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78화 (78/161)

78화.

찌르라고?

얼떨결에 손에 칼을 쥔 연주가 흔들리는 눈으로 정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정작 연주의 손에 시퍼런 칼날을 쥐여 준 정엽의 표정은 감정이 모두 씻겨 나간 것처럼 섬뜩했다.

“이 칼로 심장을 찌르려면 네가 가진 힘을 모두 쏟아야 해.”

“…….”

“자신이 없으면 목을 긋든지.”

정엽은 사람을 죽이는 방법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떠들었다. 연주는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쳐 저도 모르게 울상을 지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정엽의 몸 어디에선가 피가 흐른다고 상상하니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죽는 것보다 죽이는 게 쉬워.”

“…….”

“어서.”

말을 마친 정엽은 연주의 손을 가볍게 그러쥐고 칼끝으로 제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매끄러운 검은 비단 위에 성에꽃 같은 주름이 졌다.

“…….”

연주는 날카로운 칼끝과 정엽의 눈을 번갈아 보았다. 그녀는 거의 흐느끼듯 숨을 몰아쉬다가, 결국 단도를 땅에 내팽개쳤다.

툭-. 바닥에 떨어진 단도는 연주의 마음처럼 무른 소리를 냈다.

‘역시나.’

예전부터 정엽은 세상에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건 오직 연주뿐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대로 칼 하나 똑바로 쥐지 못하고 바들바들 떠는 연주를 보고 나니 어딘지 모르게 안심이 됐다.

정엽은 땅에 떨어진 단도를 칼집에 갈무리하고는 웃음을 숨기며 입을 열었다.

“밉다면서. 왜 찌르지도 못 해?”

“사, 사람이 밉다고 아무렇지 않게 칼로 찌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정엽에게서 몸을 돌린 연주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다 말고 버럭 화를 냈다. 정엽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럼 미워하는 게 아니잖아. 미운 사람은 죽이고 싶은 게 당연한 거 아니야?”

“그냥 죽이고 싶지 않을 만큼만 미워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알다가도 모르겠군.”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마구 내뱉던 연주는 일말의 동요도 없는 정엽을 이상한 생물처럼 쳐다보았다.

정엽은 장수이니 살육에 무척 익숙하다는 사실쯤은 연주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운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하는 마음이 당연한 거라니.

이 대목은 어쩐지 정엽이 진심으로 저를 죽이고 싶을 때가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고민하던 연주는 정엽의 삐뚤어진 생각에 제동을 걸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를테면 황제 폐하와 당신 같은 사이도 있잖아요. 폐하께선 당신을 미워하지만 정작 당신 손에 직접 피를 묻히기는 두려워하시니까…….”

“풋. 모르는 소리.”

“……그게 무슨 뜻이에요?”

정엽의 알 수 없는 반응에 당황한 연주가 그의 표정을 살폈다. 정엽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자객들의 습격에 시달렸어. 궁정 안에서는 물론이고 출정에 오르는 길에서조차 몇 번이나 암살의 위협이 있었지.”

“아…….”

“내가 전쟁터에서 적군이 아닌 아군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신 모후께서는 사가인 성국부 사병을 군사로 위장시켜 나를 보호하셨어. 그게 지금 연왕부에 있는 용무군의 전신이고.”

“그런 거였군요.”

연주는 생전에 늘 제게 다정하게 웃어 보이던 시모의 모습을 떠올렸다. 자식을 살리기 위해 사병을 군사로 위장시켜야 했을 만큼 간절했던 시모의 마음을, 연주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건 어쩌면 부황을 향한 모후의 마지막 부탁이자 경고였을 거야. 사실 모후께서 붙여 주신 사병의 숫자는 열 명 남짓에 불과했거든. 부황께서 마음만 먹으시면 언제든 쓸어버리고도 남을 만한 전력이지.”

“…….”

“어쨌든 그 후론 부황께서 나를 대놓고 건드리시진 않더군. 그뿐이야.”

“그런 내막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생각지도 못한 얘기를 듣게 된 연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거운 이야기 때문인지 오두막 안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가라앉았다.

아버지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기분은 대체 어떤 것일까. 연주로선 상상하기조차 어렵지만, 그간 필요 이상으로 험난한 생을 살아온 정엽에게 인간적으로 작은 위로나마 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당신이 매번 위험에서 살아 돌아온 건 절대로 우연이 아닐 거예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당신은 용손이잖아요. 그러니까 오늘도 이렇게 소나기가 내리는 것 아니겠어요?”

연주는 천연덕스럽게 고개까지 기울여 가며 정엽을 새초롬하게 쏘아봤다. 마치 오늘 소나기를 만나 고생하게 된 게 다 그의 탓이라는 듯한 태도였다.

“하여간 엉뚱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연주의 농담에 헛웃음을 터뜨린 정엽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곤 한숨을 쉬며 타박하듯 말을 이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진짜 믿어?”

“왜 못 믿어요? 사천감에서도 그런 예언을 올렸고, 당신이 있는 곳에 눈과 비가 자주 내리는 것도 사실이잖아요. 그런데, 정말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예요?”

“나도 몰라. 아주 어렸을 땐 내가 비를 내리게도 하고 그치게도 했다는데, 지금은 전혀 기억에 없어.”

“그럴 리가.”

통 못 믿겠다는 듯 뾰로통한 표정을 짓던 연주가 비바람에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바깥을 건너보았다. 문밖에선 여전히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정말이야. 어쩌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비가 내리는 것 같긴 한데, 늘 그런 것도 아니야. 그냥 우연이 겹친 것뿐이겠지.”

“그렇지만 당신이 어려서 서쪽으로 출정을 나갔을 땐 사막에서도 벼락이 치고 비가 내렸다고 들었어요. 또 백융과 전쟁을 치를 땐 갑자기 눈보라가 몰아쳐서 적들이 물러갔다는 얘기도 들었고요.”

“우연이야, 우연.”

정엽은 손사래까지 쳐 가며 세간에 떠도는 소문을 부인했다. 물론 정엽이 어떤 식으로 반응하든 연주가 사실 여부를 확인할 방법은 없었지만, 위화감 없이 대화에 녹아든 그녀는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럼 당신이 용손이 아니라는 얘기를 왜 황제 폐하께 하지 않아요?”

“내가 그런 얘길 한다고 부황께서 믿기나 하실 것 같아?”

“그건 그렇지만…….”

“어차피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믿고 싶은 대로만 생각할 뿐이야. 또 용손이라는 별칭은 의외로 변방에서 쓸모가 있으니까.”

적진의 장수가 전장에 용손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퇴각을 결정했던 일화를 떠올린 정엽이 웃으며 말했다.

“비와 구름을 부리는 용손이 있다고 하면, 외적들이 함부로 싸움을 걸지 못하거든.”

“음,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결국 용손이라는 허명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 이유조차 제국의 안녕과 연관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대체 이 남자가 황자로서 가진 책임감의 깊이는 어디까지일까?’

연주의 고민이 깊어졌다. 오만해 보이기까지 하던 정엽의 긍지가 황제의 적장자라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고만 생각했던 그녀였다.

한데 정엽의 긍지가 제국의 평화에 이바지했다는 자부심의 결정체였다는 걸 알고 나니 그가 새롭게 보이기도 했다. 그런 정엽이 무척 멋지다고 생각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씁쓸한 깨달음이 밀려들었다.

자신이 설령 이혼을 택하지 않았더라도, 이 남자의 마음속에 제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었을 거라는 게 그것이었다.

‘내가 미워서가 아니라,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정엽의 마음이 온통 다른 것으로 가득 차서 내 사랑을 받아들일 공간이 없었던 것뿐이야.’

그렇게 결론짓고 나니 제 사랑을 외면했던 정엽을 향한 원망이 조금은 수그러들었다. 정엽으로 인한 상처는 여전히 쓰라리지만, 앞으로 더는 스스로 자책하며 괴로워할 필요가 없으니 그것만은 안심이었다.

내 사랑이 실패했다는 사실까지 담담하게 받아들이긴 어렵지만, 아물 기미조차 없이 매일 덧나기만 하는 상처를 끌어안고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흉터를 안고 사는 편이 나았다.

‘마음에 딱지가 앉는다는 건 딛고 일어섰다는 뜻이니까…….’

언제든 다시 일어나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연주가 자신의 아픔을 되돌아보는 사이, 소나기가 그치고 말갛게 얼굴을 씻은 태양이 지상을 비추기 시작했다.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는 연주를 말없이 응시하던 정엽은 어느 순간부터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밖을 살폈다. 먹구름이 깨끗하게 치워진 하늘에는 붉은 노을이 넘실대고 있었다.

“이만 돌아가지. 외투는 덜 말랐으니까 담요를 두르고 나와.”

“알았어요.”

연주는 사용한 이불과 집기를 깨끗하게 정리하고는 아직 뜨겁게 타오르는 화로에 물을 뿌려 불을 껐다. 그러곤 어깨에 담요를 두른 뒤, 아직 마르지 않은 자신의 외투와, 횃대에 걸어 놓은 정엽의 외투를 모두 챙겨서 오두막 밖으로 나왔다.

그사이 정엽은 말안장에 남은 빗방울을 말끔히 털어 낸 뒤, 비를 맞아 고생한 애마의 목을 쓸어 주며 달래고 있었다.

연주는 들고 나온 외투 두 장을 겹쳐 돌돌 말아 품에 안고, 혹시 근처를 헤매고 있을지도 모르는 낙월을 찾아 목을 길게 빼고 까치발까지 돋우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런 연주를 잠시 지켜보던 정엽이 재촉하듯 말했다.

“아무래도 낙월은 알아서 막사로 돌아간 것 같으니 해가 지기 전에 서두르지.”

“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연주는 정엽의 도움을 받아 보통의 군마보다 몸집이 배는 큰 정엽의 애마에 올랐다. 이리로 올 때와 달리 연주가 말 위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것을 확인한 정엽은 날렵하게 말 등에 올라타 연주를 감싸듯 안고 말고삐를 잡았다.

“현표, 가자.”

주인의 신호를 받은 말은 영리하게 진흙탕을 피해 숲길을 내려갔다. 이윽고 제게 익숙한 초원에 다다른 말은 시원하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말이 달리는 속도가 빨라지자, 정엽은 연주의 몸이 심하게 흔들리지 않도록 가슴을 곧게 세워 그녀의 등을 단단하게 받쳤다. 연주는 정엽의 배려 속에 오랜만에 짜릿한 속도감을 만끽했다.

봄치고는 아직 바람이 차가웠지만, 정엽의 뜨거운 체온이 온몸을 덥혀 주니 해방감과 안전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어느새 연주의 얼굴에 웃음꽃이 화사하게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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