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연주를 고쳐 안은 정엽은 욕조 안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밤새 얼음물에 잠겨 있던 몸은 근육이 굳어서 영 제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을 짓누르던 근심거리를 내려놓은 덕분인지 이 정도 고통은 견딜 만했다.
“가자.”
정엽은 찬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 그대로 연주와 욕실을 나섰다. 두 사람이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침실에 들어서자, 안절부절못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던 궁인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전하, 안색이 좋지 않으시옵니다. 괜찮으십니까?”
“그래.”
“황후마마께서 호 태의를 보내 주셨사옵니다. 전하께서도 속히 진맥을 받으시는 것이…….”
양해의 호들갑에 덩달아 부산스러워진 궁인들이 재빨리 침실 안팎을 정리했다.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아실은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굴렀다.
“어찌 이런 일이…….”
아실은 파리하게 시든 연주의 얼굴을 확인하곤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자 연주는 정엽의 목을 바짝 끌어안은 채 모두를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
전에 없던 행동이긴 하지만, 지금 연주는 사람이라면 평생 겪고 싶지 않은 사고를 겨우 피한 상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존심 강한 여자에게 누군가의 동정 어린 눈길이 달가울 리 없었다.
생각을 정리한 정엽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양해, 궁인들을 모두 데리고 나가라. 호 태의 말고는 아무도 이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
“예? 예, 알겠사옵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양해는 궁인들을 재빨리 침실 밖으로 몰아냈다. 정엽은 방 안이 텅 빈 것을 확인하곤 연주를 침상에 내려놓으려 했다.
하지만 연주는 정엽을 부둥켜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며 그에게 바투 안겨 왔다.
“왜, 싫어?”
주변을 극도로 경계하던 연주는 정엽의 물음에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낯선 행동이었지만, 정엽은 뜨끈한 연주의 체온에 온 정신이 팔려 미처 이상을 감지하지 못했다.
“전하, 잠시 들어가겠사옵니다.”
“들어와라.”
결국 정엽은 연주를 품에 안은 채 침상에 걸터앉아 호 태의를 맞았다.
“아, 전하. 그…….”
침실로 들어선 호 태의는 실상 한 몸이 된 두 사람을 발견하곤 조금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군주마마를 바로 눕혀 주시지 않겠사옵니까?”
“이대로 진맥하게.”
지금 연주는 한시도 정엽과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상황이었다. 호 태의는 정엽의 단호한 태도에 밀려 앞으로 나아왔다. 그러곤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연주가 손목을 내어 주기만 기다렸다.
“군주마마……?”
하지만 연주는 요지부동이었다. 보다 못한 정엽이 연주를 달래듯 말했다.
“호 태의는 내가 영항에서 너를 데리고 나왔을 때 치료해 준 사람이니 믿어도 돼.”
연주는 정엽의 설득에도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느릿느릿 정엽을 안은 팔을 풀고 호 태의에게 왼쪽 손목을 내밀었다. 하지만 연주가 내민 손에는 여전히 큼지막한 도자기 파편을 움켜쥔 채였다.
“언제부터 파편을 손에 쥐고 계셨사옵니까? 출혈이 심하셨을 텐데요.”
엉망이 된 연주의 손을 조심스레 살피던 호 태의의 표정이 굳었다. 열을 내리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던 정엽의 마음 역시 놀랍고 참담했다.
“군주가 오석산에 중독된 것 같으니 우선 진맥부터 서둘러라.”
“오석산이라 하심은…….”
궁중의 분위기가 어수선했던 게 이것 때문이었나? 어젯밤 궁중의 태의들이 모조리 곽 귀비에게 불려 간 와중, 저 홀로 황후의 명을 받아 연왕부로 급파된 참이었다. 이유를 짐작한 호 태의가 진맥을 서둘렀다.
“…….”
신중하게 연주의 맥을 짚어 본 호 태의는 곧이어 연주의 체온을 가늠하듯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는 동공의 움직임까지 확인한 뒤에야 정엽을 향해 몸을 틀었다.
“어떤가?”
“전하께서 조치해 주신 덕분에 일단 큰 고비는 넘긴 것 같사옵니다.”
“그게 정말인가? 오석산에 중독되면 앞을 보지 못하게 되거나 미치광이가 된다고 들었네. 그것도 아니면…….”
정엽은 차마 절명이라는 말을 뱉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호 태의는 그가 무엇을 염려하는지 안다는 듯 침착하게 대답했다.
“오석산에 중독됐을 때 손쓸 새도 없이 절명하는 환자들은 오석산 복용 직후 뜨거운 음식을 먹거나 몸을 따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옵니다.”
“그런가?”
“예. 하여 당장 군주마마의 시력에는 이상이 없어 보입니다. 다만 머리에 문제가 생겼는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듯하옵니다.”
최소한 죽을 고비는 넘겼다는 말에 정엽이 안도했다. 그러나 호 태의의 전망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순 없사옵니다. 밤새 얼음물로 군주마마의 열을 떨어뜨리신 줄 아는데, 중독의 정도가 심하지 않다면 이쯤 완전히 신열이 내려야 정상이옵니다.”
“그 말은…….”
“군주께 여전히 미열이 있는 걸 보면 몸 안에 아직 독성이 남아 있다는 뜻이지요. 요즘은 약효를 오래 지속시키기 위해 다른 약재를 섞는 경우가 많은 줄 아옵니다. 언제 다시 상태가 나빠질지 알 수 없으니 계속 주의 깊게 지켜보셔야 하옵니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호 태의의 설명을 들은 정엽이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소신은 오석산을 해독하는 탕제를 지어 올리겠사옵니다. 군주께서 드신 약재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주재료가 오석산이 맞다면 효과가 있을 것이옵니다.”
“그럼 군주의 손은?”
“아, 군주마마의 손은…….”
호 태의는 여전히 경계심 가득한 연주의 눈빛을 확인하고는 난처한 듯 표정을 흐렸다.
“군주마마께서 오석산에 중독되신 것으로 미뤄 보아 여인이 견디기 어려운 일을 겪으신 듯하옵니다만, 타인을 저리도 경계하시니 자칫하면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어서…….”
“흐음…….”
고심하던 정엽이 호 태의가 들고 온 약상자를 발견하고 말했다.
“손은 내가 치료할 테니 필요한 것들을 놓고 가게.”
“알겠사옵니다. 처치에 필요한 연고와 도구들을 따로 챙겨 드리지요.”
호 태의는 즉시 약상자를 열고 정엽에게 필요한 물건을 꺼내 여분의 상자에 담았다. 그러곤 침상 머리맡에 그것을 올려놓은 뒤, 발소리를 죽여 침실을 떠났다.
이제 탕제가 도착하기 전에 손을 치료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연주와 단둘이 남은 정엽은 다시 그녀를 어르기 시작했다.
“손 아프지 않아?”
“…….”
“약 먹기 전에 손부터 치료하자.”
정엽은 연주를 달래 겨우 침상에 눕혔다. 그러고는 물속에 오래 있어 퉁퉁 불은 연주의 왼손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크고 날카로운 파편은 손바닥 깊이 박혀 있어서, 그것을 뽑아내자마자 벌어진 상처에서 선혈이 돋았다.
정엽은 솟구치듯 흐르는 피를 보고 깨끗한 무명천을 집어 들었다. 그는 연주의 손바닥을 천으로 덮고 지혈을 위해 지그시 눌렀다. 연주는 생살을 파고드는 고통에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모로 돌렸다.
‘아마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애쓴 흔적이겠지.’
금세 붉게 물든 천을 내려다보며, 정엽은 재차 헌왕의 파렴치한 행동을 상기했다.
‘그런 놈은 그냥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정엽이 분노를 삭이는 사이, 연주가 팔을 뒤틀며 고통스럽게 숨을 헐떡였다. 무의식중에 제 손아귀에 한껏 힘이 실린 모양이었다.
뒤늦게 연주의 반응을 확인한 정엽은 놀라 재빨리 악력을 풀었다.
“미안해. 조금만 참아.”
말을 마친 정엽은 크게 찢어진 연주의 손바닥 위에 지혈을 돕는 황단산(黃丹散)을 뿌렸다. 그런 뒤 능숙한 솜씨로 흰 무명천을 팽팽하게 감아 처치를 마쳤다.
“아, 옷……!”
그사이 연주는 오들오들 떨면서 곧 잠에 빠져들 것처럼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아무래도 젖은 옷 때문에 빠르게 체온을 앗겨 기력이 바닥난 듯했다.
뒤늦게 저나 연주나 흠뻑 젖은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정엽이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 옷이야 혼자 갈아입으면 그만이라지만, 여인인 연주의 옷을 갈아입히는 건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는 편이 좋았다.
그 순간.
“연랑…….”
연주가 멀어지려는 그의 손을 붙잡고 애처로운 목소리를 냈다. 더 말하지 않아도 어디 가느냐고, 가지 않으면 안 되냐고 사정하는 것만 같았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정엽은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연주의 행동에 홀린 듯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는 절박해 보이는 연주의 눈동자를 곧게 바라보며 약속하듯 말했다.
“옷만 갈아입고 돌아올게.”
“……정말요?”
“그래. 아실을 불러 줄 테니 그동안 너도 옷을 갈아입어.”
“고마워요.”
당연한 일을 할 뿐인데. 뭐가 그렇게 고마운지.
정엽은 묵직한 울림을 남기는 연주의 인사를 곱씹으며 깨끗한 이마를 한 손으로 쓸었다. 연주는 타인을 극도로 경계하던 아까와 달리, 그의 손길을 편히 받아들이며 순하게 눈을 깜빡였다.
연주가 제게 의지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정엽은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몇 년 만에 연랑이라는 애칭을 다시 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가장 힘든 순간에 나를 찾는 연주가 안쓰러워서일 뿐일까?’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정엽은 익숙하고도 낯선 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며칠 사이에 갑자기 달라진 연주의 태도가 의아하기는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간절하게 자신을 붙잡는 것은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처음부터 끝난 적이 없었는지도…….’
정엽은 이별한 뒤에도 연주와 자신이 서로에게 지독하게 얽매여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 이제 다 끝난 사이라고 떠들어 대면서도 틈만 나면 연주를 떠올리며 감정의 격랑에 휩쓸리곤 하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이게 다 후회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사람의 마음을 이토록 요동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를 자각하자마자 정엽은 언 땅이 녹듯 가슴 한구석이 평온해졌다. 기이한 일이었다.
“금방 올게.”
정엽은 어느덧 새근새근 잠든 연주의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연주에게서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하던 그는 이내 조용히 침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