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이런 추측은 정엽의 이성을 놀라울 만큼 빠르게 마비시켰다. 한때 정신을 차린 연주가 저를 향해 다시 예쁘게 웃어 주기만 하면 족하다고 여기던 게 무색했다.
하지만 연주가 예전처럼 제게 매달리고, 의지하고, 지금껏 특별하다고 여겨 본 적 없는 애칭으로 부르기 시작한 순간, 정엽은 혼이 나간 것처럼 단 하나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연주가 곱게 뺨을 붉히며 내게 다시 사랑을 속삭여 주었으면.’
이런 바람도 처음엔 민들레 홀씨처럼 아주 작은 희망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바람은 황량한 정엽의 마음에도 싹을 틔울 만큼 아주 생명력이 강했다. 그렇게 한번 뿌리 내린 마음은 갈망이 되어 메마른 사막과 같던 그의 가슴을 뜨겁게 태웠다.
‘그러니까 지금은 이게 최선이야.’
당장이라도 달려가 연주와 눈을 맞추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정엽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연주가 제 곁에 남도록 설득할 방법을 찾을 시간이.
“아무리 그래도 연주가 먹을 약에 손을 쓰겠다니. 제정신이야?”
게다가 지금 정엽은 스스로가 보기에도 조금 미쳐 있었다. 혹여 연주가 제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세자부로 떠나겠다고 하면, 그녀의 생명을 위협하지는 못해도 밧줄에 묶여 있던 발목 정도는 무참히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시간을 끌 수는 없는데…….”
정엽도 머리로는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껏 황제 외에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애써 본 적이 없었다. 여인의 마음을 돌릴 방도를 알 리 만무하다는 뜻이었다.
물론 정엽 역시 누군가의 환심을 사고 싶을 땐 진귀한 선물을 준비하는 게 좋다는 상식쯤은 갖고 있었다. 그러나 선물은 자고로 상대방이 좋아할 만한 것을 내놓을 때 가장 효과적이지 않던가.
안타깝게도 정엽은 연주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랐다. 평소에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하다못해 무슨 색깔을 좋아하는지조차 몰랐다. 그러니 생각이라는 걸 한들 답이 나올 리가.
“하……. 도통 모르겠군.”
정엽은 심란함을 이기지 못하고 품에서 연초를 꺼내 물었다. 그가 군영에서는 절대로 하지 않는 행동 중 하나였지만, 지금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머리가 굴러갈 것 같지 않았다.
“후우…….”
정엽은 길게 연기를 뱉으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막막함에 한숨이 그치지 않았다. 그의 근심은 내실을 가득 채운 연초 연기처럼 자욱해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덧 날이 저물어 저녁 일과를 마친 장명과 재하가 정엽을 찾아왔다.
“콜록! 전하,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콜록!”
재하는 맵고 싸한 연초 연기가 익숙하지 않은지 연신 기침을 뱉으며 힘겨워했다. 그 꼴을 한심하다는 듯 지켜보던 장명이 투덜거렸다.
“오랜만에 군영에 나오셔서는 왜 온종일 연초만 태우십니까? 이러다 숨 막혀 죽겠습니다.”
장명은 아무렇지 않게 정엽을 타박하며 관사의 창문을 모조리 열었다. 정엽은 그제야 용무늬가 멋들어지게 새겨진 재떨이에 연초를 비벼 껐다. 그러곤 한쪽으로 꼬고 있던 긴 다리를 풀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차질 없이 훈련을 잘해 왔더군. 고생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여기 계신 장 부관께서 많이 도와주셔서 다행히 큰 문제도 없었고요. 군사들도 잘 따라 주었습니다.”
정엽은 언제나 남에게 공을 돌리기에 바쁜 재하를 마주하고 피식 웃었다. 어쩌면 사람이 저렇게도 한결같을 수 있을까. 만일 이곳이 외적과 등을 맞댄 국경이었다면, 재하는 지금쯤 까마귀밥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가끔은 있는 그대로 칭찬을 받아들이는 것도 좋다. 겸손도 지나치면 해가 되는 법이지 않으냐.”
“예? 아, 예!”
재하는 정엽의 말에 멋쩍게 웃어 보였다. 정엽을 따르기 시작한 뒤로 삶의 보람을 느끼고 있는 그는 정엽의 말이라면 뭐든 대단하게 들렸다.
장명은 서로에게 각별해 보이는 두 사람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러곤 훈훈한 분위기를 틈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요 며칠 이어지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한데 전하, 군영에 다시 나오신 걸 보면 군주마마께서 드디어 몸을 회복하신 겁니까?”
“그래.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리로 왔다.”
“……군주마마의 곁을 지키시지 않고요?”
장명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재하 역시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의도치 않게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된 정엽이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이럴 때는 평소 표현에 인색한 주군이 쉽게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도록 물꼬를 터 주는 게 상책. 장명은 정엽의 사소한 행동만으로도 그의 고민을 대충 짐작했다. 그는 눈치 빠르게 말을 얹었다.
“하기야,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계셨으니 기왕이면 쾌유 선물을 들고 찾아가시는 것도 좋겠지요. 그렇지, 재하?”
“예? 아, 예!”
장명은 능청스럽게 재하의 어깨를 툭 쳤다. 재하는 얼떨결에 소리 높여 대답했다. 마치 고장 난 장난감처럼 어색한 모습이었다.
겨우 웃음을 참은 장명이 말을 이었다.
“자고로 여인의 마음을 달래는 데엔 선물이 최고인 줄 압니다. 군주마마께서도 여인이신데 선물을 마다하실 리가요.”
“장 부관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면 전하, 군주마마께 드릴 선물은 정하셨습니까? 쾌유를 축하하는 선물은 때를 놓치면 무용지물입니다.”
장명은 시전에서 만담을 늘어놓는 입담꾼처럼 재하와 주거니 받거니 천연덕스럽게 떠들어 댔다. 부하들을 지켜보던 정엽이 실소를 터뜨렸다. 그는 자연스럽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아니. 아직 선물을 고르지 못했다. 혹시 좋은 생각이 있나?”
“으음, 여인을 위한 선물이라면 역시 비단옷과 신발, 장신구가 최고이지 않겠습니까? 진귀한 보석도 괜찮을 테고요.”
재하는 순진한 얼굴로 여인에게 흔히 하는 선물을 쭉 읊었다. 하지만 장명은 손사래를 쳤다.
“허어, 우리 두등군사는 아직 한참 멀었군. 여인에게 선물할 때 비단과 보석은 기본일세. 그러니 거기에 무엇이 더해지는가가 중요한 것이지!”
“그, 그렇습니까? 저는 여인에 대해 잘 몰라서……. 장 부관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습니다.”
재하가 머쓱해하며 귓불을 붉혔다. 한껏 신난 장명이 앞으로 나섰다.
“전하, 제가 군주마마께서 좋아하실 만한 것을 하나 꼽아 드리겠습니다.”
“그게 뭐지?”
“꽃입니다, 꽃!”
“……꽃?”
꽃이 그렇게 대단한 선물은 아닌 것 같은데. 정엽은 설핏 미간을 구겼다. 실컷 잘난 체할 땐 언제고 흔하디흔한 꽃 선물을 제안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나라고 꽃 생각을 하지 않은 게 아니다. 하지만 대체 꽃이 비단이나 보석보다 나을 게 무엇이냐? 게다가 군주는 지금껏 왕족으로서 부족함 없이 자랐는데, 고작 꽃을 받고 기뻐하겠느냐?”
“전하, 그런 말씀 마십시오. 똑같은 선물이라도 누가 주느냐에 따라 받고 말고를 결정하는 겁니다. 게다가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군주마마께서 좋아하시면 그만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만…….”
“여인이 선물에 감동하는 건 거기에 담긴 마음 때문이지, 선물이 비싸고 아름다워서가 아닙니다.”
장명은 자신감에 차 정엽을 설득했다. 마음이 흔들린 정엽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장명의 목소리는 한층 더 당당해졌다.
“듣기로 군주마마께서 꽃을 무척이나 좋아하신답니다. 세자부에서도 온갖 기화요초를 키우실 정도라지요. 남해에서만 자라는 해홍화를 조양에서 기르시는 것만 봐도 얼마나 꽃을 좋아하시는지 알 만하지 않습니까?”
“그래, 군주가 꽃을 좋아하긴 하지.”
정엽은 뒤늦게 연주가 그의 의복과 투구, 갑옷 등에 꽃 자수를 놓은 일을 떠올렸다. 이제 보니 장명의 말에 제법 일리가 있었다.
“군주마마께선 선한 분이시니 작은 정성에도 크게 감동하실 겁니다. 그러니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만 아무리 좋은 선물을 준비한다고 해도 이렇게 꾸물거리다간 일을 그르치기 쉽습니다.”
“그런가……?”
“예. 가장 중요한 건 전하의 진심이란 걸 잊지 마시고요.”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마음이다? 정엽은 새삼스러운 장명의 일침에 말을 아꼈다. 그러자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상황을 관망하던 재하가 말을 얹었다.
“소관 역시 선물은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장 부관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
“물론 소관이 장 부관님만큼 군주마마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군주마마께서 어떤 때 가장 행복해하셨는지를 떠올리시면 가장 좋은 선물을 고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잘 생각해 보마.”
정엽은 진심 어린 부하들의 조언에 여유를 되찾았다.
물론 연주를 만족시킬 만한 것은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기억 속에 연주가 행복하게 웃던 순간은 대체로 그와 함께하던 사소한 일상에서 나온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를 놓치면 아무리 좋은 선물도 허사라는 얘기만큼은 그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았다.
‘그래, 고민만 하다 때를 놓치는 것보다 일단 뭐라도 해 보는 게 낫겠지.’
어차피 연주가 떠난 뒤에는 모든 게 끝이다. 그보다 더 나빠질 상황이 있긴 한가?
“두 사람 모두 고맙다.”
마음을 굳힌 정엽은 두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장명과 재하는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다시 홀로 남은 정엽은 연주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구할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