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그렇게 얼마나 내달렸을까. 어느덧 막사에 도착한 연주가 먼저 땅에 내린 정엽의 품에 안겨 지상으로 내려섰다.
“말을 마장으로 데려가 쉬게 해라.”
“예, 전하.”
정엽에게 말고삐를 넘겨받은 순마사가 현표를 이끌고 마장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어딘지 불안해 보이는 연주의 표정을 확인한 정엽이 순마사를 다시 불러 세웠다.
“혹 연왕부에서 데려온 다른 말은 마구간으로 돌아왔느냐?”
“예, 돌아왔사옵니다. 지금 마장에 있는데 데리고 나올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정엽은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연주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연주는 그의 뜻을 알아들었다는 듯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주에게 낙월이 안전히 돌아왔다는 것까지 확인시켜 준 정엽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고 막사 앞까지 이동했다. 정엽과 나란히 막사 앞에 도착한 연주가 부드러운 얼굴로 정엽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오늘 고마웠어요. 감사의 표시로 이 외투는 내가 손질해서 돌려줄게요.”
“그래. 들어가.”
연주는 품에 안은 외투를 고쳐 안으며 돌아섰다. 처음으로 정엽에게 배웅이란 걸 받아 보는 그녀의 표정이 묘했다. 정엽은 연주가 완전히 막사 안으로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야 발길을 돌렸다.
잠시 후, 두 사람이 헤어진 자리로 심각한 얼굴을 한 헌왕이 걸어 나왔다. 헌왕은 멀어지는 정엽과 연주가 들어간 막사 쪽을 번갈아 바라보다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잠깐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연주에게 헌왕비를 대신해 잘못을 빌고, 그녀를 버릴 테니 제게 기회를 달라고 읍소할 생각으로 막사를 찾아왔던 헌왕이었다. 뜻하지 않게 계획이 꼬인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읍소 정도로는 어림도 없겠군.’
그 순간, 정엽과 연주가 함께 말을 타고 들어오는 모습을 다시 한번 상기한 헌왕의 표정이 매섭게 일그러졌다.
자신이 오랜 시간 공들여 쌓은 탑을 정엽이 한순간에 무너뜨렸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깊은 분노와 함께 등골이 오싹해지는 공포가 밀려들었다. 연주를 차지하기 위해 향산행을 자처하고, 세간에 염문을 퍼뜨린 것이 누구인지 정엽이 모를 리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승설군주가 끝내 내 차지가 되지 않는다면 지난번 연왕부에서 당한 것보다 더 큰 모욕을 당하게 되겠지.’
게다가 헌왕비가 연주를 해하려 한 일이 조만간 만천하에 알려지면, 정엽에게는 물론이요, 세상의 비웃음을 살 게 뻔했다.
‘이제 방법은 하나뿐이로군.’
헌왕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막사에 드리운 연주의 그림자를 오랫동안 노려보았다. 연주는 그림자 한 조각조차 아름다워서, 자꾸만 사람의 욕망을 부채질하는 힘이 있었다.
‘너를 반드시 소정엽에게서 빼앗아 올 것이다.’
음흉한 표정으로 그릇된 욕심을 꾹꾹 눌러 담은 헌왕이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 * *
며칠 후, 봄 사냥을 마친 황실 일가가 수도로 돌아왔다. 적하에서 수도로 귀환한 후, 빠르게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온 연주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공주의 서화 수업을 위해 소성궁을 찾았다.
오늘은 행궁에서 지내는 동안 글씨 연습을 열심히 한 공주에게 보상으로 나비 연을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한 날이었다.
‘공주가 이 나비 연을 보면 분명 좋아하겠지?’
연주는 공주가 나비 연을 날리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기분 좋게 소성궁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소성궁 안은 평소와 달리 뭔가 불길한 일이 있는 것처럼 어수선했다.
“공주마마! 어디 계시옵니까!”
“마마!”
궁녀들은 하나같이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궁전 곳곳을 뛰어다니며 공주를 찾고 있었다. 공주가 사라졌음을 직감한 연주는 황망한 표정의 궁녀 하나를 불러 세웠다.
“얘야.”
“군주마마 아니시옵니까? 아, 소인의 무례를 용서하시옵소서.”
공주를 찾는 데 정신이 팔려 연주가 도착한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던 궁녀가 연신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대체 무슨 일이냐?”
“저, 그것이…….”
“괜찮으니 말해 보아라. 자초지종을 알아야 나도 너를 돕든가 할 게 아니냐?”
우물쭈물하던 궁녀가 이내 연주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상궁마마님께서 잠시 한눈판 사이에 공주마마께서 사라지셨사옵니다.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다들 공주마마를 찾기 위해 이리 소성궁 곳곳을 뒤지고 있지요.”
공주는 평소에도 장난기가 많아 궁 안에서 숨바꼭질을 벌이며 궁녀들을 놀리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궁녀들이 저를 찾느라 난리가 났는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공주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공주께서 자주 가시는 곳은 모두 찾아보았느냐?”
“예, 마마.”
“혹시 또 작은 동물을 쫓아 후원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하시는 것은 아니고?”
“후원이라면 이미 저희가 한차례 수색을 하고 돌아온 참이옵니다. 황후마마께서도 이 사실을 아시고 덕교궁 궁인들을 시켜 정원을 비롯해 덕교궁 안팎을 모두 찾아보라 명하셨지요.”
덕교궁 안팎에도, 후원에도 없다? 그렇다면 공주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마음이 초조해진 연주가 입술을 짓이겼다.
곧바로 궁녀가 말을 이었다.
“지금은 황후마마께서 저희에게 공주마마께서 돌아올 때를 대비해 소성궁을 지키고 있으라고 명하셔서 처소 안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중이었사옵니다.”
“일단 알았다. 대체 공주께선 어디에 계신 건지…….”
“큰일은 없겠지요?”
“그럴 리가.”
연주는 궁녀를 향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별수 없이 공주를 향한 염려가 샘솟아 가슴이 밧줄에 묶인 것처럼 갑갑해져 옴을 느꼈다.
“이건 내가 공주마마께 드리려고 만들어 온 나비 연이니 잠시 맡겨 두마.”
“예? 예, 알겠사옵니다.”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연주는 가지고 온 나비 연과 얼레를 궁녀에게 맡기고 소성궁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방으로 뻗은 후궁의 대로에 선 연주는 황후궁과 후원을 제외하고 공주가 갈 만한 곳이 어디일지 고민했다. 우선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그게 어디든 필히 황후궁의 궁인들이 문을 두드릴 테니, 공주의 호기심을 끌 만한 외딴 장소를 추리는 게 급선무였다.
“공주가 가 보고 싶어 할 만한 곳. 그런 곳이…….”
기민하게 머리를 굴리던 연주는 평소 사람이 잘 다니지 않아 관리가 허술한 용화궁 근처를 시작으로 점점 외진 곳으로 들어갔다.
“공주마마! 어디 계시옵니까!”
“…….”
“시양아!”
연주는 애타게 공주의 이름을 부르며 황궁 곳곳을 누볐다.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고, 어쩌다 알은체하며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 해도 하나같이 공주를 찾는 덕교궁의 궁인들뿐이었다.
“아직 공주마마는 찾지 못한 것이냐?”
“예, 군주마마.”
“한데 너는 어느 쪽에서 오는 길이냐?”
“북쪽 우물이옵니다.”
궁인들에게 ‘북쪽 우물’이라고 불리는 하계정(夏啟井)은 황궁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우물이었다.
‘차라리 어디서 놀다가 잠들어 있는 거라면 좋을 텐데…….’
혹시 공주가 이미 좋지 않은 일에 휘말려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생각에 연주의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그렇게 연주가 공주를 찾아 헤매느라 거의 정신이 나가 있을 무렵, 등 뒤에서 웬 궁녀 하나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혹시 막내 공주마마를 찾고 계시옵니까?”
“그래, 맞다.”
“소인이 좀 전에 막내 공주마마를 뵈었사옵니다.”
시양을 봤다고? 마음이 급해진 연주가 궁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마주 선 궁녀의 얼굴은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한데 너는……?”
“소인을 기억하시옵니까? 소인, 예전에 소성궁에서 일하던 석춘이옵니다.”
“아, 그래, 석춘! 오랜만이로구나!”
석춘이라는 이름을 듣고 그녀를 알아본 연주가 뒤늦게 반가움을 표했다. 석춘은 한때 소성궁에서 일하던 궁녀였으나, 청소 중 황제가 공주에게 하사한 백옥 기린을 깨뜨리는 바람에 그 벌로 소성궁에서 내쳐진 처지였다.
하지만 소성궁에서 일하던 궁인이라면 누구보다 확실하게 시양을 알아보았을 거라는 생각에 연주의 마음은 점점 더 급해졌다.
“상황이 다급하니 회포는 나중에 풀자꾸나. 어서 말하거라. 공주마마를 어디서 뵈었느냐?”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에 공주마마께서 종유궁에 들어가시는 것을 보았사옵니다.”
“종유궁이라고……?”
생각지도 못한 장소의 이름에, 연주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종유궁은 후궁 동쪽 후미진 곳에 있는 전각으로, 황제의 후궁인 장재인이 머물던 곳이었다. 하지만 장재인이 하룻밤의 성총으로 2황자를 낳고 갑자기 석가산 꼭대기에서 실족해 죽은 뒤로, 종유궁은 오랫동안 폐쇄되어 있었다.
텅 빈 궁전에서 죽은 장재인의 혼령을 보았다거나, 어미를 잃고 어린 나이에 요절한 2황자의 울음소리를 들었다는 식의 괴상한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이다.
정말 공주가 종유궁에 있을까?
연주는 잠시 석춘의 말을 의심했지만, 지금은 작은 실마리 하나라도 소중한 때였다.
“일단 알았다. 너는 당장 이 사실을 덕교궁에 알려 다오.”
“예, 마마.”
연주는 석춘에게 뒤를 부탁하고 곧장 종유궁으로 향했다. 하지만 연주의 부탁을 받고 돌아선 궁녀의 얼굴은 흡사 음모를 꾸미는 악인의 얼굴처럼 야릇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