단 말인가?”
연주는 처음 겪어 보는 상황에 당황해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맨 마지막에 등장한 장명을 발견하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게 끝이 아니옵니다.”
장명은 명확한 대답 대신 등 뒤에 숨기고 들어온 것을 불쑥 연주에게 내밀었다.
“세상에나…….”
장명이 건넨 것은 한 송이에 연노랑 꽃잎과 분홍색 꽃잎을 모두 가진 희귀한 작약 수십 송이였다. 연주는 놀란 얼굴로 거대한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품에 넘치도록 꽃을 안은 그녀는 그것에서 오랫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이렇게 화려한 작약은 처음 보는군.”
“마마께서 처음 보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 작약은 올해 처음으로 꽃을 피워 향주 자사가 전하께 바친 신품종이거든요. 전하께서 이 작약 꽃의 이름을 군주마마께서 지어 주시면 좋을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말인가……?”
“예. 급한 것은 아니니 천천히 생각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꽃의 이름을 지어 달라니. 엉뚱하지만 제법 운치 있는 제안에, 연주의 붉은 입술이 얕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니까.’
연주의 고운 미소를 보며 뿌듯해하던 장명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귀한 선물을 받아 기쁜 것과 별개로 연주의 의문은 여전했다.
정엽은 사람이 가면 가는 대로, 오면 오는 대로 내버려 두는 사람이지, 누군가를 기쁘게 하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한데 장 부관, 전하께서 어째서 내게 이런 선물을 보내신 것인가?”
“으음, 전하께서 따로 더 남기신 전언은 없습니다. 다만 소신의 짧은 소견으로는 마마께서 하루빨리 병상을 털고 일어나셨으면 하는 마음을 전하시고자 한 듯하옵니다.”
“그래……?”
“예. 특히 그 작약은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귀한 꽃입니다. 부디 거기 담긴 전하의 진심을 알아주십시오.”
작약에 실린 마음을 알아 달라? 연주는 화려한 작약 꽃을 보며 자연스럽게 작약지증(勺藥之贈)의 고사를 떠올렸다.
‘이제 와 다른 연인들처럼 작약을 주고받으며 정을 쌓기에 우리는 너무 멀리 와 버리지 않았는가.’
연주는 씁쓸함에 가볍게 웃었다. 그러곤 선물이 산처럼 쌓인 침실을 말없이 빙 둘러보았다. 이쯤에서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눈치챈 장명이 다급하게 말했다.
“혹여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당장 다시 가져오겠습니다.”
“아니, 그런 게 아닐세. 그저 선물이 너무 많고 갑작스러워서 잘 실감이 나지 않는군.”
장명은 제게 불만족스러운 점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어나갈 태세였다. 어색하게 웃어 보인 연주가 한숨을 쉬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일단 군사들부터 밖으로 내보내야겠어.’
연주는 일부러 꽃다발을 바짝 끌어안고 향기를 맡았다. 그렇게 뜸을 들이며 장명과 군사들을 안심시킨 연주가 입을 열었다.
“전하께 나 대신 감사 인사를 전해 주게.”
“예, 꼭 전하께 전해 드리겠습니다.”
잘 넘어간 건가? 연주의 화답에 얼굴이 밝아진 장명이 주변 군사들을 향해 눈짓했다. 신호를 받은 군사들은 연주에게 한쪽 무릎을 꿇고 우렁차게 합창했다.
“군주마마의 쾌유를 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