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그럴 리가. 전하께서 그러실 리가 없는데…….”
아실은 현실을 부정하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지난 며칠 동안 정엽이 만사를 제쳐 두고 연주를 보살피던 모습이 생생했다. 설령 신의군에 일이 생겼대도 그는 출타하기 전에 연주의 얼굴을 확인하고 떠날 사람이었다. 절대 말없이 자리를 비울 리 없다는 뜻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아실과 취아의 낯빛이 한꺼번에 어두워졌다.
“아실, 왜 그러느냐?”
“아,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연주는 아실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아는 정엽이라면 당장 향경당으로 쫓아와 왜 또 바보같이 헌왕의 계략에 빠졌느냐고 따져 묻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연주의 생각을 짐작한 아실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실은 마마께서 사경을 헤매는 동안 전하께서 밤낮으로 병간호를 하셨사옵니다. 하여, 제대로 쉬지도 못하시고 일을 나가셨다니 걱정이 되어서요.”
“그게 무슨 소린가?”
“마마께선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마마의 몸이 불덩이 같을 때마다 전하께서 얼음으로 채운 욕조에 마마를 안고 들어가 함께 밤을 지새우셨사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연주는 아실의 말을 선뜻 믿을 수 없었다.
물론 정엽이 헌왕의 마수에서 저를 구해 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소정엽이 누군가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모습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와 함께하는 동안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실은 마치 정엽을 대변하듯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마마, 정말이옵니다. 마마께서 하루에도 몇 번씩 돌아가신 아기씨를 찾겠다며 난동을 부리실 때마다 전하께서 안전하게 처소로 데려다주셨…….”
아실은 거침없이 정엽을 두둔하다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두 귀로 이미 모든 이야기를 들은 연주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내가…… 아이를 찾으며 난동을 부렸다고?”
“저, 마마. 그것이…….”
“말해 보게. 그래서 내 몸을 꽁꽁 묶어 두었던 것인가?”
이를 어쩐다. 아실은 아랫입술을 짓이기며 한참을 망설였다. 그녀는 이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연주는 참담함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착란에 시달린 열흘간 죽은 아이를 찾아 헤맸다니. 기억 속에서 증발해 버린 슬픈 꿈이 어쩌면 모두 현실이었을지도 모른다니.
“어, 어떻게…….”
연주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해일처럼 밀려드는 무안함과 자괴감에 고개를 돌렸다.
‘오죽 미치광이처럼 날뛰었으면 온몸을 결박하고 침상 기둥에 발목을 묶어 둬야 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정엽을 비롯한 연왕부 식솔들을 무슨 낯으로 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던 아실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이미 다 아셨으니 오해 없으시도록 마저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또 무슨 얘길 하려고 그러는가.”
“마마께선 착란을 겪으시는 내내 돌아가신 아기씨 울음소리가 들린다며 괴로워하셨사옵니다. 심지어는 전하께서 아기씨를 일부러 숨긴 것이 틀림없다며 비난하셨지요. 또 틈만 나면 밖으로 뛰쳐나가 땅을 파헤치기까지 하셨사옵니다.”
“…….”
“전하께서는 마마께서 더는 다치시지 않도록 보호하려고 아까와 같이 묶어 두신 것이옵니다. 하지만 그 후에도 마마께서 계속 환청에 시달리시며 전하께 원망을 쏟아 내셔서…….”
힘겹게 말을 이어 나가던 아실이 울먹였다. 그러나 정엽이 연주를 다시 왕비라 부르기 시작한 건 연왕부 궁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연주가 아무것도 모른 채 연왕부를 떠난다면 그녀에겐 상처만 남을 게 분명했다. 게다가 다시 홀로 남겨질 정엽은 또 어떻게 되겠는가. 차라리 모두 알아 버리는 편이 서로에게 이로웠다.
“그만. 더 말하지 않아도 알겠네.”
하지만 연주는 자신에 대해 잘 알았다. 그녀는 죽은 아이에 관한 한 정엽에게 피맺힌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아실의 의도가 무엇이든, 연주는 아실의 이야기를 한 가지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약에 취해 정엽에게 지난 일을 들먹이며 패악을 부렸다는 뜻으로.
‘정말이지 엄청난 일을 벌였구나.’
연주가 넝마가 된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이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아실이 연주를 위로했다.
“너무 자책하지 마옵소서. 그래도 전하께서 모든 걸 묵묵히 감내하시고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셨사옵니다.”
“…….”
“또 호 태의의 말마따나 이 일은 마마의 잘못이 아니라 헌왕, 아니 3황자가 마마께 삿된 수작을 부리려다 벌어진 일이 아니옵니까?”
괴로워하는 와중에도 헌왕을 3황자라 고쳐 부르는 말이 걸렸다. 연주가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3황자라니?”
“폐하께서 이번 일을 아시고는 3황자의 왕위를 박탈하셨사옵니다. 영지 관리를 소홀히 했다는 명목으로요.”
연주는 실소했다. 어린 나이부터 북방의 영지와 전쟁터로 내몰리던 정엽을 제외하고, 대체 어느 황족이 영지를 직접 살핀단 말인가?
황제는 황실의 체면을 무척 중시했다. 차마 아들이 형수였던 여인을 겁탈하려 했다고 떠들 수 없으니 대충 둘러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작위를 삭탈하는 것이 결코 가벼운 처벌이라곤 할 수 없었다. 상황을 곰곰이 되짚으며 차츰 현실 감각을 되찾은 연주가 이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가는 법. 종유궁에서 벌어진 일은 이제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꼭 황실의 체면 때문이 아니더라도 헌왕의 진짜 죄목이 만천하에 드러난다면 제 남은 인생 역시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겠는가.
‘어쩌면 폐하께서도 이것이 최선이었는지도…….’
만족스럽든 만족스럽지 않든, 결과적으로 황제는 연주와 평해왕 일가를 위해 나름의 성의를 보인 셈이었다. 게다가 연주가 직면한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이제 정말로 수도에 남아 있을 수 없겠구나.’
이 사실을 깨닫고 나자, 연주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오석산 사건이 벌어지기 전, 헌왕과 말도 안 되는 염문에 휩싸였던 처지였다. 훗날 헌왕이 복권이라도 되는 날에는 무슨 보복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더군다나 여인으로서의 명예도 땅에 떨어진 마당 아닌가. 억울함을 금할 길이 없으나, 황후와 시양공주를 비롯해 저를 아끼고 사랑해 주었던 이들을 위해서라도 모두와 거리를 두는 편이 바람직했다.
‘수도에 남을 이유도 없네.’
연주가 지금까지 수도에서 지내길 고집한 건 단순히 황후나 공주 때문만이 아니었다. 수도를 떠나는 건 인생의 도망자로 전락하는 길이며, 그 누구에게도 초라한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굳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수도에 남을 이유가 없었다. 비록 주변 상황에 등을 떠밀린 형국이지만, 수도에서 지내는 일이 더는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 분명했다.
‘일부러 가시밭길만 골라 걷는 것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끌어안고 혼자서 싸우는 것도 바보 같은 일인걸.’
길이 막혔을 땐 돌아가는 것도 방법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니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정엽의 도움 없이도 혼자서 보란 듯이 살아 보겠다고 떠들던 자신이었다. 그러면서도 익숙한 환경에만 머무르려고 했던 걸 생각하면 그의 말마따나 미련하기 짝이 없었다.
변화를 원한다면, 나부터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떠나는 것이었다.
“내가 부족해서 그간 여러 사람을 고생시켰군. 미안하네.”
“마마…….”
아실은 제 이야기가 오히려 엉뚱한 오해를 낳은 듯해 어쩔 줄 몰라 했다.
“미안해하실 필요 없사옵니다. 소인은 오랜만에 마마를 모실 수 있어서 무척 행복했는걸요.”
“몸과 마음이 고단한데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이제 나는 괜찮으니 자네도 마음 놓고 편히 쉬게.”
여전히 다정하긴 하지만 연주의 음성에선 단단한 도자기에서나 풍길 법한 서늘함이 느껴졌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아실이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은 푹 쉬시지요. 탕약이 준비되면 돌아오겠사옵니다.”
아실은 연주의 가슴께까지 꼼꼼하게 이불을 덮어 주고 떠났다. 홀로 남은 연주는 모란꽃과 나비가 어지럽게 얽힌 천장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아무리 원망을 쏟아 내고 패악을 부려도 정엽이 묵묵히 받아 주고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는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실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정엽은 오랜 마음의 빚을 드디어 청산한 셈이었다. 정엽이 저를 구해 주고 치료까지 해 주었으니 제가 역으로 그에게 빚을 지게 된 셈이기도 했다.
“이제 그이의 바람대로 완전히 수도를 떠나 주는 게 맞겠지.”
아마 정엽은 누구보다 이 소식을 반가워하리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이 원하는 일과 정엽이 원하는 일이 일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씁쓸하게 웃은 연주가 눈을 감았다.
“그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하나는 남아 있어 다행이네.”
그렇게 말하는 연주의 목소리는 어쩐지 슬픔에 잠긴 듯했다.
* * *
그날 오후, 정엽은 도망치듯 신의군 관사에 틀어박혔다. 그는 홀로 생각에 잠긴 채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완전히 정신을 차린 거겠지……?’
연주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습게도 정엽이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당혹감과 두려움이었다. 채신이 다녀간 이래 연주를 제 곁에 두려면 어찌해야 할까 수없이 고민했지만, 여태껏 그럴싸한 답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생각해 낸 해결책이라고는 몸이 완전히 회복되려면 멀었다는 핑계로 연주를 붙잡아 두거나, 그녀가 먹는 약에 손을 쓰자는 미친 생각뿐.
그나마 멀쩡한 방안은 연주의 병색이 짙다고 주장하는 쪽이지만, 그녀는 움직이는 데 문제가 없다면 당장 세자부로 돌아가겠다고 할 게 뻔했다.
‘채신도 그걸 아니 연주가 원하면 언제든지 돌려보내라는 말을 한 거겠지.’
정엽은 허울 좋은 말로 약속을 받아 낸 채신이 얄미웠다. 하지만 지금은 남 탓을 하는 것조차 사치였다.
‘연주가 왕부를 떠나 영영 나를 보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