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
정엽은 연주의 부름에 반응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외투를 벗어 흐트러진 연주의 행색을 가린 뒤, 서둘러 그녀를 안아 들었다.
정엽의 품에 안긴 순간, 연주는 심장을 태우는 듯한 열기에 휩싸였다. 그녀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혼절한 연주를 안고 달리는 동안, 정엽의 머릿속은 온통 의문으로 가득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했지?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
사냥터 오두막에서 돌아온 후,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연주와 제법 가까워졌다고 믿었다. 어쩌다 마주치면 당연하게 인사를 건네고, 시답지 않은 소리라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그렇게 서로 가까운 곳에서 잘 지내는 모습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한데 그런 여자가 또다시 제 품에 안겨 있었다. 이쯤 되면 하늘이 저를 농락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든 그의 인생에서 채연주라는 존재를 앗아 가기 위해서.
‘채연주만은 절대로 빼앗길 수 없어.’
정엽은 연주를 모두에게서 떨어뜨려 놔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지금 연주가 가장 안전할 수 있는 곳은 황후궁도 아니고, 세자부도 아니었다.
“마차는 내가 직접 몰겠다.”
“전하, 마차를 직접 모시다니요. 그게 무슨…….”
“내가 자네에게 이유를 설명해야 하나?”
“아, 아닙니다!”
지금은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정엽은 궁문 앞에서 대기 중이던 마차에 연주를 눕히곤 직접 말을 몰았다. 날 듯이 연왕부로 돌아온 정엽의 기세는 살기등등했다.
“비켜라.”
정엽은 의식이 없는 연주를 안고 왕부의 붉은 대문을 박찼다. 마치 앞길을 막는 것이 있다면 사람이든 물건이든 모조리 부숴 버릴 태세였다. 주인의 서슬 푸른 모습에 놀란 연왕부 궁인들은 겁에 질려 입을 다물었다.
“아니, 전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옵니까?”
이런 때 정엽에게 말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양해뿐.
주인의 귀환 소식을 듣고 냉큼 달려 나왔던 양해는 죽은 듯 늘어져 있는 연주를 발견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그가 서둘러 뒤를 따랐다. 심복의 기척에도 앞만 보고 걷던 정엽이 명령했다.
“빙고(氷庫)에 있는 얼음을 모두 가져오너라.”
“예? 예, 알겠사옵니다.”
양해는 얼음을 가지러 가기 위해 궁인들을 몰고 사라졌다. 그사이 정엽은 연주를 품에 안은 채 욕실로 들어섰다.
거대한 나무 욕조에는 찬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정엽은 돌아온 옷차림 그대로 연주와 함께 물속에 몸을 담갔다.
“으음…….”
온몸이 불덩이인 연주는 물에 잠기자마자 한기에 몸서리쳤다. 그녀는 파르르 몸을 떨며 본능적으로 온기를 좇아 정엽의 품을 파고들었다.
정엽은 헌왕이 벌이려 했던 불온한 행위와 연주의 비정상적으로 높은 체온으로 미루어, 그녀가 오석산에 중독된 거라고 확신했다.
오석산은 섭취 후 체온을 낮추는 것이 치료의 핵심인 약물. 그는 빨리 연주의 열을 내리기 위해 새빨갛게 달아오른 뺨과 이마를 연신 찬물로 닦아 주었다.
하지만 연주의 열이 얼마나 높은지, 욕조를 가득 채우고 있던 찬물은 금세 미지근하게 변했다.
“전하, 얼음을 가져왔사옵니다!”
그사이 헐레벌떡 빙고로 달려가 얼음을 모조리 꺼내 온 양해가 손마다 얼음통을 든 궁인들과 함께 욕실에 도착했다.
“가져온 얼음을 모두 욕조에 쏟아라.”
“예?”
열에 들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연주도 걱정스럽지만, 제 주인은 더더욱 걱정인 양해가 질색했다.
“전하, 이 얼음을 모두 욕조에 부었다간 전하께서 먼저 얼어 죽을지도 모릅니다!”
“잔말 말고 부어!”
정엽은 신경질적으로 버럭 소리쳤다. 한시가 급한 마당에 제 명에 토를 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다시 연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은 좀처럼 연주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알겠사옵니다. 모두 얼음을 부어라!”
언제는 군주마마를 멀리하고 미워하지 못해 안달하시더니.
양해는 뒤늦게 연주에게 눈이 뒤집힌 주인을 지켜보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궁인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다 욕조 안에 얼음을 쏟기 시작했다.
금세 얼음으로 가득 찬 욕조를 확인한 정엽이 재차 명령했다.
“내가 부를 때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마라.”
“전하, 군주마마의 신열을 내리려고 그러시는 거라면 차라리 궁인들에게 시중들게 하십시오!”
보다 못한 양해가 정엽을 말려 보았지만, 정엽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연주의 몸에 손을 대는 자가 있다면, 그게 누구라도 손목을 뎅겅 날려 버릴 것만 같았다.
“나가라.”
들끓는 분노를 반영하듯 정엽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양해는 냉큼 다른 궁인들을 먼저 피신시킨 뒤 당부했다.
“욕실 앞에서 대기할 테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부르십시오.”
양해는 마지막으로 욕실 문을 넘었다. 하지만 앞뒤 못 가리는 상태인 주인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그는 욕실 문을 실금처럼 열어 놓고 안쪽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를 알아챈 정엽이 마지막 경고를 던졌다.
“문을 닫아라.”
“예? 전하, 추우십니까?”
“양해.”
이러다간 연왕부에 딸린 식솔 전부가 피를 보고 말지.
살벌한 경고를 들은 양해는 결국 완전히 문을 닫았다. 원하던 대로 철저히 단절된 공간에 연주와 남게 된 정엽은, 그녀의 뜨거운 이마에 입술을 대고 체온을 가늠했다.
‘오석산에 중독된 자들은 극심한 오한과 열병에 시달리다 눈이 멀고 미치광이가 되어 절명한다고 합니다.’
불현듯 심각한 표정으로 오석산에 관해 설명하던 장명이 떠올랐다. 좀처럼 내릴 기미가 없는 연주의 체온에, 정엽의 마음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으음…….”
그런 정엽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주는 미약하게 신음을 흘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느라 인상까지 찌푸린 모습이 안쓰러웠다.
‘내가 수도에 돌아오지 않았으면 이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까.’
정엽은 힘겨워하는 연주를 달래듯 꼭 끌어안았다.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답이 없었다.
한겨울 칼바람보다 차가운 물속에 무력감과 자책감이 넘실댔다. 그렇게 멈춰 버린 사고는 머잖아 그의 기억 속에서 가장 평온했던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혼 따위 절대 하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마침내 문제의 시작점에 도달한 그는 처음으로 연주와 헤어진 일을 후회했다.
‘연왕은 연왕비와 생각이 같으냐?’
황제가 그의 의사를 물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건, 정말로 이별을 원해서가 아니었다. 단지 황제의 마음이 기울어 상황을 바꿀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연주가 아무리 감정적인 여자라도 아무런 각오 없이 이혼이란 단어를 입에 올릴 리 없었다. 정엽은 그저 황제와 연주의 마음을 돌릴 자신이 없었던 것뿐이었다.
‘그땐 그게 최선인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결과는 이 모양이다.
정엽은 분명 섣불리 이별을 결정한 연주를 원망했다. 그래도 연주가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는 모습이나 보자고 헤어짐을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그때 제가 침묵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연주가 황제의 사혼을 거부하며 영항에 갇히는 일도, 헌왕비의 계략에 목숨을 잃을 뻔한 일도, 오석산에 중독되는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운 좋게 이별을 피했더라도 언젠가 부부 사이에 위기는 찾아왔겠지만, 연주가 이렇듯 사경을 넘나들며 고달플 필요까진 없었으리라.
“항상 이렇게 엮이는 걸 보면, 좋은 방향은 아니더라도 우리가 인연은 인연인 모양이지.”
별것 아닌 우연조차 반복되면 필연이라고 하지 않던가. 정엽은 새삼 부부의 인연이 그리 쉽게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던 황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왜 늘 이런 식으로 엉망이 되어 버리는지는 모르겠지만.
“뭐라고 말 좀 해 봐.”
설령 평행선을 걷듯 서로 영영 맞닿을 수 없게 된다고 해도, 정엽은 연주가 자신의 품에서 숨을 거두길 원치 않았다. 아이의 죽음으로 연주와의 관계가 어그러졌을 때도, 연주가 이별을 고집할 때도 결코 바란 적 없는 일이었다.
“죽이고 싶지는 않을 만큼. 딱 그만큼 미워할 수도 있는 거라고 했잖아. 나도 그래.”
정엽은 오두막에서 연주에게 단도를 건넨 날을 떠올렸다. 살생과는 거리가 멀던 그 말간 얼굴. 그는 그때 누군가를 미워하면 죽이고 싶은 게 당연하지 않으냐 했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사람을 죽일 만큼 미워하지 못한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생을 미워한 아버지도, 나를 버리고 떠난 아내도 결국 죽이지 못했지 않은가.
“그러니까 죽으면 안 돼.”
정엽은 연주의 귓가에 간절히 속삭였다. 연주가 눈을 뜨기만 한다면, 그래서 저를 향해 다시 웃어 주기만 한다면 대가가 무엇이든 치를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연주는 밤새 고열과 오한에 시달렸다.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던 그녀가 안정을 찾은 것은 여명이 밝아 올 즈음이었다. 하지만 숨소리가 편해진 뒤에도, 연주의 발갛게 익은 볼은 전날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정엽은 연주를 끌어안은 채 얼음물 안에서 밤을 지새웠다. 팔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한기가 엄습했지만, 저보다는 연주를 향한 염려가 앞섰다. 그렇게 꿋꿋이 자리를 지키던 정엽은 완전히 동이 트고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좀 괜찮아?”
눈을 뜬 연주는 정신이 완전히 돌아오지는 않은 듯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저를 올려다보는 흐린 눈동자를 확인한 정엽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괜찮은 거야?”
“…….”
연주는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여전히 온기가 고픈 듯, 몸을 떨며 정엽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아직 열이 있는 것 같은데…….”
연주의 이마에 뺨을 맞댄 정엽이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어쨌든 정신은 돌아왔으니 큰 고비는 넘긴 건지도 몰랐다.
“나갈까?”
정엽의 물음에 연주는 이번에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