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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수월-83화 (83/161)

83화.

연주는 아실의 도움으로 옷을 갈아입고 탕제를 마셨다. 그런 후 죽은 사람처럼 한동안 깊은 잠에 빠졌다.

순조롭게 몸을 회복하는가 싶던 연주는, 그날 밤 다시 고열에 시달렸다. 그녀는 얼음물과 침상을 오가며 호전과 악화를 반복했다. 지켜보는 모두가 가슴을 졸였다.

정엽은 의식이 있든 없든 저만 찾는 연주가 마음에 걸렸다. 그는 만사를 제쳐 두고 밤낮으로 연주의 머리맡을 지켰다. 이런 그의 노고를 알았는지, 연주는 열흘 만에 완전히 안정적인 상태로 접어들었다.

“전하, 군주마마는 이제 소인들이 돌볼 테니 잠시라도 눈을 붙이시지요.”

양해는 충혈된 눈으로 버티는 정엽을 말렸다. 이별하기 전에도 그랬지만, 그는 연주를 위해 많은 일을 하고도 지금껏 공치사 한번 늘어놓는 법이 없었다.

이번에도 손해만 볼지 모르니 몸이라도 챙기셔야 할 텐데. 자칫하다간 앓아누운 연주보다 간호하는 정엽이 먼저 세상을 하직할 판이었다.

“시끄럽다.”

석상처럼 앉아 있던 정엽이 양해를 나무랐다. 양해는 물러서지 않았다.

“호 태의도 군주께서 의식을 찾기만 하면 된다 하지 않았사옵니까. 군주께서 깨어나시면 바로 알려 드리겠사옵니다. 그러니 제발 좀…….”

“전하, 양 공공의 말이 맞습니다. 마마께서 깨어나시면 당장 전하부터 찾으실 텐데, 이렇게 초췌하신 모습을 뵈면 마음 아파하실 것이옵니다. 그러니 잠시라도 눈을 붙이시지요.”

정엽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아실이 양해와 합세했다. 하지만 외적과 전투를 벌이는 동안 졸음을 참는 데 이골이 난 정엽이었다. 그는 아무런 문제도 느끼지 못했다.

“됐다.”

“전하, 벌써 꼴이 말이 아니십니다. 군주께서 깨어나시자마자 도로 기함하는 꼴을 보고 싶으시옵니까?”

양해가 재차 반발했다. 모시는 주인을 닮아 덩달아 고집이 세진 그는 이제 정엽의 잔소리 정도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소인이 모시겠사옵니다. 얘들아!”

양해는 기어이 합문 밖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알았다. 알았으니 시끄럽게 굴지 마라.”

정엽은 양해의 소란에 질린 듯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따지고 보면 연주와 얼음물 속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벌써 여러 날이었다. 또 연주를 구해 낸 이래 제대로 쉰 적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예전의 연주는 저의 낯빛이 조금만 어두워져도 근심을 사서 하던 사람이 아닌가. 양해나 아실의 말이 조금도 그르지 않았다.

“열은 없군.”

생각을 정리한 정엽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연주의 이마를 짚었다. 열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아실에게 당부했다.

“왕비를 부탁한다.”

“……예, 전하.”

군주가 아닌 왕비. 울컥한 아실이 허리를 깊게 숙였다. 아랫것들이야 연주를 향한 그리움에 아직도 그녀를 왕비라 부르는 게 다반사였다. 그러나 정엽만은 한사코 군주의 칭호를 고집해 온 바였다.

드디어 우리 마마의 마음고생이 끝나려나. 희망을 발견한 아실은 이 일을 반드시 연주에게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정엽은 연주를 남겨 두고 발길을 돌렸다.

그 순간.

“어머나! 마마, 정신이 드시옵니까?”

아실의 들뜬 목소리가 정엽을 붙잡았다. 정엽은 곧장 연주의 곁으로 되돌아왔다. 연주는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있었다.

“이제 정신이 들어? 앞은 보이고?”

정엽은 연주에게 서둘러 말을 붙였다. 그런데 연주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무서운 꿈을 꾸다 깬 사람처럼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릴 뿐이었다.

‘경수당이 그렇게 낯선 곳은 아닐 텐데……?’

위화감을 감지한 정엽은 연주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연주는 정엽의 손길이 닿기도 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녀는 광기 어린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마, 마마?”

양해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반면 예전에도 이와 같은 연주의 모습을 본 적 있는 아실은 안색이 희게 질렸다.

연주는 충격으로 말을 잇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로 빠르게 침실을 훑었다. 오래지 않아 그녀는 제가 원하는 게 여기 없다고 확신했는지 이불을 박차고 침상에서 내려왔다.

“그런 차림으로 어딜 가려는 거야. 여긴 경수당이니까 안심해도 괜찮아.”

연주는 당장이라도 바깥으로 뛰어나갈 태세였다. 정엽은 맨발로 서성이는 연주의 손목을 급히 잡아챘다. 그러나 연주는 알 수 없는 말을 반복했다.

“아니야. 아기가 울잖아요. 우리 아기 울음소리야. 당장 찾아야 해요.”

눈을 희번덕거리던 연주는 갑자기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정엽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제 앞을 막아서는 궁인들을 모두 밀치고 기어코 궁전 밖으로 뛰쳐나갔다.

‘우리 아기라고……?’

정엽은 귀신에 홀린 것 같은 연주의 행동에 뻣뻣하게 굳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연주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실이 울부짖었다.

“전하, 한수에서 생긴 왕비마마의 병이 다시 도진 것 같사옵니다. 틀림없어요!”

아실은 연주를 쫓아 허위허위 밖으로 나섰다. 멍한 얼굴로 서 있던 정엽은 그제야 황급히 연주의 뒤를 쫓았다. 애써 외면했지만, 역시 연주는 욕조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맨발로 경수당 뜨락에 내려선 연주는 정처 없이 왕부를 배회했다. 사방을 헤집고 다니는 연주를 따라잡은 아실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외쳤다.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마마! 아기씨는 돌아가신 지 오래예요!”

하지만 연주는 아실의 말을 도무지 믿지 못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우리 아기가 나를 찾으며 울고 있는데 대체 무슨 헛소리야!”

연주는 버럭 화를 내며 계속 앞으로만 나아가려 했다. 갖은 실랑이 끝에, 그녀는 제 허리에 감긴 아실의 깍짓손을 억지로 뜯어냈다. 그런 뒤 자꾸만 앞길을 가로막는 아실을 힘껏 뿌리치고는 대숲 쪽으로 마구 뛰기 시작했다.

“아이쿠! 마마, 안 됩니다! 마마!”

돌바닥에 나동그라진 아실이 연주를 향해 소리쳤다. 그 순간에도 연주는 빠르게 멀어져만 갔다.

“아실, 너는 당장 호 태의를 데려와라.”

“예, 전하!”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지만, 정엽은 연주를 진정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대숲으로 달렸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숲속에 뛰어든 연주는 오솔길을 벗어난 지 오래였다. 그녀는 빽빽한 대나무 사이를 가로지르며 정처 없이 떠돌고 있었다.

“연주야! 채연주!”

애타게 연주를 부르던 정엽이 대숲 한가운데 멈춰 섰다. 그러나 연주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죽은 아이를 찾아 헤맬 뿐이었다.

한편, 정신없이 내달리던 연주는 아기 울음소리가 가장 크게 들리는 곳에 걸음을 멈췄다.

“아가, 여기 있니?”

연주는 땅바닥에 엎드려 맨손으로 흙을 파기 시작했다. 손끝이 헤지고 손톱이 뒤집혀도 모를 만큼 정신없이 구덩이를 팠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아이가 울다 지친 듯, 울음소리마저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어디 있니, 아가. 엄마 여기 왔는데. 너 어디 있어…….”

가슴이 새카맣게 졸아든 연주는 땅을 파헤치며 울음을 터뜨렸다. 아물어 가던 손의 상처가 다시 터졌는지 피에 엉긴 흙이 손을 끈적하게 더럽혔다. 그럼에도 연주는 계속 아이를 찾아 흙 속을 뒤졌다.

“대체 왜 이래!”

얼마 후, 정엽이 엉망이 된 연주를 찾아냈다. 그는 억지로 연주를 일으켜 세우고는 어깨를 움켜쥐고 거세게 흔들었다. 하지만 연주는 꿈을 꾸는 듯한 얼굴로 연신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우리 아이가 울고 있어요. 땅속에서 울부짖고 있다고요. 당신은 안 들려요?”

“……뭐?”

“아이가 나를 부른다고요. 땅속에서 꺼내 달라고 운다고. 왜 아무도 내 아이 울음소릴 듣지 못하는 건데?!”

연주는 갑갑해 미치겠다는 듯 정엽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갑자기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땅바닥에 귀를 대고 중얼거렸다.

“아가, 아가? 왜 울음소리가 안 들리지? 아가!”

연주는 구덩이 앞에 엎드려 다시 흙을 파고 귀를 갖다 댔다. 알 수 없는 행동을 반복하던 그녀는 이내 경멸에 찬 눈으로 정엽을 노려보며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이거 봐. 당신이 오니까 무서워서 아이가 숨어 버렸잖아! 당신이 또 죽이려 들까 봐 무서워서!”

“채연주.”

“당신, 나한테 거짓말한 거죠. 그렇죠? 우리 아이 멀쩡히 살아 있는데 세상에 괴물인 게 알려질까 봐 무서워서 숨겨 버린 거잖아!”

“…….”

정엽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연주를 바라보았다. 이토록 거침없이 분노를 쏟아 내는 연주는 처음 보거니와, 그녀가 끝내 미쳐 버린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제야 그는 혼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고통을 실감했다. 끝없는 절망에 소리 없이 무너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연주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그에게 눈물을 흩뿌리며 매달렸다.

“연랑, 제발 내 아이를 돌려줘요. 응? 내가 이렇게 빌게요. 다시는 당신 귀찮게 안 할게요. 사랑한다고도 안 할게요.”

“제발 그만해…….”

“나 혼자 조용히 키울게요. 키울 수 있게만 해 주세요. 네? 아니면 차라리 나도 아이랑 같이 버려 줘요, 제발. 그냥 나도 같이 버려 달라고!”

연주는 두 손을 싹싹 빌며 애원하다가, 그의 멱살을 움켜잡고 악을 썼다. 그럼에도 정엽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마지막엔 자그마한 주먹으로 그의 가슴팍을 마구 때리며 분풀이를 시작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식! 내 아이가 뭘 잘못했어! 왜 그랬어, 왜!”

아, 차라리 꿈이었으면.

정엽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한동안 악다구니에 시달리던 그는 연주의 혈 자리를 짚었다. 정신없이 원망을 퍼붓던 연주는 순식간에 의식을 잃었다. 그녀는 정엽의 품으로 맥없이 쓰러졌다.

휘이잉-.

일순 적막이 내려앉은 대숲에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마침내 봄이 온 줄 알았건만, 대숲에 부는 바람은 아이를 잃은 그해 겨울에 불던 것처럼 시리고 황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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