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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수월-72화 (72/161)

72화.

‘저게 쓰려지면 난 꼼짝 없이 불기둥에 깔려 죽고 말 거야!’

당황한 연주는 자신을 구조하러 오는 배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다행히 군사들은 빠르게 노를 저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거리가 멀다 보니 기둥이 쓰러지기 전에 군사들이 배에 도착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이제 정말 호수로 뛰어드는 수밖에 없구나.’

뱃머리에서 일어난 연주는 겁에 질려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깊게 심호흡을 했다.

“괜찮아. 물에 들어가서 배를 잡고 버티기만 하면 돼. 구조대가 도착할 때까지만 버티면 돼.”

혼잣말하며 마음을 다잡은 연주는 마침내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고는 힘껏 물장구를 치며 수면 위로 올라와 계획대로 배의 난간을 붙잡고 매달렸다.

하지만 호수의 물은 상상 이상으로 차가웠다. 순식간에 한기가 몸속 깊은 곳까지 스몄다. 아무런 준비 없이 찬물로 뛰어든 탓에 팔다리는 쥐가 난 것처럼 뻑적지근했다.

그렇게 일각쯤 버티었을까. 차디찬 물속에서 허우적대던 연주의 몸이 덜덜 떨려 오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려 계속해서 고개를 흔들고 입술을 깨물어 봤지만, 시야 역시 점점 흐려졌다.

‘내가 경고했지. 미련하게 굴지 말라고. 곽 귀비에게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이혼하고 나서 죽겠다고 설치는 게 습관이 된 거 같은데, 그렇게 사는 게 재미없으면 지금 당장 죽여 주지. 하지만 편하게 눈감을 생각은 하지 마.’

그러나 기이하게도 정엽이 제게 늘어놓던 비난만큼은 머릿속에 선명했다.

‘더는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듣지 않을 거야. 나도 당신 없이 잘 살 수 있다는 걸 보여 줄 거야. 나 혼자서도. 나 혼자서도……!’

연주는 그렇게 스스로를 북돋우며 실낱같은 의식을 붙들고 버텼다. 잠시 후,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님!”

호수로 뛰어든 윤과 군사들이 이쪽으로 날쌔게 헤엄쳐 오기 시작했다. 장정 여럿이 일으키는 물보라에 잔잔했던 물결이 점차 크게 일렁였다. 하지만 배의 난간을 붙잡은 채 어렵게 의식을 유지하고 있던 연주는 물결이 잠시 출렁이는 것조차 버티기 버거웠다.

‘할 수 있…….’

결국, 기력이 완전히 바닥난 연주는 정신을 잃고 물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버리고 말았다.

* * *

그날 밤, 유시(酉時)를 조금 넘긴 시각.

온종일 긴장을 거두지 못하던 정엽이 처소로 돌아왔다. 열병식과 연무 대회에 참석한 황제의 경호를 신의군이 연이어 맡은 탓에 뒷덜미가 다 뻐근했다.

“후, 다행히 별 탈 없이 끝났군.”

돌아오자마자 지친 몸을 의자에 누인 정엽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뒤로 젖혔다. 가지런한 잇새로 나른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한데 눈앞에 어둠이 깔리자마자 어김없이 낙신무를 추는 연주의 아리따운 모습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그뿐이면 좋으련만. 춤을 추는 연주의 모습이 멀어지면, 뒤이어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던 헌왕의 끈적한 눈빛이 함께 딸려 나왔다. 정말이지 미칠 지경이었다.

“이건 병이야, 병.”

평소 제 혈육으로 여기지도 않던 헌왕이 이토록 거슬릴 이유가 뭐란 말인가. 하필 채연주를 떠올릴 때마다 불쑥불쑥 함께 튀어나올 건 또 뭐고.

정엽은 오늘도 진득하게 제 심사를 어지럽히는 두 사람 때문에 체머리를 떨었다. 그러곤 신경질적으로 일어나 방 안을 서성거렸다.

‘나 싫다고 떠난 사람이 뭐가 그리 곱다고. 더 신경 쓸 일도 없이 아주 헌왕에게 가 버리면 귀찮은 일이 하나는 줄겠지.’

하지만 막상 연주가 헌왕에게 다시 한번 시집을 간다고 생각하면, 그건 그것대로 속이 뒤집히는 게 문제였다. 제가 죽어 땅에 묻힌 것도 아닌데 아내였던 사람이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니.

“황실에 망조가 들지 않고서야 그런 일은 용납 못 해.”

연주가 진심으로 헌왕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한 것도 아니건만. 정엽은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주먹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불안하게 두들겼다. 그러다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정엽은 헛기침하며 자세를 바로 잡았다.

“전하, 오늘도 고생이 많으셨사옵니다. 궁인들에게 듣자 하니 전하께서 오늘 열병식에서 무척 늠름하셨다고 하더군요.”

양해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능숙하게 정엽의 환복을 도우며 신이 나서 말했다. 그러나 오전까지도 괜찮아 보였던 정엽의 심기는 반나절 만에 가시가 잔뜩 돋쳐 있었다.

“낯간지럽게 그런 말들을 일일이 옮길 필요 없다. 찬물로 목욕을 해야겠으니 준비해라.”

“예? 춘삼월이긴 하지만 아직 밤공기가 차옵니다. 게다가 좀 전엔 기침까지 하지 않으셨사옵니까?”

“오늘따라 말이 많구나.”

봄 사냥의 시작을 알리는 연회 이후 눈에 띄게 감정 기복이 심해진 정엽이었다. 주군의 기색을 살피는 데엔 도가 튼 양해가 날카로운 정엽의 반응에 몸을 숙였다. 이럴 때는 군말 없이 물러나는 것이 상책이었다.

“알겠사옵니다. 하면 목욕물을 준비할 테니 잠시 기다려 주시지요.”

양해는 정엽의 갑주를 모두 정리하고 밖으로 나가려 문을 열었다. 그 순간, 정엽의 부관인 장명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호위 임무를 교대한 지 한참인데 장명은 정엽과 달리 아직도 갑주 차림이었다.

“무슨 일이냐?”

난데없는 소란에 인상을 찌푸린 정엽이 장명을 건너보았다. 하지만 장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뜸 제 용건부터 늘어놓았다.

“아직 소식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군주께서 오늘 호수에 빠지셨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불이 난 배에서 뛰어내리기까지 하셨다고……!”

“…….”

그러나 장명의 보고를 들은 정엽은 묵묵부답. 연주가 사고를 당했다는데도 놀라는 기색은 하나 없고, 도리어 짜증 가득한 눈길을 보낼 뿐이었다. 이렇듯 뜻밖의 반응이 돌아오자 장명은 황망함에 입을 다물었다.

반면 양해는 차마 방을 나서지 못하고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에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굴렀다.

‘아휴, 이를 어쩐다. 지금껏 일부러 왕비마마의 소식을 전하지 않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오래 침묵하던 정엽의 반응은 단순명료했다.

“그래서?”

기막힌 장명이 반발했다.

“그래서라니요? 군주마마께서 난데없이 사고를 당하셨습니다. 이는 분명 군주마마를 해치려는 모략입니다. 하니 당장이라도 제대로 조사를 해야……!”

“목소리 낮춰라. 그래서 군주가 죽기라도 했느냐? 아니, 설령 죽었다고 해도 대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이렇게 호들갑을 떨지?”

정엽의 싸늘한 반응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던 장명이 양해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양해는 입을 꾹 다물고 연신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전하께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가?’

장명은 내심 이런 정엽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임을 직감했다.

“군주는 이제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고, 신의군은 승설군주를 경호하는 부대도 아니다. 쓸데없는 일에 관심 꺼라.”

“…….”

언제는 군주의 일거수일투족에 날을 세우며 군주에 관한 일이라면 뭐든 빠짐없이 알아 오라시더니, 왜 갑자기 태도를 바꾸신 건지……. 끝내 주군의 명령을 받아들이지 못한 장명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왜 대답이 없느냐.”

“……예, 알겠습니다. 전하.”

영 개운하지 않은 대답을 들은 정엽은 미간을 좁히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이만 물러나라는 듯 장명을 향해 손짓했다.

“쉬십시오.”

장명은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평소와 달리 곧장 등을 보이며 밖으로 나섰다.

“저 녀석이…….”

누가 봐도 불만이 있어 보이는 장명의 행동에, 정엽은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다 짜증스러운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요즘은 왜 다들 이렇게 괘씸히 굴지 못해 안달인지.’

채연주도, 헌왕 소기도, 장명도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엽은 복잡다단한 생각을 털어 버리기 위해 저벅저벅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 * *

호수에 빠졌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연주는 사흘이 지나도록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연주의 병세를 지켜본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영혼이 구천의 문턱을 떠돌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신과 윤의 극진한 간호 끝에 연주는 간신히 의식을 되찾았다. 그것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막냇동생 윤이었다.

“누님! 정신이 드세요?”

“……윤아.”

연주가 눈을 뜨자 잠잘 때를 빼곤 항상 그녀의 곁을 지키던 윤이 펄쩍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형님을 모셔 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형님, 형님!”

“무슨 일이냐?”

윤의 소란에 신이 곧장 연주의 침상으로 달려왔다. 그는 내내 불덩이 같았던 연주의 이마를 짚어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미열이 좀 남아 있긴 하지만 이제라도 정신을 차렸으니 됐다. 연주야, 고맙다. 고맙구나…….”

“케엑, 큭…….”

연주는 제 손을 잡은 채 연신 고맙다는 말만 중얼거리는 오라비를 향해 무어라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사고 당시 구조 요청을 하다 목이 쉰 탓인지, 아니면 오랫동안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 못한 탓인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누님, 목이 마르십니까?”

인상을 쓰는 연주를 주의 깊게 살피던 윤이 탁자에서 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윤에게서 물그릇을 받아 든 신은 곧장 연주의 몸을 일으켜 제 품에 안고 그녀의 입에 아주 조금씩 물을 흘려 넣었다.

“하아…….”

형제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을 축인 연주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짚으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살아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제가 물에 뛰어들지 않았으면 정말 큰일이 날 뻔했습니다. 대체 그 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게…….”

“어젯밤에 호수에서 눈에 비녀가 꽂힌 시신 한 구가 발견됐습니다. 혹시 누님의 사고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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