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따가운 빗방울을 맞으며 숲속 깊은 곳까지 정신없이 말을 몰고 들어간 정엽은 아담한 오두막집 앞에서 말을 멈췄다.
“내리지.”
연주를 말에서 먼저 내려 준 정엽이 뒤이어 훌쩍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런 후 연주의 손을 잡고 오두막집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생각보다 넓은 오두막 안에는 침상과 탁자, 의자를 비롯한 가구와 침구, 그릇, 화로 같은 기본적인 세간살이가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당장 이곳에서 며칠 묵는다고 해도 아무 문제 없겠네.’
비록 한 칸짜리 집에 불과했지만, 연주는 생각보다 아늑한 분위기에 마음이 편해져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동안 정엽은 호주머니에서 부싯돌을 꺼내 등롱 속 촛대에 불을 댕긴 후, 방 한가운데 있는 화로에 숯을 담아 불을 피웠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아. 외투부터 벗고.”
정엽은 자기 입술이 파랗게 질린지도 모른 채 오두막집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살펴보느라 정신이 없는 연주를 침상으로 끌어다 앉혔다. 그러곤 두꺼운 이불과 담요를 모두 꺼내 젖은 외투와 목에 두른 영건(領巾)을 벗은 연주의 어깨에 둘러 주기 시작했다.
“내가 할게요.”
연주는 오늘따라 이상하게 저를 챙기는 정엽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다, 이내 젖은 몸을 떨며 이불을 끌어다 덮었다.
“조금만 기다려. 찻잎은 없지만 뜨거운 물이라도 마시면 좀 나을 거야.”
말을 마친 정엽은 마치 제 집을 돌아다니듯 익숙하게 주전자를 찾아 오두막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 오두막 근처에 샘물이 흘러 고이는 곳이 있는지, 정엽은 잠시 빗속에 주저앉아 있다가 금세 주전자를 채워 돌아와 화로 위에 올렸다.
그런 뒤 정엽은 안에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엎어 놓은 찻잔 두 개를 똑바로 세우고, 물이 끓기를 기다렸다.
“당신도 옷이 다 젖었어요.”
“괜찮아.”
“괜찮긴요. 그러다간 날이 밝기도 전에 감기에 걸릴 거예요.”
홀로 이불을 싸매고 있는 게 민망해진 연주는 별수 없이 정엽을 걱정했다. 연주의 잔소리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정엽은 결국 흠뻑 젖은 외투를 벗어 벽에 걸린 횃대에 건 뒤, 탁자 옆 의자에 걸터앉았다.
‘황실 자제들은 옷을 입고 벗는 일조차 궁인들의 시중을 받는 게 일상일 텐데.’
연주는 생활감 넘치는 정엽의 행동을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왕부 안에서는 정엽도 다른 황자들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지만, 그에게 이런 모습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연주였다.
보글보글.
이윽고 주전자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리자 정엽은 찻잔에 뜨거운 물을 담아 연주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연주는 따뜻한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작게 웃어 보였다. 정엽은 처음 만난 사이처럼 새삼스럽게 인사를 건네는 연주를 향해 피식 웃고는 그녀와 나란히 침상에 걸터앉았다.
호로록.
연주는 뜨거운 물을 여러 차례 나눠 마시며 천천히 몸을 녹였다. 변변한 찻잎 한 장 띄우지 않은 맹물이지만, 물 한 모금이 품은 열기에 추위로 얼어붙었던 몸이 마법처럼 풀렸다.
‘이제 좀 몸이 따뜻해지는 것 같네.’
따뜻한 물을 마셨기 때문일까. 온몸을 포근하게 감싼 이불 속에는 기분 좋은 온기가 감돌았다.
바깥은 여전히 굵은 빗방울이 들이쳐 소란한데, 오두막 안은 따뜻하고 고즈넉하기만 하니 꼭 일부러 오두막으로 나들이를 나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봄비의 정취에 흠뻑 빠져들어 마음이 한결 풀어진 연주가 정엽에게 편하게 말을 붙였다.
“사냥터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어떻게 바로 이리로 온 거죠?”
“폐하의 경호를 위해서 사냥터 안의 지형지물은 모두 파악하고 있었어. 본래 사냥터 안에 지어진 오두막은 사냥을 나온 황족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위급한 상황을 피하려고 만든 곳이지만, 관리를 철저히 하지 않으면 자객이 숨어 있기에 딱 좋은 환경이니까.”
“아아…….”
결국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얻어진 요령이라는 뜻이었다. 한때 일밖에 모르는 정엽을 서운하게 여겼던 연주는 예전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마음을 졸였나 싶어 허탈해졌다.
“나도 참…….”
연주가 실없이 웃자 정엽은 의아하다는 듯 눈썹 한쪽을 설핏 치켜올렸다.
“왜 그렇게 웃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나저나…….”
“음?”
“낙월은 어쩌죠? 비를 피하느라 바빠서 미처 그 아이를 데려오지 못했는데.”
이 상황에 사람도 아닌 동물 걱정이라니. 정엽은 이런 연주의 행동이 황당했지만, 한편으로는 지극히 채연주답다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알아서 잘 찾아올 거야. 똑똑한 녀석이니까. 네 체취를 맡고 여길 찾아오든, 막사로 돌아가든.”
“그럴까요?”
“그래.”
“그럼……. 낙월은 똑똑한 아이니까 앞으로 잘 좀 챙겨 줘요. 아까 산책 나왔을 때 보니 평소에 먹을 것도 제대로 챙겨 주지 않은 것 같던데.”
연주는 산책하는 내내 바구니 안에 든 간식을 탐내던 낙월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시무룩하게 말했다.
“아무리 잘 챙겨 줘도 그 녀석이 안 먹고 고집을 부리는 거야. 연왕부에서도 그 녀석의 고집 때문에 처치 곤란이니까 이참에 네가 세자부로 데리고 가도록 해.”
“내가요?”
뜻밖의 제안에 놀란 연주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곤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졌다.
아주 귀한 혈통의 한혈마라는 사실을 제외하더라도, 낙월은 연주에게 여러모로 의미가 남다른 아이였다. 그러니 데려갈 수만 있다면 누구보다 연주 자신이 가장 기쁘리라.
하지만 낙월이 소중한 만큼 세자부에서 말을 위한 최고의 환경을 갖춰 줄 수 있을지는 선뜻 판단이 서지 않았다.
연왕부에는 넓은 대숲과 마장이 딸린 넓은 군영이 있어 낙월이 안전하게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 충분하지만, 세자부에는 마구간 외에 말을 위한 공간이 따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으음, 마음 같아서는 세자부로 데리고 가고 싶지만, 세자부에는 낙월을 위한 공간을 만들기 어려워요. 만든다 해도 연왕부에 비하면 형편없을 테니 낙월도 불편할 거고요. 지금처럼 연왕부에서 계속 돌봐 주면 안 되나요?”
“낙월은 너 때문에 성격이 비뚤어져서 웬만한 사람은 감당 못 해. 정 세자부로 데려갈 수 없으면 네가 종종 연왕부에 들러 돌봐 주든지.”
“그래도 돼요?”
정엽의 제안에 반색한 연주가 정엽을 향해 돌아앉았다. 연주는 마치 세상에 둘도 없는 귀한 선물을 받은 사람처럼 눈을 반짝이며 터질 듯 말 듯 벅찬 미소를 지었다.
“고작 말 한 마리 가지고 뭘 그렇게…….”
생각보다 격렬한 반응에 어쩐지 무안해진 정엽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뭐, 연왕부가 못 올 곳도 아니잖아?”
“고마워요!”
“고맙다는 소리 한번 듣기 쉽군.”
연주는 정엽의 퉁명스러운 대꾸에도 예쁘게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다 식은 찻잔을 기울이며 행복한 상상에 빠졌다. 연주의 밝은 미소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끌어 올린 정엽은 예전처럼 숨김없이 감정을 드러내는 연주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
그런데 어여쁘게 웃는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거무튀튀한 상처가 정엽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우아하게 뻗은 가녀린 목덜미에 남은 흔적은 그날 범인이 남긴 손자국이었다.
‘아직도 멍이 남아 있을 정도면 꽤 위험천만한 상황까지 몰렸단 뜻인데…….’
멍 자국 하나에 가슴 한편이 서늘해진 정엽은 굳은 표정으로 연주를 응시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전혀 모르는 연주는 앞으로 낙월에게 해 주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손으로 꼽아 가며 순진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날도 이렇게 멍이 들었나?’
정엽은 힘 조절 없이 연주를 몰아붙였던 그날을 떠올리고는 찜찜함에 주먹을 말아 쥐었다. 한번 죄책감이 들기 시작하자 저 자신이 세상에 둘도 없는 불한당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날은 채연주가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바람에 화가 나서 그런 것뿐이야.’
아무리 그날 별당에서 연주가 쓸데없는 말로 제 화를 돋웠기 때문이라고 합리화해 봐도 불편한 마음은 그대로였다. 홀로 고민하던 정엽은 이런 꺼림칙한 감정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한데 말이야.”
“네?”
“지난번엔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늘어놓은 거야?”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정엽의 질문에 당황한 연주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이제 와 나를 상처입히는 당신이 미웠기 때문이라고 말하기에는 어쩐지 때와 상황이 맞지 않는 듯했다.
무엇보다 정엽 덕분에 이렇게 안락한 곳에서 소나기도 피하고, 낙월을 계속 볼 수 있는 기회도 얻지 않았는가. 쓸데없는 말을 해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신경 쓸 거 없어요. 그냥…….”
그러나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얼버무리기엔 그날의 모욕이 여전히 마음속 깊이 상처로 남아 있었다. 연주는 말끝을 흐리며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괜찮으니까 말해.”
정엽은 잘생긴 얼굴을 삐뚜름하게 기울이며 포기하지 않고 연주의 마음을 흔들었다.
“왜 아무 말도 못 해? 내가 미워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잖아.”
“…….”
연주는 도무지 의도를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정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역시 모든 걸 알면서도 일부러 모진 말로 저를 괴롭혔다는 생각에 다시금 화가 치솟았다.
반면 제 예상대로 연주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확인한 정엽은 늘 패용하고 다니는 허리춤의 단도를 꺼내 연주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내가 그렇게 미우면 이걸로 어떻게든 해 보든지.”
말을 마친 그는 칼집에서 거침없이 칼을 뽑아 연주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러고는 날카로운 칼끝을 정확히 심장이 뛰고 있는 제 가슴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찔러 봐, 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