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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수월-84화 (84/161)

84화.

그날 이후, 연주는 혼미한 정신으로 밤낮없이 아이를 찾았다. 들리지도 않는 아기 울음소리는 어찌나 연주를 괴롭혀 대는지, 그녀는 약을 마시고 잠들어 있을 때를 제외하면 밖으로 뛰쳐나가 닥치는 대로 땅을 파헤쳤다.

연주를 보다 못한 정엽은 그녀를 내당으로 옮겼다. 그러곤 온몸을 비단으로 결박해 침상에 눕혔다. 하지만 연주는 하루에도 몇 번씩 몸부림치며 저항했다. 차디찬 바닥에 몸을 찧으며, 제발 아이를 돌려 달라고 울부짖었다.

“전하, 오늘도 왕비께서 아이를 찾으러 가야 한다며 네 번이나 침상에서 굴러 떨어지셨습니다.”

“다쳤느냐?”

“불행 중 다행으로 다치신 곳은 없습니다. 다만 언제 불상사가 일어날지 알 수 없어, 궁인들 모두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궁인들의 노고도 노고지만, 이대로 두었다간 연주가 위험에 처할지도 몰랐다. 정엽은 고심 끝에 연주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발목을 침상 기둥에 묶어 두는 초강수를 택했다.

덕분에 향경당을 어지럽히던 소란은 점차 가라앉았다. 하지만 연주를 지켜보는 정엽의 심정은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온종일 나만 찾으며 사람을 꼼짝 못 하게 할 땐 언제고…….”

연주는 이제 정엽만 보면 악에 받쳐 원망을 퍼부었다. 난동을 부리는 연주를 피해 경수당으로 돌아온 정엽이 중얼거렸다.

그 역시 지금 상황이 연주의 탓만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잠시라도 눈을 돌리지 않으면 기약 없는 고통의 시간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하아…….”

막막함에 몸서리치던 정엽이 옷섶을 뒤졌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한동안 피우지 않던 연초였다. 심란한 마음만큼 깊이 연초를 빨아들이자, 메케한 연기가 눈물처럼 시야를 가렸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한수에서도 그랬지만, 폐인이 된 연주와의 전쟁은 상상 이상으로 혹독했다. 창칼이 날아다니지 않아도, 보통의 전투보다 몇 배는 힘겹고 외로웠다.

변방에는 등을 맡길 수 있는 부하들이 있지만, 연주와의 싸움은 홀로 견뎌야 했다. 악다구니하는 연주를 마주하노라면, 전쟁에 이골이 난 정엽조차 눈앞이 캄캄해졌다.

마음 같아서는 술에 의지해 잠시나마 복잡한 일을 잊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회피지 해결책이 아니었다.

운이 좋아 잠깐이라도 속 편하게 잠들 수 있다면 좋겠지만, 연주는 꿈속에서조차 저를 원망하며 울부짖었다. 깨어 있는 것도, 잠드는 것도 모두 고통뿐이었다.

‘다시 깨어나면, 그래서 내게 웃어 주기만 한다면 뭐든 다 될 것 같았는데…….’

정엽의 바람과 달리 상황은 점점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사실, 정엽은 제게 의지하는 연주를 보며 내심 희망을 품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 과거의 일상을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주 작은 희망.

전과 달리 변방이 혼란스럽지도 않고, 자신은 친왕이 되어 수도에 머물게 되었으니 기회가 온 거라고도 여겼다.

이제 전처럼 연주를 힘들게 할 일이 많지 않을 테니까, 한동안은 사랑스럽게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한데 연주의 심연을 적나라하게 보게 된 지금, 정엽은 정말이지 갈피를 잃은 기분이었다. 연주가 눈물로 토해 내는 절망은 무디고 단단하기만 하던 그의 내면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저 꼴을 계속 보느니 차라리 칼에 찔리는 쪽이 나았겠어.’

정엽은 손에 칼을 쥐여 줘도 저를 찌르지 못하던 연주를 떠올렸다. 그때는 한 치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연주의 반응에 마음이 편했는데, 이토록 사람을 괴롭힐 거였다면 차라리 찌르지 그랬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차라리 칼에 찔리는 쪽이 낫다니. 점점 가관이군.”

지금껏 생존을 인생 최고의 가치와 목적으로 삼아 온 정엽이었다. 그러니 스스로 죽고 싶다는 생각 역시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후…….”

정엽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온몸을 짓누르는 피로감에 눈을 감고, 등받이에 몸을 젖혔다.

재밌는 건 저는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연주가 싸늘한 주검이 되어 버린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는 사실이었다.

살면서 이토록 엄청난 모순에 빠져 본 적이 있었던가? 지친 와중에도 실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소렴자가 들어와 허리를 굽혔다.

“전하.”

“무슨 일이냐.”

“왕세자께서 오셨습니다.”

이 밤중에? 정엽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미쳐 간다는데 밤낮을 가려 찾아올 오라비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정엽은 연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흐트러진 의복을 가다듬었다. 채신은 그사이를 못 참고 벌컥 합문을 열고 들어왔다.

“전하!”

독촉하는 부름에는 수백수천 가지의 의문이 담겨 있었다. 정엽은 인사치레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직접 보고 얘기하지.”

“예.”

정엽은 채신과 함께 연주가 머무는 향경당으로 이동했다. 행여 사람을 상하게 할까 봐 잡다한 물건을 모두 치운 방 안에는 연주 홀로 있었다. 입에 재갈을 문 그녀는 비단으로 온몸이 칭칭 감긴 채 잠들어 있었다.

“어찌 이런 일이…….”

며칠 전 헌왕의 작위를 박탈한다는 황제의 처결이 내려진 후, 가장 큰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안심했던 채신이었다. 한데 그보다 더 큰 산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참담한 심정으로 연주에게 다가간 채신의 목소리가 떨렸다.

“연주야, 오라비다. 눈 좀 떠 보려무나. 응?”

채신은 자면서도 눈물을 떨구는 연주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연주가 오석산의 부작용을 겪고 있다는 사실은 정엽의 서신을 통해 미리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두 눈으로 확인한 누이의 모습은 형용할 수 없이 참혹했다. 그간 헌왕을 징벌하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던 자신의 행동이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연주야…….”

“…….”

“연주야?”

목이 멘 채신은 조심스럽게 누이의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오늘도 패악을 부리다 겨우 안정을 찾은 연주는 약 기운에 취해 묵묵부답이었다.

정엽은 채신이 연주를 깨우려 애쓰는 동안 어제보다 상처가 깊어진 연주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몸부림칠 때마다 살갗이 밧줄에 쓸려, 그녀의 발목은 피멍으로 얼룩진 지 오래였다.

그 모습은 마치 올가미에 걸린 가련한 동물 같았다. 정엽은 저릿한 가슴을 억누르며 이를 악물었다.

“이제 말씀해 주십시오. 저도 연주의 상태를 제대로 알아야겠습니다.”

어떻게 해도 연주가 눈을 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누이의 상태를 확인하고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채신이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서 얘기하지.”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한동안 연주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던 정엽이 먼저 방 밖으로 나섰다. 채신은 정엽을 뒤를 따라 향경당 뜨락에 있는 백매화 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심정을 꾹꾹 억누른 채신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연주가 착란 증세를 보인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꼭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 겁니까?”

“저렇게 하지 않으면 밤이고 낮이고 밖으로 뛰쳐나가 눈에 보이는 흙이란 흙은 모두 파헤치고 다닐 거다. 그냥 두면 땅을 파는 것으로도 모자라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들보에 목을 매어 버리겠지.”

“그게 무슨…….”

“연주가 죽은 아이를 찾고 있다. 자꾸만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면서.”

“아이라고요…….”

채신은 끝내 누이의 상처를 보듬지 못했다는 사실에 절망해 입을 다물었다.

‘막내까지 가세해 연주가 웃는 날이 전보다 늘었기에 조금은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정엽은 마치 죄인인 양 고개를 떨군 벗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한참 말을 아끼던 그는 꽃송이가 드문드문 남아 있는 매화나무로 시선을 돌린 채 입을 열었다.

“호 태의 말로는 몸에 남아 있는 독을 완전히 제거하면 착란 증세도 해결될 거라고 하더군.”

“연주가 사고를 당한 지도 벌써 보름이 다 되어 가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지금까지 해독이 안 된 겁니까?”

“약효를 극대화하기 위해 오석산에 다른 약재를 섞어 먹인 모양이다. 하지만 헌왕이 뭘 섞었는지 순순히 이실직고할 리는 없고…….”

“전하, 그렇다고 연주를 이대로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폐하께서 헌왕의 작위를 거두셨지만, 나나 연주에 대해선 입을 다물고 계신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전하!”

황제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인 헌왕의 일이다. 그러니 정엽도 평해왕부도 이미 처결된 사건에 대해 더 문제 삼고 나설 수 없는 것이다.

사건 직후, 왕부에서 칩거하던 헌왕은 자신을 규탄하는 상주문이 빗발치자 뒤늦게 어전으로 기어 나왔다.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광대가 움푹 파인 몰골로 나타난 그는, 돌바닥에 무작정 이마를 찧어 대며 황제에게 죄를 청했다.

만신창이가 된 아들의 얼굴에 또다시 피가 흐르자, 황제 역시 더는 그를 외면하지 못하고 태의를 시켜 얼굴의 상처를 치료하게 했다. 그러곤 딸의 안위를 걱정한 평해왕의 상주문이 도착하기도 전에 헌왕의 작위를 박탈하고 근신을 명했다.

죄목은 엉뚱하게도 그간 영지 관리를 소홀히 했다는 것이었다.

“호 태의가 계속 왕부에 상주하며 연주의 상태를 지켜보고 있다. 신중하게 약을 쓰고 있으니 조금 더 지켜보자.”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지켜만 봐야 한단 말인가? 채신의 한숨이 깊어졌다.

“헌왕이 전하께 맞아 곤죽이 됐다기에 짐승만도 못한 일을 벌였다는 것쯤은 짐작했습니다.”

“…….”

“그래도 전하께서 연주를 구하셨다기에 다행이라고 여겼지요. 한데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차라리 제가 직접 나서서 헌왕의 사사(賜死)를 주장할 걸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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