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그날 오후, 점심 식사를 마친 황제는 종친과 귀족들을 이끌고 사냥을 떠났다. 주요 인사들이 모두 떠나고 난 막사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눈에 띄게 한산했다.
공주가 처소로 무사히 돌아간 것을 확인한 후 막사로 돌아온 연주는 낙월이 좋아하는 사과와 당근, 얼음 설탕으로 가득 채운 바구니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자, 이제 가 볼까?”
기분 좋게 낙월에게 사과 한 조각을 건넨 연주는 말 등에 오르는 대신 느릿느릿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사박사박 고즈넉한 소리가 기분 좋게 귓가를 간지럽히고, 발밑에 납작 몸을 눕힌 풀잎에서는 싱그러운 풋내가 물씬 올라왔다. 또 시시각각 제멋대로 방향이 바뀌는 바람에서는 시원한 편백나무의 향취가 느껴지기도 하고, 은은한 진달래 향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목적지 없는 여행자처럼 내키는 대로 들판을 걷고 있자니, 어느새 막사는 멀어져 흔적도 없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제는 끝없이 펼쳐진 초록색 지평선만이 연주를 반겼다.
“낙월, 너도 좋지?”
연주는 탁 트인 풍경 앞에 잠시 멈춰 서서 가슴 깊이 맑은 공기를 들이마셨다. 후련하게 숨을 뱉은 연주는 뒤따라오는 낙월을 향해 돌아서서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하지만 낙월은 주변의 경치가 얼마나 아름답든 연주가 들고 나온 바구니를 킁킁거리며 간식에 온 신경을 쏟을 뿐이었다.
“설마 산책보다 간식이 더 좋은 거니?”
맑게 웃음을 터뜨린 연주는 바구니를 열어 사과와 얼음 설탕 몇 조각을 비상식량 삼아 여분의 주머니에 덜어 담았다. 그러고는 여전히 간식으로 가득 찬 바구니를 낙월의 주둥이 앞에 내려놓았다.
간식 바구니가 열려 있는 것을 확인한 낙월은 오랫동안 굶주린 것처럼 바구니에 코를 박고 간식을 으적으적 씹어 먹었다.
“천천히 먹어. 뺏어 먹지 않을 테니까.”
연주는 간식을 먹는 데 정신이 팔린 낙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런데 너무나 맛있게 간식을 먹는 낙월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덩달아 저도 입이 심심해졌다. 저도 모르게 입 안에 침이 고인 연주는 주머니에서 달콤한 얼음 설탕 한 조각을 꺼내 입에 물고 살살 혀끝으로 굴렸다.
낙월은 바구니에 든 사과와 당근, 얼음 설탕을 열심히 우물거리다가, 연주가 얼음 설탕 한 조각을 다 녹여 먹기도 전에 말끔히 바구니를 비우고는 걸음을 뒤로 물렸다.
“이제 됐지? 간식은 더 없어. 이제 호수에서 네 목이나 좀 축이고 가자.”
연주는 낙월 앞에서 텅 빈 바구니를 탈탈 털어 보여 주며 더는 간식이 없음을 알려 주었다. 그러고는 다시 고삐를 잡고 이 근처 어딘가에 있을 호수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푸르릉. 푸르릉-.
“낙월, 왜 그래?”
하지만 고분고분 따라 걷나 싶던 낙월은 연신 투레질을 하며 연주를 향해 머리를 들이밀었다.
“아까 빈 바구니도 보여 줬잖아. 간식은 더 없다니까?”
낙월은 아랑곳없이 자꾸만 머리를 비비며 연주에게 애교를 부렸다. 그러나 아무리 애교를 부려도 연주가 제 뜻을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보이자, 나중에는 고삐를 쥐지 않은 연주의 다른 쪽 손에 들린 주머니를 주둥이로 툭툭 건드리기 시작했다.
마치 제 간식을 여기 숨겨 놓은 걸 다 알고 있으니 마저 내놓으라고 투정을 부리는 듯했다.
“하여간 못 말려. 이건 내가 먹으려고 남겨 둔 건데.”
연주는 어린애처럼 치근덕거리는 낙월의 행동에 웃음을 터뜨렸다. 마지못해 주머니를 끄른 연주는 남은 사과와 얼음 설탕을 차례로 꺼냈다. 낙월은 연주가 간식을 손에 쥐는 족족 냉큼 받아먹고는 그제야 만족했는지 연주를 안내하는 것처럼 앞서 나갔다.
그렇게 고삐를 쥐고 한참 낙월을 따라가다 보니, 비늘구름이 모여 있는 야트막한 언덕 너머에서 물오리가 꽥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우리 낙월 똑똑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기특한 마음에 낙월을 끌어안고 칭찬을 아끼지 않던 연주는 말과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호수로 향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지축을 울리며 다가온 검은 그림자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말을 산책시키라고 했더니 숫제 말에게 산책을 당하고 있군.”
“내가 낙월과 뭘 하든 당신이 무슨 상관이죠?”
연주는 익숙한 목소리에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쌀쌀맞게 대꾸했다. 반면 정엽은 사람이 말을 붙이는데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연주의 무례한 태도가 황당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그 입 좀 조심하지 그래. 말을 함부로 하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 지난번에 충분히 겪지 않았나?”
“…….”
“내게 사과를 해도 모자랄 판에 왜 또 심술을 부리는 거지?”
사과라고?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자신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정엽 때문에 연주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커다란 흑마를 탄 정엽의 자태는 늠름하기만 했다. 마치 흑마와 혼연일체가 된 듯한 모습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흠이 있다면 아름다운 얼굴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오만함 정도일까.
어쨌거나 화가 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을 뻣뻣한 자세로 올려다보던 연주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가던 길을 부지런히 걸으며 대꾸했다.
“그건 그때고요. 그리고 말을 산책시키는 방법이 국법으로 정해진 것도 아니잖아요? 이렇게 교감하며 함께 걷는 게 내가 낙월을 산책시키는 방식이에요.”
정엽이 별당을 찾아온 그날, 연주가 실언을 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연주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정엽을 향한 반발심이 남아 있었다.
아무리 자신의 실수로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쳤다고 한들, 외간 남자와 정을 통했느니, 정부가 되고 싶은 거냐느니 하는 모욕을 퍼붓는 것 역시 경우가 아니지 않은가?
“귀한 한혈마 성격을 버려 놓은 게 누군가 했더니. 제 주인을 보고 배워서 그렇군.”
끝내 사과 한마디 없이 입을 다물어 버린 연주를 내려다보던 정엽이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낙월은 몇 년이 지나도 주인을 알아보는 충심이라도 있지. 너는 왜 그 모양이야?”
“무슨 뜻이에요?”
“넌 마음이 가볍잖아. 이제는 헌왕을 사랑한다면서.”
차마 그놈의 정부 얘기는 또 꺼낼 수 없었나 보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억지를 부리는 정엽을 향해 미간을 좁힌 연주가 다시 앞만 보며 걸음을 옮겼다.
‘대체 내가 언제 헌왕을 사랑한다고 했어? 그냥 헌왕의 정부가 되는 게 소원이라고 했지.’
졸지에 제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일삼는 소인배의 연인 취급을 받게 된 연주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나 황후를 통해 헌왕의 술수를 모두 알게 됐긴 해도, 여전히 연주에게 앙금이 남은 정엽은 빈정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헌왕비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 이상 헌왕에게 시집을 가긴 틀린 것 같은데. 그럼 나와 헌왕 다음엔 또 누구를 사랑할 생각이야?”
“설마 내가 진짜 헌왕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정엽의 비아냥을 듣다 못한 연주가 걸음을 멈추고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연주의 날카로운 반응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정엽이 유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전혀.”
“그럼 대체 왜 그런 말을…….”
“넌 미련하니까. 이렇게라도 교훈을 줘야 다신 쓸데없는 행동을 안 하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대답하는 정엽의 표정은 대단히 만족스러워 보였다. 정엽의 황당한 태도에 입을 다물지 못하던 연주가 이내 작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꿍얼거리기 시작했다.
“하여간 정말 못됐어.”
“뭐라고?”
“교훈을 줘서 아주 고맙다고요.”
분명 기분이 상하고도 남을 만한 대화인데, 연주는 이상하게도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이 하나를 치운 것처럼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저 사람이 웃어서 그런가?’
잠시 실없는 생각을 하던 연주가 다시 호수를 향해 걷는데, 정엽이 또다시 말을 붙였다.
“비늘구름이 뜬 걸 보니 곧 비가 오려는 모양이군. 이제 그만 걷고 말 위에 타.”
“안 돼요.”
“왜. 말 타는 법을 잊어버리기라도 했어?”
“그게 아니에요. 3년 전 겨울에 낙월에게 약속했어요. 이번엔 역참에서 한 번도 쉬지 않고 한수까지 달려가지만, 고생시키는 건 이게 마지막이라고. 다시는 낙월을 괴롭게 만들지 않겠다고요.”
연주는 담담한 얼굴로 지난 일을 말했다. 3년 전 겨울이라면 연주가 곽 귀비의 농간에 속아 한달음에 한수로 달려온 그때였다.
새삼 눈보라를 헤치고 달려오느라 엉망이 된 모습으로 나타났던 연주를 떠올린 정엽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선 뭐라더라. 이제 아픈 곳은 다 나았냐고 했던가. 그것도 아니면 다행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제 허리를 끌어안던 연주의 모습만은 이상하리만큼 생생했다.
“다 내던지고 떠났으면 지난 일은 그만 잊어. 얼른 말에 타.”
정엽은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옛 기억을 애써 외면하며 연주를 재촉했다. 하지만 연주는 여전히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요지부동이었다.
“채연주, 내 말 안 들려?”
정엽이 끊임없이 연주를 재촉하는 사이 그의 예견대로 시커먼 먹장구름이 몰려와 굵은 빗방울을 떨구기 시작했다. 당황한 연주는 손으로 그늘을 만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리 와.”
그 순간, 말을 몰아 연주에게 바짝 다가온 정엽이 갑자기 몸을 숙여 왼팔로 연주의 허리를 휘감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얼결에 정엽의 말 위에 옆으로 걸터앉게 된 연주는 깜짝 놀라 동그란 눈을 깜빡였다.
“꽉 잡아.”
정엽은 가까워진 연주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졸지에 두 발이 공중에 떠서 몸의 중심을 잡기 어려워진 연주는 밀려드는 두려움에 본능적으로 정엽의 목을 꼭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정엽은 제게 안겨 오는 연주의 가느다란 허리를 쇠사슬처럼 단단히 옥죄었다. 그러고는 힘차게 말의 배를 걷어차며 어디론가 내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