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그러나 아무리 눈썰미가 좋은 연주라도 적하 행궁으로 온 지 겨우 이레째. 행궁에서 일하는 궁녀를 모두 알 수는 없다고 판단한 연주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좀 있으면 해가 지겠구나.’
연주는 외출하기 전 시간을 가늠하기 위해 창밖을 살피고는, 얇은 상앗빛 비단 외투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섰다. 봉래주는 거대한 호수 한가운데에 있는 섬이라, 해가 완전히 지고 나면 호수 바람이 매서울 터였다.
궁녀는 연주를 봉래주로 건너가는 나루터로 안내했다. 나루터에는 무명천으로 만든 차양을 세우고 환하게 등롱을 밝힌 작은 나룻배가 준비되어 있었다.
“소인이 봉래주까지 모시겠사옵니다.”
뱃머리에 앉아 있던 태감이 두 사람을 발견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태감의 차림새가 조금 이상했다. 태감의 옷을 입은 건 분명하나, 머리에 커다란 삿갓을 눌러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옷은 진짜인 것 같지만 저물녘이라 얼굴이 탈 일도 없는데 저렇게 큰 삿갓을 쓰고 있다니…….’
묘한 위화감을 느낀 연주가 배에 오르려던 걸음을 멈추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연주를 부축해 주던 궁녀가 표정을 흐리며 말했다.
“왜 그러시옵니까?”
“사공이 이 시간에도 삿갓을 쓰고 있는 게 신기해서 말이다.”
“군주마마, 이렇게 자꾸 시간을 지체하시면 만찬이 시작되기 전에 봉래주에 닿으실 수 없사옵니다. 황후마마께서 기다리실 테니 어서 배에 오르시지요.”
어색하게 웃은 궁녀는 대답 대신 서둘러 연주를 배 위로 떠밀었다. 연주는 이 상황이 어쩐지 석연치 않다고 느꼈지만, 모두 지엄한 황후의 명 때문이려니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선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걱정과 달리, 태감은 능숙한 솜씨로 노를 저어 봉래주를 향해 나아갔다.
‘노을이 참 아름답네.’
한시름 놓은 연주는 어느덧 서산으로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태양을 감상하며 잠시 아름다운 호수의 풍광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러나 연주가 주변 경치에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정해진 길을 따라 봉래주로 향하는가 싶던 배는 점점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보게, 봉래주는 저쪽인데 어째서 여기로 배를 몰고 온 것인가?”
“…….”
“대체 어디로 가는 겐가? 당장 뱃머리를 돌리게!”
뒤늦게 이상을 감지한 연주가 주변을 살피며 태감을 다그쳤다. 하지만 사공은 대답 없이 수풀로 우거진 인공 섬 뒤편으로 배를 몰았다.
‘무언가 잘못됐어.’
긴장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른 연주가 뱃머리에 있는 사공을 향해 일갈했다.
“나는 황후마마의 명을 받드는 몸이거늘. 나를 왜 이리로 데려온 것이냐!”
“……왜 너를 이리로 데려왔느냐고?”
드디어 노 젓기를 멈춘 사공이 천천히 삿갓을 벗었다. 그러고는 유리로 만든 의안을 빛내며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기 네 무덤을 만들어야 하거든.”
내 무덤이라고……?
찰나에 등골이 서늘해진 연주는 그제야 사공의 정체가 단순히 태감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태감의 정체가 무엇이든 연주는 반드시 이 상황을 벗어나야 했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가?”
“…….”
“돈 때문인가? 아니면 원한?”
연주는 사공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슬금슬금 몸을 뒤로 물리다 멈칫했다. 연주가 앉은 자리는 선미 끝.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어디 실컷 도망쳐 보려무나.”
연주의 눈 속에서 두려움을 읽은 사공이 킬킬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천천히 연주를 향해 걸어왔다. 연주는 선미에 몸을 바짝 붙인 채 궁지에 몰린 동물처럼 몸을 웅크렸다.
이제는 사공을 뚫고 뱃머리로 가지 않는 이상 물속밖에 달아날 곳이 없었다.
‘나는 수영을 할 줄 모르는데. 어쩌지?’
당황한 연주는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 서둘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땅거미가 져 버린 사방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새카만 물뿐이었다.
여기서 저를 도와줄 만한 사람이 있는 곳은 연회가 열리고 있는 봉래주뿐. 그러나 연주가 탄 나룻배는 봉래주에서 한참 떨어진 인공 섬 뒤에 있어서 여기서 도움을 요청한다고 한들 누군가 알아채기 어려웠다.
“살고 싶겠지. 하지만 너는 오늘 내 손에 죽는다. 그러니 얌전히 네 운명을 받아들여라!”
살길을 찾으려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는 연주를 가소롭게 내려다보던 사공이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와 연주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크윽!”
순식간에 목이 졸린 연주는 어떻게든 사공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공은 사지를 비틀며 살기 위해 애쓰는 연주가 영 귀찮은 듯, 아예 연주의 몸 위에 올라타 가냘픈 목을 부러뜨릴 듯 비틀기 시작했다.
“헌왕비께서 네게 꼭 전하라고 하셨다. 아무리 잘난 입도 죽으면 구더기를 씹게 될 뿐이라고.”
다음 순간, 숨이 달려 점점 정신이 혼미해져 가던 연주의 뇌리에 번뜩이는 기지가 스쳤다. 바로 제 머리 타래에 꽂힌 은비녀였다.
‘침착해. 침착해야 해.’
연주는 눈을 감은 채 오로지 손끝의 감각에 의지해 머리에 꽂힌 죽절잠(竹節簪)을 힘겹게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한순간에 두 눈을 번쩍 뜨고, 벌겋게 충혈된 사내의 한쪽 눈을 날카로운 비녀 끝으로 힘껏 찍었다.
“으아악!”
대바늘과 굵기가 비슷한 비녀다리는 사공의 눈을 깊이 파고들었다. 예상치 못한 연주의 반격에 당황한 사공이 벌떡 일어나 휘청거렸다. 눈을 찔린 고통도 고통이지만, 그나마 멀쩡했던 눈마저 잃었다는 좌절감이 그를 덮쳤다.
“이 망할 계집! 죽여 주마!”
앞도 보이지 않는 상태로 배 위를 쉴 새 없이 휘젓고 다니던 사공이 짐승처럼 포효했다. 사공을 피해 몸을 일으킨 연주는 최대한 자세를 낮췄다. 그러곤 위태롭게 흔들리는 사공의 몸을 있는 힘껏 뱃머리 쪽으로 밀었다.
“죽어!”
풍덩-!
중심을 잃은 사공은 그대로 호수 속으로 빠졌다. 일순 뒤집힐 것처럼 한쪽으로 크게 기울었던 배가 요란한 물소리와 함께 흔들렸다. 연주는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해 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살려 줘! 살려 달라고!”
배 근처에서 물에 빠진 사공이 비명을 지르며 허우적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사공의 간절한 외침은 얼마 못 가 육중한 육신과 함께 깊은 물속으로 사라졌다.
“…….”
쉼 없이 요동치던 배는 이윽고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해졌다. 배의 흔들림이 잦아들자, 돌아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던 연주가 왈칵 눈물을 터뜨렸다.
배 위에 누워 올려다본 하늘에는 날카로운 조각달이 걸려 있었다. 칠흑 같은 하늘을 비추는 하얀 달. 그 속에는 부모 형제의 얼굴, 황후와 어린 공주의 얼굴, 그리고 정엽의 얼굴이 있었다.
‘기꺼이 나를 죽여 주겠다는 말까지 한 사람인데…….’
방금 죽음의 위기를 피한 탓일까. 아무렇지 않게 저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던 정엽의 얼굴이 유독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 나는 살 거야.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라고.’
정신을 추스르고 있노라니 옷 속을 파고드는 차디찬 바람이 느껴졌다. 해가 완전히 지고 나자 호수 위에 부는 바람도 얼음처럼 차가워진 모양이었다.
“호수 밖으로 나가야 해.”
힘겹게 배 위에서 몸을 일으킨 연주가 노를 찾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배가 심하게 흔들리던 중 노가 유실되기라도 한 것인지, 뱃머리에 있어야 할 노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노가 어딜 갔지? 배를 움직여야 하는데…….”
잠시 고민하던 연주는 급한 대로 차디찬 물속에 팔을 깊이 넣고 휘젓기 시작했다. 일단 사람들이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곳으로 나가는 게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연주는 쉴 새 없이 왼편, 오른편을 오가며 뱃머리를 돌렸다. 간신히 인공 섬을 돌아 나오니, 저 멀리 한창 만찬이 진행 중인 봉래주가 보였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팔을 휘저어 봉래주까지 가는 건 무리야. 그렇다면…….’
연주는 어떻게든 봉래주에 있는 사람들의 눈에 띄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양팔을 크게 흔들며 목청이 터지도록 외쳤다.
“여기 사람이 있소! 여기 사람이 있소! 살려 주시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선지 봉래주 주변에 늘어선 군사들은 미동도 없이 호위에 열중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평소 큰 소리를 낼 일이 없다 보니 목소리도 금세 다 쉬어 버렸다.
‘어떻게 하지?’
연주는 칼칼한 목을 가다듬으며 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차양 기둥에 매달린 등불이 연주의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등불을 흔들면 군사들이 나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연주는 냉큼 기둥에 걸린 등롱을 내려 높이 들고 좌우로 흔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대한 호수에 비해 등롱이 너무 작은 탓인지, 이번에도 봉래주 쪽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이것보다 더 큰불이 필요해……!”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머리를 굴리던 연주가 다시 한번 배 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연주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배 위에 세워진 간이 차양이었다.
두꺼운 천을 엄지와 검지 사이에 두고 문질러 보니, 다행히 차양은 불에 잘 타는 무명천을 여러 번 겹쳐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한번 불이 붙으면 이 차양도 순식간에 재가 돼 버리고 말 터였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연주는 속치마를 제외하고 자신이 입고 있던 치마를 모두 벗어 차양 위에 덮듯이 올렸다. 그런 뒤, 등롱 속 촛불을 비단 치마로 옮겨 불길이 타오르기를 기다렸다.
“됐다!”
연주의 염원대로 비단 치마와 차양은 점차 거대한 횃불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덕분에 멀리 있던 군사들도 드디어 이상을 감지했는지, 물가에 늘어선 봉래주의 등롱들이 바삐 움직이는 게 보였다.
“여기! 여깁니다!”
연주는 봉래주에 있는 군사들에게 배에 사람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 남겨 둔 밝은 상아색 외투를 양손으로 펼쳐 크게 흔들었다. 필사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봉래주에서 여러 대의 조각배가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휴, 이제 됐어…….”
구조대가 이쪽으로 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한시름 놓은 연주가 외투를 잠시 내려놓고 뱃머리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이대로 군사들의 도움을 받아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도 잠시…….
우지끈-!
갑자기 등 뒤에서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비단 치마와 무명 차양이 활활 타오르는 것으로 모자라, 차양을 지탱하고 있던 나무 기둥에까지 불이 옮겨붙어 연주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