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감정이 북받친 채신이 애꿎은 매화나무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주먹에 어찌나 힘이 실렸는지, 나무의 우듬지에서 꽃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정엽이 입을 열었다.
“연주가 겪은 수모는 차차 갚아 줘도 늦지 않아. 지금은 연주가 회복하는 게 우선이다.”
“……예,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채신은 폐인이 된 누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가까스로 마음을 추슬렀다. 헌왕에 대한 처결은 끝났지만, 연주를 둘러싼 문제는 아직 단 한 하나도 해결된 것이 없었다.
정엽의 말처럼 지금은 연주에게 집중해야 할 때. 생각을 정리한 채신이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그런데…… 치료에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르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연주를 세자부에서 돌보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연왕부에는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습니다.”
아까부터 온몸이 결박된 누이의 잔상에 괴로워하던 채신이 넌지시 제안했다. 계속 연주를 침상에 묶어 두느니, 차라리 연주를 세자부로 데려가 형제들이 보살피면 지금보다 상황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정엽은 묵묵부답이었다.
“전하.”
채신은 정엽의 침묵이 거절을 뜻하는 걸 알면서도 승낙을 촉구했다. 은근한 압박에 내내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정엽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건 안 돼.”
“…….”
“연주는 돌려보낼 수 없다.”
설령 이대로 치료에 실패해 연주가 평생 실성한 채 살아야 한대도. 매일 나를 향해 악다구니를 쓰고 원망을 쏟아 낸대도.
“어차피 연주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런 때일수록 내 울타리가 필요할 거야.”
“하오나 전하…….”
“네가 무엇을 염려하는지 안다. 하지만 채연주는 네 누이이기 이전에 내 사람이야.”
채신은 스스럼없이 연주를 제 사람이라 칭하는 정엽의 태도에 놀랐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정엽은 연주와 이미 끝난 사이였고, 시간이 흐른 지금 연주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는 두고 봐야 했다.
채신은 잠시 생각 많은 표정을 짓다가, 이내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연주가 전하의 사람이었음을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연주가 전하의 곁에 머물기를 원치 않는 날이 온다면, 반드시 돌려보내 주셔야 합니다.”
정엽과 연주가 부부의 인연으로 맺어져 함께한 시간은 모두 과거일 뿐. 연주가 정신을 차리고 나면 정엽이 그녀를 대신해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정엽은 채신이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저의를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연주가 깨어난 후 제 곁에 머물러 있는 모습을 어느 순간부터 당연시하고 있던 그였다.
“……알았다.”
정엽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마지못한 대답이라도 약속을 받아 낸 신은 착잡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연주의 상태를 확인했으니 이제 해광성에 계신 부모님께 소식을 전해야겠습니다. 전하, 제 누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채신은 정엽을 향해 깊게 허리를 숙였다. 인사를 마친 그는 빠른 걸음으로 연왕부를 나섰다.
홀로 남은 정엽은 시들어 갈수록 진해지는 매화 향기를 맡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별빛을 벗 삼아 연주가 깨어난 이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시 제 곁을 떠나가는 연주의 모습을 상상하니, 차라리 연주가 계속 실성한 채 제 곁에 머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더니…….”
아무래도 나도 너와 함께 미쳐 버린 모양이야, 채연주.
정엽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나 한번 뇌리를 스친 편리하고 달콤한 유혹은 끊임없이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 * *
연주는 오라비가 다녀간 줄도 모른 채 한동안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헤맸다. 그런 그녀가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닷새 뒤였다.
연주는 이제 막 태어난 아이처럼 천천히 눈을 떴다. 사방에서 환히 쏟아지는 황촉 불에 눈이 시렸다.
그녀는 오랫동안 빛이 없는 곳에서 지낸 사람처럼 인상을 찡그렸다.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옴짝달싹할 수 없이 몸을 조여 오는 압박감에 숨이 막혔다.
“마마, 정신이 드시옵니까?”
연주는 눈부심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실눈을 한 채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반가운 목소리가 귓전을 두드렸다.
어느새 아실이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저와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연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얼른 풀어 드릴게요!”
소매로 연신 눈물을 훔친 아실은 재빨리 연주의 입에 물렸던 재갈과 몸을 결박했던 비단을 풀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를 바로 눕혀 주었다.
한 자세로 오랜 시간 묶여 있던 탓인지, 가장 편하고 자연스러운 상태로 돌아가는 것뿐인데도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흐윽…….”
연주는 말초부터 올라오는 저릿한 감각에 힘겹게 신음했다. 그사이 아실은 발목에 단단히 매듭지어져 있었던 밧줄을 풀어 연주를 해방했다.
“취아! 밖에 있느냐?”
“예, 마마님.”
“들어오너라!”
곧이어 아실은 분주하게 일어나 침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궁녀를 급히 찾았다. 안쪽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취아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아실은 지체 없이 명령했다.
“마마께서 깨어나셨다. 어서 전하께 소식을 전하고 호 태의를 모셔 오너라.”
아실의 목소리가 침실 안과 바깥을 구분하는 목영벽을 넘어갔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연주는 그제야 자신이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지……?’
연주의 기억은 정엽이 저를 헌왕의 마수로부터 구해 낸 순간에서 멈춰 있었다. 그 이후에 대해선 누가 강제로 기억을 지워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다만 잠을 자는 내내 무척 슬픈 꿈을 꾸었던 것 같은데. 아무것도 생각나질 않으니 꼭 바보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그이가 또 화를 내겠구나.’
이런 모습으로 깨어난 걸 보면 그간 여러 사람에게 못 볼 꼴을 보인 건 분명해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영영 아무것도 모르고 싶었다.
하지만 정엽은 분명 저를 몰아세울 것이다. 왜 또 헌왕의 계책에 휘말렸느냐고. 왜 이렇게 미련하냐고. 그러니 무슨 말이라도 하려면 아실을 통해 그간의 사정을 알아 두는 편이 현명했다.
‘사람을 때린 걸까? 물건을 박살 낸 걸까? 그것도 아니면 애먼 사람에게 욕지거리라도 퍼부은 걸까?’
연주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패악의 종류를 떠올렸다. 심란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사이 익숙한 얼굴의 태의가 헐레벌떡 침실로 들어와 예를 갖췄다.
“왕비……, 아니 군주마마를 뵙습니다.”
“아, 자네는…….”
“소신을 기억하시옵니까? 일전에 상현궁에서 뵈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리 무사히 깨어나시다니 정말 다행이옵니다.”
“그…… 정도인가?”
이쯤 되면 내가 정말 엄청난 실수를 한 게 아닐까. 연주의 낯빛이 급격히 흐려졌다.
“소신을 기억하시는 걸 보면 회복 징후가 뚜렷해 보이시지만, 정확한 건 맥을 짚어 본 후에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호 태의는 연주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불그스름하게 결박의 흔적이 남은 손목 위에 손끝을 얹고 맥을 짚기 시작했다. 연주는 낯선 이의 손길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
연주는 긴장 어린 눈으로 호 태의를 곁눈질했다. 연주의 시선을 느낀 호 태의는 인자하게 미소 띤 얼굴로 신중하게 진찰을 마쳤다.
“드디어 맥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열흘은 고열에, 또 열흘은 착란에 시달리셔서 걱정을 많이 하였는데…….”
“열흘은 고열에 열흘은 착란이라니. 설마 지금 내가 스무날 동안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다는 뜻인가?”
나는 그저 며칠 푹 잠을 잔 것 같은데, 자그마치 스무날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니.
경악한 연주는 호 태의와 아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호 태의는 연주를 안심시키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만하시길 천만다행이옵니다. 요즘 오석산이 귀족들의 유희 거리로 쓰이고는 있지만, 그 약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석산이라면?”
“아, 마마께서 종유궁에서 드신 약이 바로 오석산입니다. 다섯 가지 광물로 만들어 그리 부르지요. 혹자는 이 약을 불로장생의 영약이라고 떠들기도 하는 모양입니다만, 그 부작용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특한 약입니다.”
“……그렇군.”
내가 그런 약을 마셨다니. 연주는 차오르는 분노에 입술을 짓이겼다.
그러다 뒤늦게 헌왕이 떠들어 대던 말이 떠올랐다. 저의 신부가 될 사람이니 불로장생의 영약을 선물했다던가.
제 신부가 될 사람이라는 헌왕의 말도 그렇지만, 남은 일생을 함께할 사람에게 먹인 게 고작 오석산이라니. 도무지 멀쩡한 사람이 저지를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
“하아…….”
헌왕이 제게 하던 행동들을 하나하나 곱씹던 연주가 탄식했다. 화도 나지만 너무 쉽게 헌왕의 계책에 당하고 말았다는 생각에 자책감이 밀려들었다. 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호 태의가 연주를 위로했다.
“어쨌든 이렇게 중독을 이겨 내신 것만 해도 정말 장하신 일입니다. 그러니 스스로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내가, 그래도 되겠는가?”
“예. 잘못은 그런 약을 만들어 내 사용한 사람에게 있지요. 마마께 무슨 잘못이 있겠사옵니까.”
호 태의가 거침없이 헌왕을 비난했다. 누군가가 저를 두둔해 주니 그제야 자책감이 조금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연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소신은 곧바로 기력을 보하는 탕제를 올리겠사옵니다. 상처 치료에 좋은 연고를 미리 준비해 두었으니 잘 바르시면 몸에 남은 상처도 흉터 없이 아물 것이옵니다.”
“고맙네.”
연주는 진심을 담아 호 태의에게 인사를 건넸다.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숙인 호 태의가 뒷걸음질 쳐 방에서 물러났다. 아실은 기다렸단 듯 연주의 손을 꼭 부여잡으며 울먹였다.
“정말 다행이옵니다. 소인은 마마께서 꼼짝없이 잘못되시는 줄 알고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릅니다.”
“다 자네 덕이지.”
“소인의 덕이라니요. 아니옵니다. 실은 마마께서 아프실 때 전하께서…….”
아실은 다급하게 그간의 상황을 설명하려 애썼다. 그 순간 정엽에게 소식을 알리러 갔던 취아가 쭈뼛거리며 돌아왔다.
“마마님…….”
“아니, 왜 너 혼자서 오느냐? 전하께서는?”
아실이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안 그래도 정엽이 곧장 달려올 것이라 짐작해 호 태의가 앞서 도착한 상황을 내심 이상하게 여기고 있던 차였다.
그러자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 된 취아가 연주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게…… 전하께서는 신의군에 일이 생겨 좀 전에 출타하셨다고 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