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연주는 당연한 듯 제비꽃을 정엽과 연관 짓는 공주 앞에서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제자는 스승을 닮는 법이라지만, 생각하고 말하는 것마저 닮아 버리다니.
그래서 연주는 어린 공주가 기특하기보다 심란한 마음이 앞섰다.
‘그 사람도 여기 와 있겠지?’
하지만 공주가 찾아낸 제비꽃의 여파는 금세 잦아들지 않았다. 제비꽃에서 정엽으로 이어진 상념의 고리는 자연히 그가 이 사냥터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판단으로까지 이어졌다.
‘우연히 마주친다 해도 뭐 별일이야 있겠어?’
병상에 누워 있는 내내 한 번도 자신을 찾아온 적 없는 정엽이었다. 만일 정엽이 아직도 그토록 저를 미워하고 있다면 무시가 아니라 더한 짓을 벌이고도 남았으리라.
뭣보다 연주는 정엽이 없어도 제 삶을 잘 꾸려 나가겠다고 다짐한 지 오래였다.
그렇지만 풀밭에 우연히 피어난 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정엽을 떠올리다니. 앞으로 살면서 마주칠 무수한 상황 속에서 오늘처럼 정엽의 흔적을 발견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숨이 막혀 오는 것 같았다.
“이따 오라버니한테 보여 줄래! 이 꽃은 예쁘고 향기도 좋으니까!”
심란한 마음에 한숨짓던 연주가 쾌활한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멀어진 공주는 한 손 가득 제비꽃을 꺾고 있었다.
“공주마마, 조심하세요!”
연주가 요리조리 꽃밭을 헤치며 돌아다니는 공주를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다시 꽃 무더기 속으로 몸을 감춘 공주는, 연주의 당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병아리처럼 허리를 숙인 채 풀꽃을 꺾는 데 집중했다.
지상에 납작 붙어 피는 꽃을 찾아 웅크린 뒷모습에선 세상에 존재하는 제비꽃을 모조리 꺾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공주마마, 이제 그만하세요.”
천진난만한 모습을 지켜보던 연주가 이제 아예 풀밭에 주저앉아 꽃다발을 만들기 시작한 공주에게 사정하듯 말했다. 공주는 작은 꽃에 코끝을 가져다 대고 향기를 들이마시고는, 연주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순간, 정체 모를 사내의 목소리가 두 사람을 덮쳤다.
“거기 두 분 마마, 조심하시옵소서!”
다급한 목소리를 들은 연주는 곧장 소리가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 끝에는 고삐가 풀린 옅은 금빛 말 한 마리가 이쪽으로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어린 공주가 말발굽에 차이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놀란 연주는 본능적으로 몸을 던져 공주를 보호했다.
이히히힝-!
말의 높은 울음소리가 드넓은 초원에 쩌렁쩌렁 울렸다. 연주는 공주를 감싸 안은 몸을 한껏 웅크리며 두 눈을 꼭 감았다. 하지만 두려움으로 바짝 얼어붙은 연주의 어깨에 쏟아지는 건 거센 발길질이 아니었다.
푸르르-.
좀 전까지 사납게 달려오던 말이 어느새 온순하게 투레질을 하며 연주의 어깨를 주둥이로 툭툭 건드렸다.
마치 아는 사람을 불러 세우는 듯한 말의 행동에 이상한 느낌을 받은 연주가 천천히 눈을 뜨고 뒤를 돌아봤다. 말은 연신 주변을 킁킁거리며 연주의 체취를 확인하더니, 반가움을 표시하듯 가볍게 앞발을 굴렀다.
“휴, 다행이다…….”
연주는 우선 말이 저와 공주를 덮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겁먹은 공주를 등 뒤에 숨겼다.
“말이 어쩐지 눈에 익은데…….”
연주는 묘한 친숙감에 사로잡혀 조심스레 말을 향해 다가갔다. 햇살을 머금은 듯 온몸이 엷은 금빛으로 반짝이는 아름다운 말은 유독 커다랗고 예쁜 눈망울을 자랑했다. 그 순한 눈과 시선을 맞춘 연주는 어느 순간 기억 저편에 묻혀 있던 이름 하나를 끄집어냈다.
“낙월?”
드디어 저를 알아봐 준 주인을 향해 콧김을 뿜으며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온 말은 연주를 끌어안듯 그녀의 어깨 위에 제 기다란 얼굴을 쑤욱 밀어 넣었다.
“오랜만이로구나. 잘 지냈느냐?”
낙월은 혼인 후 정엽이 연주에게 선물한 귀한 혈통의 한혈마(汗血馬)였다.
뒤늦게 낙월을 알아본 연주는 밝은 얼굴로 말의 긴 목을 끌어안고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러는 동안 이 소란을 보고 놀라 허겁지겁 뛰쳐나온 궁인들이 연주와 공주에게 다가왔다.
“군주마마, 공주마마 괜찮으시옵니까?!”
궁인들은 서둘러 연주와 공주의 안전을 확인하고 재차 두 사람의 행색을 살핀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에게 위협을 알리려 소리쳤던 사내는 뜻밖에 다정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연주와 낙월을 당황한 얼굴로 번갈아 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린 듯 허리를 깊이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군주마마. 소인이 말고삐를 놓치는 바람에 그만…….”
“다행히 공주마마도 나도 다치지 않았으니 큰일은 없을 걸세.”
연주는 사내를 향해 온화하게 대답하고는, 제 손길을 갈구하듯 애교를 부리는 낙월의 콧등을 가볍게 긁었다. 연주 덕에 상황이 말끔히 정리되자, 말을 돌보는 순마사라는 직분이 무색해진 사내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성격이 난폭한 녀석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스스로 고삐를 풀고 마장을 뛰쳐나갈 정도인지는 미처 몰랐사옵니다. 한데 군주마마 앞에선 이토록 순하다니 참으로 신기하옵니다.”
“난폭하다고……? 지금 여기 낙월을 두고 하는 얘기가 맞는가?”
“낙월이라 하심은……. 아, 혹시 이 한혈마의 주인이 군주마마이셨사옵니까?”
사내는 이 범상치 않은 말의 주인이 연주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곤 민망함에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연주는 여전히 낙월에게 붙은 악명을 이해할 수 없어 홀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다네. 한데 낙월이 난폭하다니. 나는 처음 듣는 얘기로군.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가?”
“아, 그것이…….”
혹시 지체 높은 왕족의 노여움을 사게 되지는 않을까,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연주의 눈치만 살피던 사내가 궁금증으로 가득 찬 그녀의 눈빛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인은 이 신덕위장에서 말을 돌보는 순마사라 자세한 사정은 모르옵니다. 다만 연왕부에서 데려온 이 한혈마는 성질이 무척 사나워 연친왕 전하를 제외하곤 아무도 다룰 수 없으니 절대 말 등에 오르지 말라는 주의를 들었사옵니다.”
“그래?”
“예. 또 여물조차 연왕부 사람이 준 것이 아니면 먹지 않을 만큼 고집이 세니 마장에 잘 묶어 놓기만 하라는 명을 받았지요.”
“그럴 리가.”
낙월이 고집이 세다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낙월을 돌아보던 연주의 낯빛이 흐려졌다. 하지만 낙월은 예나 지금이나 순진한 눈망울로 저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렇게 착한 아이가 대체 왜…….”
내가 연왕부를 떠난 사이 누가 낙월을 괴롭히기라도 한 걸까?
연주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상황을 마주하고 상념에 젖었다. 그러다 문득 마장에 잘 묶어 놓기만 하라는 당부를 받았다던 대목을 떠올렸다.
“한데 기껏 왕부에서부터 여기까지 힘들게 데려온 말을 마장에 묶어 놓기만 하라니. 대체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린 것이냐?”
보통 봄 사냥을 위해 함께 온 말들은 사냥에 나서지 못하더라도 오랜만에 초원을 뛰놀며 기분을 전환할 기회를 누렸다. 한데 다루기 힘들다는 이유로 온종일 마장에 묶어 놓으라고만 했다니. 낙월의 안타까운 처지에 속이 상한 연주가 저도 모르게 가시를 세웠다.
“아, 그것이…….”
“억지로 말을 산책시키려다 혹시라도 사람이 다치면 안 되니까.”
당황한 순마사가 말끝을 흐렸다. 그사이, 어디선가 나타난 정엽이 그의 대답을 가로챘다. 연주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얼결에 정엽과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일별에도 금빛 기린 무늬가 선명한 새카만 융복으로 건장한 몸을 감싼 정엽의 모습만은 선명하게 각인됐다. 쓸데없이 근사한 그의 자태는 계속해서 연주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정엽은 연주의 생각을 다 안다는 듯 성큼성큼 다가와 낙월의 목을 토닥이며 말했다.
“네가 떠난 뒤로 이 녀석은 내 명령조차 잘 듣지 않아. 오늘은 일전에 시양이 낙월을 예쁘다고 좋아하기에 데려온 것뿐이고.”
“그래도 여기까지 데리고 나왔으니 당신이 잠시 짬을 내 산책시켜 줄 수도 있잖아요.”
“신의군이 사냥터 주변의 경호를 맡아서 그럴 여유 따위 없어.”
또 일 때문이지. 내게 그랬듯 내 말에게도 일, 일, 일.
연주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정엽을 흘깃 쏘아보다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낙월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시무룩한 연주의 얼굴을 확인한 정엽의 심기는 그리 편치 못했다.
말 못 하는 동물에게는 동정심이 넘치면서, 한때 남편이었던 제게는 대들지 못해 안달이라니. 게다가 목에 감긴 저 거추장스러운 천 쪼가리는 또 뭐란 말인가?
짜증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연주에게 한마디 하려던 정엽의 시선이 다시 연주의 목으로 향했다.
‘평소 목이 답답한 게 싫다며 한겨울에도 목에 뭘 두르는 꼴을 못 봤는데. 설마…….’
짧은 순간 연주가 목에 두른 천이 지난 사고의 흔적을 가리기 위한 걸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정엽은 심란한 마음에 미간을 좁혔다.
새삼 그간 한 번도 연주의 병문안을 가지 않았다는 사실과, 부부의 연은 다했어도 서로 원수가 될 필요는 없다던 황후의 조언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흠…….”
고심하던 정엽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정 그렇게 낙월이 안쓰러우면 네가 산책이라도 시켜 주든지.”
“……그래도 돼요?”
“이 녀석이 고삐까지 풀고 뛰쳐나와 찾아온 사람이 바로 너잖아. 옛 주인을 만나고 싶어서 이 소동을 벌인 모양인데, 충정에 대한 보상은 해 줘야 하지 않겠어?”
연주는 의외로 선선히 호의를 베푸는 정엽을 미심쩍은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내가 미워도 설마 이만한 일로 꼬투리를 잡기야 하겠는가.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그래.”
대화를 마친 정엽은 자신을 향해 안아 달라고 보채는 시양을 한 손으로 번쩍 들어 품에 안고는 성큼성큼 막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예전보다 어깨가 더 넓어진 것 같은 건 착각일까?
정엽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연주는 어서 가자는 듯 주둥이로 제 등을 미는 낙월을 향해 환히 웃어 보이고는 늘어진 고삐를 잡고 그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