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아무것도 모른 채 숨이 턱밑에 차오를 때까지 정신없이 내달리던 연주가 힘겹게 종유궁의 문을 열어젖혔다. 평소 빗장이 질려 있어야 할 대문은 정말로 누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간 것처럼 아주 쉽게 열렸다.
“시양아, 시양!”
연주는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아 황량하기 짝이 없는 궁전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쉴 새 없이 공주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무너진 담장마다 잡초와 이끼가 무성한 궁전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고요했다. 애가 탄 연주는 결국 뽀얗게 먼지가 쌓인 꽃살문을 밀어 전각 안까지 발을 들였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응접실의 상석에는 혼례복처럼 새빨간 비단옷을 걸친 사내가 눈을 감고 바르게 앉아 있었다.
귀, 귀신?!
“으흡……!”
놀란 연주는 비명을 삼키며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자 죽은 것처럼 미동 없이 앉아 있던 사내가 두 눈을 부릅떴다.
“허, 헌왕 전하?”
뒤늦게 사내의 정체를 알아본 연주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헌왕의 오싹한 눈빛을 마주하고 본능적으로 위험을 직감했다.
연주는 서둘러 종유궁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돌려 전각 밖의 정문으로 달려 나갔다. 하지만 대문 앞에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헌왕의 하인이 종유궁의 빗장을 닫아걸고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그야말로 사면초가라. 종유궁 회랑 한가운데 멈춰 선 채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을 모아 쥔 연주는 헌왕에게 항의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뒤통수에 벼락같은 고통이 엄습하며 연주의 눈앞이 캄캄하게 변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불잉걸처럼 뜨거워진 몸을 느끼고 힘겹게 눈을 뜬 연주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좀 정신이 듭니까?”
좀 전의 충격 때문인지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이 몽롱하게 흔들렸다. 그 가운데, 허름한 침상에 걸터앉아 다정하게 미소 띤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는 헌왕이 보였다.
연주는 상체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목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몸이 불덩이가 되어서인지, 날개가 뜯긴 나비처럼 바르작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쉬잇, 그냥 누워 있으세요. 처음이라 많이 힘들 테니 그냥 본 왕에게 의지하면 됩니다.”
처음이라 많이 힘들 거라니. 제게 의지하면 된다니. 연주는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늘어놓는 헌왕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헌왕은 이미 연주의 생각을 다 안다는 듯,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힌 연주의 이마를 가볍게 쓸어내리고 그 위에 입을 맞췄다.
“……!”
헌왕은 마치 입술에서 느껴지는 모든 감각을 음미하듯 이마에서 눈꺼풀 위로, 뺨 위로 여유롭게 입맞춤을 흩뿌렸다. 지금껏 정엽 이외의 다른 사내에게 입맞춤을 허락해 본 적 없는 연주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소름에 이를 악물었다.
“……안 됩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여기를 빠져나가야 했다.
연주는 있는 힘껏 헌왕을 밀어냈다. 그러나 간신히 헌왕의 가슴팍 높이까지 들린 손은 좀처럼 힘을 쓰지 못했다.
“안 된다? 입맞춤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뜻입니까? 우리 군주께서 의외로 성급하시군.”
헌왕은 맥없이 제 가슴 위에 내려앉은 연주의 두 손을 한 손으로 그러쥐었다. 곧이어 연주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하나하나 깨물어 보던 그는, 그녀의 손등과 손바닥에 멋대로 제 입술을 비비며 짓궂게 희롱했다.
당황한 연주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하려 애썼지만, 팔다리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아 맥없이 헌왕에게 양손을 내어 주고 말았다.
이쯤에서 단순히 뒤통수를 얻어맞은 게 문제가 아님을 깨달은 연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러고 보니 입 안이 고운 모래를 씹은 것처럼 이상하게 텁텁했다.
“……대체 제게 뭘 먹이신 겁니까? 공주께서는 또 어디에 계시고요?”
연주는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는 심장과, 온몸을 태울 듯 솟구치는 열감에 몸서리치며 힘겹게 물었다. 헌왕은 잘 익은 복숭아처럼 발갛게 달아오른 연주의 뺨을 사랑스러운 듯 어르며 대답했다.
“본 왕이 특별히 불로장생의 영약을 선물했습니다. 그대는 내 신부가 될 소중한 사람이니까.”
“……!”
“아, 공주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 6황자의 처소에서 간식을 먹으며 놀고 있거든.”
6황자의 처소라니.
연주는 시양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만감이 교차했다. 하지만 공주를 위하다 제 눈앞에 닥친 위험은 알아차리지 못한 탓에 연주는 지금 헌왕과 한방에 있었다.
‘신부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연주는 저를 신부라고 칭하는 헌왕의 노골적인 태도에 기가 막혀 마주 앉은 그를 쏘아보았다.
입 밖으로 상스러운 말만 내놓지 않았을 뿐, 실상 그보다 더한 욕지거리를 퍼붓는 듯한 연주의 눈빛에 헌왕은 별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연주의 손을 얌전히 놓아주었다.
“그런 눈으로 볼 것 없습니다.”
“…….”
“본 왕도 군주를 곱게 왕부로 데려오려고 애를 많이 썼어요. 하지만 상황이 따라 주지 않으니 어쩌겠습니까?”
“…….”
“근사한 초방(椒房)은 아니지만, 자귀꽃으로 빚은 합환주를 준비했습니다. 또 군주의 체면을 위해 일부러 붉은 옷까지 입고 왔지요. 기왕이면 군주도 혼례복을 입었으면 좋았겠지만, 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상대방이 듣거나 말거나, 혼자만의 망상에 빠져 헛소리를 늘어놓는 헌왕을 노려보던 연주가 갈수록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기 위해 혀끝을 야멸차게 깨물었다.
이내 입 안에 비릿한 피 맛이 감돌자, 고통에 감각이 깨인 덕분인지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여기서 나가야 해. 지난번 뱃사공을 만났을 때처럼 비녀로 어디든 찌르면…….’
찰나에 적하 행궁의 호수에서 비녀를 이용해 위험을 피한 일을 상기한 연주가 조심스럽게 머리 타래 쪽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연주의 움직임을 발견한 헌왕은 놀라기는커녕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설마 또 비녀를 찾습니까? 적하 행궁에서의 일은 본 왕도 들어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머리에 꽂힌 장식부터 빼 두었지요.”
“……!”
“어차피 초야를 치르려면 풀어야 할 게 비녀뿐만이 아니지 않습니까. 미리 머리를 풀었다고 생각하면 그만입니다.”
초야라고? 당황한 연주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난색을 보이는 연주의 표정을 마치 예술 작품처럼 신중하게 감상하던 헌왕이 싱긋 웃었다. 그는 땀으로 젖은 연주의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넘겨주었다.
“…….”
연주는 헌왕의 손길을 거부하듯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침상 머리맡에서 첫날밤을 밝히는 화촉처럼 붉게 타오르는 황동 촛대가 눈에 들어왔다.
‘저걸로 헌왕의 머리를 내리치면 잠깐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을지도 몰라. 잘만 하면 기절시키고 도망을 칠 수 있을지도…….’
연주는 아까보다 나아지긴 했어도 여전히 둔하게 굴러가는 머리로 탈출 계획을 세웠다. 그런 뒤 단번에 촛대를 손에 넣기 위해 숨을 골랐다.
하지만 헌왕은 자신을 외면하는 연주의 모습조차 아름다운지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하고 연신 홀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면 참 얄궂지. 왜 하필 죽절잠이었을까.”
하나.
“소문엔 형님께서 대나무를 무척 좋아해서 연왕부에 아주 넓은 대숲이 있다던데…….”
둘.
“혹시 아직도 형님을 잊지 못해서 일부러 죽절잠을 꽂고 다니는 겁니까?”
셋.
퍼억-!
연주는 있는 힘껏 상체를 일으켜 촛대를 움켜쥐고 헌왕을 향해 휘둘렀다. 묵직한 무게를 자랑하는 황동 촛대는 정확히 헌왕의 뒤통수를 때렸다.
“윽……!”
한순간에 정신이 아찔해진 헌왕이 몸의 중심을 잃고 침상 아래로 쓰러졌다. 연주는 재빨리 침상에서 벗어나 제 것이 아닌 것 같은 몸을 이끌고 비틀거리며 문을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침실 문고리를 잡은 찰나, 어느새 뒤따라온 헌왕이 연주의 머리채를 잡아당겨 그녀를 거침없이 팽개쳤다.
와장창!
합환주가 놓여 있던 탁자 위로 엎어진 연주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예상을 뛰어넘는 연주의 거센 저항에, 헌왕은 분노로 눈이 뒤집혀 그대로 연주의 몸 위에 올라탔다. 인내심이 바닥난 그는 마구잡이로 연주의 옷섶을 헤치기 시작했다.
“싫어……!”
혀를 깨물어 정신은 돌아왔지만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는지 연주의 시야가 급격하게 흐려졌다. 마음이 급해진 연주는 희미한 시야 대신 손의 촉각에 의지해 바닥에 흩어진 술병의 잔해를 찾아 꽉 움켜쥐었다.
다행히 손바닥이 찢어지는 홧홧한 고통이 다시금 연주의 정신을 깨웠다. 그 순간.
콰앙! 우당탕! 쿵!
갑자기 문 쪽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굉음이 들리더니 연주의 몸 위에 엎드려 있던 헌왕이 침실 한쪽으로 내던져졌다. 그런 뒤 곧장 뼈가 부러지고 살이 으깨지는 끔찍한 소리가 빠르고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퍼억! 퍼억! 퍽-!
연주는 느릿느릿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바닥에 쓰러진 헌왕을 깔고 앉아 무시무시한 기세로 주먹을 휘두르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정……엽?’
정엽은 저와 별당에서 다툼을 벌였던 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흉포한 눈빛로 연신 주먹질을 해 대고 있었다.
얼마 후, 정엽에게 얻어맞을 때마다 사지를 바르르 떨며 고통스러워하던 헌왕은 어마어마한 정엽의 위력에 졸도라도 했는지 시체처럼 축 늘어졌다.
그럼에도 정엽은 헌왕을 패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주먹질을 멈추지 않았다.
“……연랑.”
그 모습을 위태롭게 바라보던 연주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정엽을 불렀다. 아까보다 맹렬하게 솟구치는 몸속의 열기에 금세 정신이 다시 가물가물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힘이 없는 연주의 목소리를 들은 정엽은 마치 주술에 걸린 것처럼 주먹질을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