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하루에도 몇 번씩 누이를 다시는 보지 못할까 봐 마음을 졸였던 윤이 연주를 향해 질문을 퍼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신은 윤의 어깨를 두드리며 성급하게 구는 아우를 달랬다.
“윤아, 네 누이가 의식을 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신이 없을 거다. 그런 건 천천히 물어도 늦지 않아.”
“그럼 이것만은 분명히 알아야겠습니다. 비녀에 눈이 찔린 채 죽은 그자가 누님을 해치려 했던 것이 맞습니까?”
연주는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쉰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하지만 이 일을 사주한 건 헌왕비인 듯해.”
“헌왕비라고? 왜 헌왕비가…….”
“감히 내 누님을 해하려 들다니!”
신이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흥분한 윤이 그의 말허리를 끊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분위기가 살기등등한 것이 당장이라도 헌왕비를 죽이러 갈 태세였다.
“이래서야 뭘 알아낼 수 있겠느냐. 진정하고 앉거라.”
“하지만 형님!”
“일단 네 누이의 말도 들어 봐야지.”
간신히 윤을 달랜 신이 그를 자리에 눌러 앉혔다. 그런 뒤 연주를 향해 차분하게 질문을 던졌다.
“어째서 이번 사건의 배후가 헌왕비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사공이 저를 죽이려 할 때 헌왕비 얘기를 꺼냈어요. 그런데 범인이 죽고 말았으니 헌왕비를 이번 사건의 배후로 지목하는 것은 어려울 듯해요.”
“그렇겠구나. 하지만 범인은 특이하게 유리로 된 의안을 끼고 있었다. 또 아무런 대가 없이 너를 해하려 들 리는 없으니 그자의 가족을 찾아 조사해 보면 헌왕비와 접점이 나올지도 모른다.”
“연관된 것이라니요?”
연주와 신의 대화를 듣던 윤이 냉큼 끼어들었다.
“갑자기 큰돈이 생기지는 않았는지, 집안에 경사가 있지는 않은지. 유리 의안을 실마리 삼아 하나하나 조사하다 보면 분명 나오는 것이 있을 게다.”
“그렇다면 당장 폐하께 이 일의 조사를 명해 달라고 청하고 헌왕비를 예의 주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일은 제게 맡겨 주십시오!”
호언장담한 윤은 굳은 얼굴로 곧장 밖으로 달려 나갔다. 신은 성격 급하게 방을 나서는 아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젓다가, 연주를 다시 침상에 눕히고는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다. 사고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황후마마께서도 매일 너를 살피고 가셨다. 공주마마께선 매일 네게서 떨어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셔서 보모상궁이 진땀을 뺐지.”
“감사한 일이네요.”
저를 생각해 주는 사람들의 마음에 가슴이 뭉클해진 연주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끝내 오라비의 입에서 나오지 않는 이름이 신경 쓰여서 연주는 저를 걱정해 준 사람들에 대해 더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 소중한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던 그 순간, 연주가 가장 오랫동안 떠올린 얼굴은 다름 아닌 정엽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연친왕 전하께선 봄 사냥 내내 폐하의 경호를 맡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셨다. 너를 살필 여유가 없으셨을 거야.”
“……과연 그럴까요.”
연주는 제 속내를 읽기라도 한 것처럼 정엽의 얘기를 꺼내는 오라비를 향해 메마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곤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이미 남남이 된 사인데요. 찾아오시는 게 더 이상하지요.”
정엽은 지금쯤 저를 남 이상으로 미워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는 누군가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는 건 못 참아도,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건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니까.
한숨을 삼키며 애써 정엽에 관한 생각을 떨쳐 버린 연주가 이불을 목 끝까지 잡아당겼다.
“그래, 그렇구나. 이 오라비가 실수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괜찮다면서도 대꾸하는 연주의 목소리에는 서운한 기색이 느껴졌다. 신은 그걸 알면서도 행여 누이의 마음이 불편할까 봐 모르는 척 화제를 돌렸다.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데, 배고프지 않니? 이따 탕약도 마셔야 할 텐데. 네가 좋아하는 타락죽을 끓여 올까? 달콤한 얼음 설탕도 듬뿍 넣어서.”
“……좋아요.”
연주는 언제나 저를 위해 주는 오라비를 위해 최대한 예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잠시만 기다리거라.”
신은 연주가 먹을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떴다. 방 안에 홀로 남은 연주는 호수에 빠졌을 때 다짐했던 것을 하나하나 되새기며 눈을 감았다.
‘정엽에게 다시는 조롱당하지 않을 거야. 그가 없어도 혼자서 잘 살아남을 거야. 그리고 앞으로는 정엽에게 어떠한 기대도 품지 않을 거야.’
* * *
정엽은 연주의 사고 소식을 듣고도 한동안 모른 척했다. 대신, 그는 스스로를 혹사하는 것처럼 황제의 호위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평소 귀까지 틀어막고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 오고 가는 궁인들이 연주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정엽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떠올렸다.
형제의 극진한 간호 덕에 연주가 깨어났다는 둥, 거동을 시작했다는 둥. 심지어 병상을 떨치고 일어난 지 오래인데 아직도 안색이 말이 아니더라는 이야기까지 듣고 난 뒤에는 차라리 마음이 놓일 지경이었다.
‘어쨌든 죽지 않고 깨어나 걸어 다닌다니 그걸로 됐어.’
정엽은 문제가 해결됐으니 앞으로 연주에게 더는 신경 쓸 일이 없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아무리 일에 몰두해도, 밤마다 어여쁜 자태로 꿈속에 찾아오는 연주만큼은 막을 도리가 없었다.
연주는 마치 저를 기다리고 있노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끈질기게 그를 괴롭혔다.
그때마다 정엽은 연주를 생각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애썼다. 하지만 애를 쓰면 쓸수록, 연주의 환영은 밤낮을 가릴 것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정엽의 신경을 긁었다.
이날도 신의군 막사에서 정무를 보던 중 잠깐 잠이 들었던 정엽은 어김없이 꿈속의 연주에게 시달리다 깨어났다.
“사람 성미가 어쩜 꿈속에서도 이렇게 고약한지.”
오늘은 저를 향해 덜 익은 매실을 던지며 되지도 않는 심통을 부리던 연주였다. 혹시 누군가 감히 제게 장난을 쳤던 것은 아닐까. 정엽은 투덜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갑자기 황후가 찾아왔다는 전언이 들렸다.
“오셨습니까.”
정엽은 금세 자리에서 일어나 안쪽으로 들어오는 황후에게 예를 갖췄다.
“편히 앉거라.”
척 보기에도 피곤해 보이는 정엽을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황후가 인자한 얼굴로 화답했다. 정엽은 숙였던 허리를 곧게 세운 뒤 황후를 손수 부축해 의자 앞으로 이끌었다.
“그냥 저를 마마의 처소로 부르시면 될 것을 어찌 막사까지 나오셨습니까.”
“네가 폐하의 호위를 맡아 공사다망하다고 들었다. 네가 바쁘면 내가 와야지.”
정엽의 손을 잡고 토닥이던 황후가 사냥터에 임시로 세워진 막사 안을 살폈다. 여기선 이마저도 호사겠지만 황후의 눈에는 모든 것이 부족해 보이는 환경이었다.
“잠은 잘 자느냐?”
“예.”
“먹는 건?”
“잘 먹습니다.”
“그래, 다행이다.”
겨우 낮 동안 지내는 막사일 뿐인데, 걱정을 한가득 늘어놓은 황후가 정엽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네가 통령으로 부임한 이후 신의군이 많이 변했다는 이야기가 들리더구나. 내부 경합을 통해 군사들의 기강을 바로 세웠다지.”
“대단히 특별한 일을 한 건 아닙니다.”
“그래도 폐하께선 네 덕분에 이번 열병식이 아주 마음에 드셨던 모양이야. 애썼다.”
“무슨 일이든 시작보다 끝마무리가 중요한 법이니까요. 사냥 마지막 날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
안도하듯 작게 미소 지은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황후에게 걱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맡은 일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흠잡을 것 없이 해내면서 왜 마음을 쓰는 일에서는 서툴고 둔하기만 한지…….’
속으로 한숨을 삼킨 황후가 본론을 꺼냈다. 연주에 관한 것이었다.
“참, 얼마 전 연주가 겪은 사고의 배후가 밝혀졌단다. 알고 있느냐?”
“아니요. 듣지 못했습니다. 배후가 누굽니까?”
“헌왕비다.”
헌왕비? 뜻밖의 이름에 잠시 당황하던 정엽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곽 귀비는 헌왕비에게 시모 되는 사람이고, 부부는 일심동체이니 예상에서 크게 빗나가는 결과는 아니었다.
“놀랍지는 않습니다만, 헌왕비의 처결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아직 봄 사냥이 끝나지 않았으니 제대로 된 처벌을 내리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일단 폐하께서 헌왕비를 행궁에서 내치시고 왕부에서 자숙하라 명하셨다. 대외적으로는 헌왕비가 급병을 얻어 먼저 돌아간 것으로 해 두었지. 여러 손님이 모일 때니만큼 황실의 체면이 우선시 되지 않겠느냐.”
역시나. 정엽은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황제의 결정에 말을 아꼈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수로 연주를 호수에 빠뜨린 겁니까?”
“헌왕비가 궁녀를 매수해 내 명을 받들었다 속이고는, 연주를 호수로 유인해 빠뜨려 죽이려 했다는구나. 명색이 종실 왕비씩이나 되어서 어찌 그런 극악무도한 일을 벌일 생각을 했는지…….”
말끝을 흐린 황후가 곁눈질로 슬쩍 정엽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정엽은 무덤덤한 얼굴로 침묵할 뿐이었다.
“네 전처가 어떤지 살펴보긴 한 게냐? 일이 흐지부지 덮여 연주의 상심이 더 클 것이다.”
“이제 저와는 상관없는 사람이 아닙니까.”
“너와 상관없는 사람이라니. 어찌 그런 무정한 말을 하느냐?”
황후는 마치 정엽이 연주를 살피는 일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그를 호되게 나무랐다. 그러곤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연주는 네 아내였던 사람이다. 게다가 네 첫아이를 낳기까지 했지. 부부의 연이 끊어졌다고 한들 그렇게 쉽게 남남이 될 수 있는 줄 아느냐?”
“…….”
“설마 너마저 궁중에 떠도는 유언비어를 믿고 연주를 의심하고 있는 게야?”
의심이라.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연주가 한순간의 실수로 낯 뜨거운 염문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정엽아.”
황후는 정엽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고는 고운 아미를 미세하게 구겼다. 이래서야 이번 일의 전말을 알게 된다 한들 달라지는 것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너는 모르겠지만, 원소절쯤 곽 귀비가 대뜸 나를 찾아와 이상한 얘기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