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이상한 얘기라니요?”
“헌왕의 사주에 양기가 넘치고 음기가 부족하여 곁에 일부종사치 못하는 여인이 있어야만 요절을 피할 수 있다더구나.”
“그런 허무맹랑한 말을 믿으십니까?”
“내가 믿지 않으면 어쩌겠느냐. 곽 귀비는 벌써 자기가 어떤 여인을 헌왕과 맺어 주더라도 막지 말라고 엄포를 놓고 갔다.”
지금껏 이런 사정이 있었는지 몰랐던 정엽은 구린내가 진동하는 곽 귀비의 수작에 인상을 찌푸렸다.
“한데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곽 귀비와 헌왕이 누구를 노렸는지 알 만하지 않으냐.”
“설마 연주를…….”
“곽 귀비 모자의 교활한 수법을 하루 이틀 보아 온 것은 아니다만, 애초에 그들이 연주를 노리는 것도 다 너를 만만하게 생각하니 그런 것 아니겠느냐?”
“하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미신 같은 이야기를 폐하께서 귀담아 들으실 리 없지 않습니까.”
“네 생각대로 폐하께서 미신을 믿지 않는 분이셨다면, 지금껏 사천감의 말만 듣고 너를 멀리하셨겠느냐.”
“…….”
“곽 귀비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내게 반대만 하지 말아 달라고 미리 읍소를 했지.”
일이 진행되기도 전에 황후에게 부탁을 할 정도라면 일이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안타깝지만 폐하께선 곽 귀비에게 특히 약한 분이시다. 헌왕이 연주와 이어지지 못하면 요절하고 말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도 가만히 계실 리 없어.”
지금까지 헌왕이 연주에게 접근하는 이유가 오로지 제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 위해서일 거라고 예상했던 정엽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황후의 의견은 구구절절 옳았다.
정엽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이를 악물었다.
‘연주를 향한 그 눈빛이 하룻밤 일장춘몽이 아니라 진심으로 넘보는 것이었다?’
그런 일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단박에 정엽의 생각을 읽은 황후가 매끄럽게 말을 이었다.
“연주 역시 아마 너와 비슷한 생각으로 헌왕의 부탁을 들어줬던 걸게다.”
“…….”
“헌왕이 연주를 향산으로 유인할 때, 일부러 소성궁 근처까지 찾아와 궁녀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저를 도와 달라고 매달렸다더구나. 아마 궁녀들을 이용해 소문을 내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랬군요.”
“정말로 헌왕과 연주가 소문처럼 온당하지 못한 사이였다면, 궁녀들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공개적으로 매달릴 필요도 없었겠지.”
흑심을 품은 자들이 밝은 곳보다 어두운 곳을 좋아하는 건 만고의 법칙이었다. 헌왕이 노린 것은 더러운 소문의 빌미가 될 단 한 번의 기회였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뜻이었다.
“마마의 말씀은 잘 알아들었습니다.”
계속해서 연주를 두둔하는 황후를 향해 고개를 숙인 정엽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일그러졌다. 새삼 연주를 찾아가 온갖 말로 비난했던 일이 뇌리를 스쳤다.
‘채연주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은 게 단순히 나를 자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억울해서였나?’
이런 생각이 들고 나자, 정엽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상념이 깊어 보이는 정엽을 대하는 황후의 태도는 단호했다.
“연주는 돌아가신 네 어머니께서 폐하를 설득해 어렵게 맺어 준 사람이다. 비록 부부의 연은 다했다지만 원수로 남을 필요야 있겠느냐.”
“…….”
“게다가 평해왕과 왕세자는 네가 연주와 헤어지고 난 후에도 변함없이 너를 지지하고 뒷받침해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다. 절대 가볍다고 할 수 없는 인연이야. 부디 그 인연을 소중히 여기거라.”
“예, 명심하겠습니다.”
긴 대화 끝에 정엽에게서 원하는 답을 얻은 황후는 그제야 한시름 놓고 정엽의 어깨를 두드렸다.
황후라고 왜 모르겠는가. 정엽과 연주는 처음부터 부부로 만난 사이다. 한데 한순간에 남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되니 어색하고 불편한 것이 당연지사다.
그러나 매번 부딪치기만 해서야 언제 마음에 난 상처가 아물겠는가. 마음의 상처가 아물어야 다시 제 자신을 돌아볼 여유도 생기고, 지난날의 오해를 바로잡을 기회가 생길 것이다.
“그래. 내가 오랜만에 널 보니 반가움이 앞서 사설이 길었구나. 하면 나는 이만 일어나 보마.”
“행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마음 편히 쉴 틈도 없을 텐데, 그럴 필요 없다. 책무를 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네 몸을 챙기는 것이 우선이야. 내 말 알아듣겠느냐?”
“예.”
황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 상궁의 부축을 받아 막사를 나섰다.
“살펴 가십시오.”
부득불 막사 앞까지 황후를 배웅한 정엽은 떠나는 황후의 가마 행렬을 지켜보며 다시 한번 생각에 잠겼다.
“가볍지 않은 인연이라…….”
정엽은 기나긴 행렬이 사라지고 나서도 황후의 말을 오래 곱씹다가, 막사 안으로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그 후에도 정엽의 고민은 계속됐다.
우리의 인연은 황후의 말대로 실로 중한 것인가. 아니면 지난 과거가 우리를 억지로 묶어 두고 있는 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 *
한 달 동안 이어진 봄 사냥이 끝물에 접어들었다. 선농단 제례를 시작으로 환영 연회, 열병식, 연무 대회에 이르기까지 큰 행사를 연이어 치러 낸 황제는 황궁으로 돌아가기 전 행궁에 딸린 사냥터로 나와 사냥을 즐겼다.
그리고 이즈음 몸을 거의 회복한 연주도 기분 전환을 위해 황후, 공주와 함께 사냥터로 나와 싱그러운 봄 햇살을 만끽했다.
“와아아!”
자주 궁을 나오지도 않거니와, 사냥터에 와 보는 것 역시 처음인 공주는 광활한 초원과 드높은 창공에 들떠 사냥터에 도착하자마자 냅다 풀밭을 뛰어다녔다.
“공주마마, 조심하세요! 그러다 다치시기라도 하면!”
“싫어!”
궁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주는 두 팔을 벌리고 빙글빙글 돌다가 멋대로 풀밭에 드러누워 자유를 만끽했다. 공주의 앙증맞은 몸이 풀밭으로 쓰러지자 작은 풀벌레들이 사방으로 폴짝폴짝 튀어 올랐다. 하지만 공주는 그조차 즐거운 듯 까르륵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스승님! 이리 와 보세요! 풀이랑 나무가 엄청엄청 많아요! 풀벌레도 엄청 많아!”
공주는 두 팔과 다리를 물장구치듯 동동거리다, 소리 높여 명랑하게 연주를 불렀다.
부랴부랴 연주를 따라왔다가 기겁한 보모상궁이 서둘러 공주를 일으키려 나섰다. 그러나 공주는 연주가 다가올 때까지 요지부동이었다.
연주는 작게 웃으며 상궁에게 물러나라 손짓했다.
“잠깐은 괜찮을 거예요.”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공주마마를 잘 돌볼 테니.”
연주의 만류에 보모상궁이 한 발짝 물러났다. 연주는 공주의 곁에 앉아 함께 장난을 치며 잠시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일다경쯤 지나자, 연주는 때가 됐다는 듯 공주의 고사리손을 다정하게 그러쥐었다.
“자, 이제 일어나셔야 해요.”
“으으응, 싫어. 더 놀래.”
일곱 살이 되어 말괄량이 기질이 정점에 달한 공주는 반항하듯 세차게 도리질 쳤다. 연주는 먼저 풀밭에서 일어나 양손을 허리에 얹고 놀리듯 말했다.
“계속 풀밭에서 함부로 뒹구시면 풀잎에 살갗이 베여 따가울 수 있어요. 놀란 풀벌레가 앙! 하고 깨물 수도 있고요. 또 이런 초원에는 뱀이 있을지도 몰라요.”
“배앰?”
“네. 뱀은 이런 풀밭에 아주아주 많이 살거든요.”
공주는 이제 웬만한 곤충은 혼자 맨손으로 잡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만, 뱀을 보고도 울지 않을 자신은 없었다.
“뱀은 싫어!”
연주의 말에 두 눈이 동그래진 공주가 냉큼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연주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으며 공주를 일으켜 주었다. 그런 뒤 공주의 옷에 묻은 흙과 풀잎을 털고 흐트러진 머리 장식까지 바로잡아 주었다.
“봄 사냥은 황실 일가뿐만이 아니라 손님들도 함께하는 자리예요. 공주마마의 즐거운 기분은 이해하지만, 이렇게 계속 기품 없이 행동하시면 스승인 제가 공주마마를 잘못 가르쳤다며 비난을 들을 거예요.”
“우웅, 스승님이 나 때문에 혼나는 건 싫어. 시양이가 잘못했어요.”
“풀밭을 더 뒹구는 건 다음에요. 여기보다 안전하고 사람들 눈이 없는 곳에서 하기로 해요. 네?”
“히힛. 응! 시양이 풀밭 좋아!”
“그러면 여기서 잠깐 걸을까요?”
“네!”
시양을 적당히 타이른 연주는 작은 손을 잡고 느릿느릿 풀밭을 걷기 시작했다.
연둣빛 융단 위에 공주와 연주의 비단 치마가 사박사박 스치고, 온화한 실바람이 귀밑머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지나갔다. 머리 위에는 따스한 햇볕이 밝게 부서지고,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하늘가에는 해오라기 떼가 무리 지어 날아가니 실로 장관이었다.
‘매일매일 이토록 평온한 날들만 계속된다면 참 좋을 텐데.’
평화로운 정경에 취해 저도 모르게 나긋하게 미소 짓던 연주가 어느새 텅 비어 버린 손을 인지하고 황급히 돌아섰다. 연주의 손을 잡고 잘 따라오는가 싶던 공주는 풀밭에 쪼그려 앉은 채 무언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공주마마, 왜 그러세요?”
또 무언가 낯선 것을 발견한 모양이라고 짐작한 연주는 치맛자락을 갈무리하며 시양의 맞은편에 함께 쪼그려 앉았다. 그러자 작은 머리를 숙이고 관찰에 열중하던 시양이 고개를 들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스승님, 이 꽃은 이름이 뭐예요? 작고 예쁜데 처음 봐.”
시양은 오종종한 집게손가락을 야무지게 펴 지상에 바짝 붙어 피어난 보라색 꽃송이를 가리켰다.
공주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긴 연주가 오랜만에 제비꽃을 발견하고 낯빛을 흐렸다. 제비꽃은 연주가 혼인 시절 정엽을 기다리며 봄마다 찾아 헤매던 바로 그 꽃이었기 때문이다.
“아, 이 꽃은…….”
“스승님은 이 꽃의 이름이 뭔지 알아요?”
“이건 제비꽃이에요.”
“제비꽃……?”
연주의 대답을 들은 공주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곤 이내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건 우리 오라버니 꽃이네? 똑같은 제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