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마마께서 빌려주신 옷을 돌려 드리려고 왔사옵니다.”
“그래?”
갑작스러운 연주의 방문에 긴장을 감추지 못하던 헌왕비가 대꾸 없이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옷이야 사람을 보내 돌려주어도 될 것을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온 저의가 미심쩍었다.
“흠, 일단 앉게.”
“예, 마마.”
연주는 헌왕비가 가리키는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헌왕비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손님을 위한 차 한잔조차 내놓지 않았다.
아무리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손님에게는 물이라도 한잔 대접하는 것이 예의건만. 속으로 혀를 찬 연주가 씁쓸함을 감추며 예의 미소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제 마마께서 옷을 빌려주신 덕분에 실로 오랜만에 즐겁게 춤을 추었사옵니다.”
즐겁게 춤을 췄다? 그럴 리가.
헌왕비가 흔들리는 눈으로 연주를 보았다. 어제 연주가 모두의 앞에서 망신당하도록 옷 안에 바늘을 숨겨 둔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였기 때문이다.
‘이 계집이 대체 무슨 꿍꿍이로 바늘에 찔리고도 이토록 태연하게 군단 말인가?’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으나, 헌왕비는 이내 천연덕스럽게 표정을 바꾸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이 사람도 소문으로만 듣던 낙신무를 직접 보게 돼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네.”
“춤이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다시 한번 헌왕비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연주가 궁녀에게 무복을 넘겼다. 하지만 궁녀에게서 옷을 건네받은 헌왕비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옷을 들춰 구석구석 살피는 데 혈안이었다. 마치 없어선 안 되는 것을 찾는 사람처럼 집요하기까지 한 모습에선 독기마저 느껴졌다.
‘역시 헌왕비는 처음부터 옷에 바늘이 들어 있단 걸 알고 있었어.’
헌왕비의 행동을 통해 예상대로 그녀가 옷에 바늘을 넣어 놓은 범인이란 걸 확신한 연주가 희미하게 웃었다. 이제 싸움을 걸어온 자가 명확해졌는데, 저라고 응수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아, 한데 마마…….”
“왜 그러는가?”
“앞으로는 아랫사람들에게 원망을 사지 않도록 처신을 바로 하시는 게 좋겠사옵니다.”
아랫것들에게 원망을 사지 않도록 조심해라? 졸지에 아랫것들을 괴롭히는 못된 상전 취급을 당한 헌왕비가 인상을 구기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
“제가 어제 마마께서 내주신 옷을 입고 춤을 추다가 바늘에 찔리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사고?”
“예, 이것을 좀 보시옵소서.”
연주는 어제저녁 바늘을 갈무리해 뒀던 손수건을 꺼내 가까이 있던 궁녀에게 건넸다. 궁녀가 헌왕비에게 전한 손수건에는 마른 피가 묻은 바늘이 꽂혀 있었다.
연주가 거리낌 없이 자신에게 바늘을 내미는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헌왕비가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연주는 초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마마께서 범인을 찾으시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따로 보관해 둔 것입니다. 행궁에서 누가 감히 이런 무도한 짓거리를 했는지는 몰라도, 상전을 해코지한 죄는 엄히 다스려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연주는 일부러 ‘상전’이라는 대목을 힘주어 말했다. 얼핏 들으면 옷의 주인인 헌왕비를 걱정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이미 헌왕비가 옷에 바늘을 넣은 범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연주로선 선전 포고에 불과했다.
이는 현재 자신이 연왕부를 나와 군주로서 대우를 받고 있지만, 연왕부에 새 안주인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제가 황실의 맏며느리이자 손윗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연주의 말은 헌왕비의 귀에 전혀 다르게 들렸다. 그녀의 남편인 헌왕이 연주에게 순금 봉황 비녀를 보내 사실상 미래의 황후 대접을 한 게 바로 얼마 전이었기 때문이다.
‘이년이 언젠가 다시 내 머리 위에 올라앉을 생각인 게로구나. 나를 짓밟고 황후가 될 생각인 게야!’
연주의 도발에 심기가 상한 헌왕비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연주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매끄럽게 입을 열었다.
“평소 의복을 관리하는 궁인부터 마마의 주변을 스쳐간 사람이라면 누구든 의심해 보시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원한이라는 것이 본디 별것 아닌 사소한 것에서부터 생겨나는 법 아니옵니까?”
“충고는 고맙네. 한데 어찌 옷에서 바늘이 나온 것이 이 사람을 향한 원한 때문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겠는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평소 처신을 바로 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자네이지 않은가!”
지금 헌왕비의 눈에 연주는 반성을 모르는 사람처럼 천연덕스럽기만 했다. 연주의 태도가 가증스럽다고 느낀 헌왕비가 결국 언성을 높였다.
“한때는 시동생이었던 내 남편과 산중에서 밤을 보낸 사람이 누군가? 또 연회장에서 요사스러운 춤이나 추며 사내들의 혼을 빼 놓는 건 누구고? 다른 이들에게 원망을 살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내가 아니라 바로 자네일세!”
말을 할수록 감정이 격해진 헌왕비는 분기를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하지만 연주는 헌왕비가 하는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외람되오나, 왕비마마께선 무언가 착각을 하고 계신 듯하옵니다.”
“뭐라?”
“어제 제가 춤을 추게 된 것은 순전히 마마의 천거 덕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마의 옷을 입게 된 것 또한 마마께서 저를 돕겠다 나서셨기 때문이지요.”
마치 자신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듯한 연주의 말에 정곡이 찔린 헌왕비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하지만 헌왕비가 어떤 태도를 보이든 이제 와 흔들릴 연주가 아니었다.
“마마께서 일부러 폐하께 제 춤을 천거하고 바늘이 든 옷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면, 어찌 옷 안에서 나온 바늘이 저 때문이겠사옵니까?”
“그럼 이게 다 나 때문이라는 소리냐?!”
대화가 이어질수록 눈에 띄게 흔들리던 헌왕비가 당황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뒤늦게 모든 것이 연주의 계책이란 걸 깨달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옷을 네게 가져다주던 궁녀가 너에게 원한이 있는 자와 짜고 옷에 바늘을 넣었을지도 모르지 않느냐!”
“그렇담 제게 원한을 가진 자가 원한을 갚기 위해 마마를 이용했다는 뜻이옵니까? 어쨌든 이 일이 커지면 가장 먼저 마마께서 범인으로 의심을 받으실 텐데요.”
“그야 그렇지만…….”
헌왕비는 끝내 연주의 반박에 대꾸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차던 연주가 차분하게 말했다.
“예, 제게 원한을 가진 다른 누군가가 범인이라고 해 두지요. 하지만 마마께서 요사스럽다 비난하신 제 춤은 마마께서 먼저 천하제일이라고 추켜올린 것입니다.”
“…….”
“또 제가 헌왕 전하와 함께 향산에 갔던 것은 전하께서 직접 부탁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건 소성궁 앞을 지나던 궁녀 모두가 보았으니 증명이 되겠지요.”
“…….”
“마마, 조금 더 헌왕 전하를 믿어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졸지에 자신의 남편조차 믿지 못하는 속 좁은 여자가 되었지만, 한번 꿀 먹은 벙어리가 된 헌왕비는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연주를 향한 적개심에 눈이 멀어 제 마음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연주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소싯적 마마께 연정을 품은 전하께서 백 일 동안 구애한 끝에 혼인을 성사시킨 것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입니다.”
“…….”
“저는 헌왕 전하를 마음에 품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이 없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저를 믿지 못하겠거든 마마를 향한 부군의 마음을 믿으세요. 자고로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는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부부라면 그래야 한다? 연주의 일갈을 곱씹던 헌왕비가 비단 치마를 움켜쥔 채 울분을 삭였다. 연왕과 이혼하고 왕부를 뛰쳐나온 주제에 누가 누굴 가르치려 든단 말인가?
“그럼 소녀는 이만 물러나겠사옵니다. 편히 쉬시옵소서.”
“…….”
할 말을 모두 마친 연주는 예의 도도한 얼굴로 예를 갖추고 헌왕비의 처소를 나섰다. 홀로 남겨진 헌왕비는 신경질적으로 제 옆에 있던 화병을 연주가 사라진 문간으로 내던졌다.
쨍그랑-! 요란하게 조각나는 화병처럼 헌왕비의 인내심도 산산조각이 났다.
‘적당히 혼을 내 주려고 하였건만 그래서는 아니 되겠구나. 저년을 살려 두었다간 언젠가 내가 잡아먹히겠어!’
헌왕비는 붉으락푸르락하며 고운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이날 연주와의 대화에서 깊은 수치심과 분노를 느낀 헌왕비는 연주가 더 이상 이승에 발붙이고 살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 * *
며칠 후 연주는 공주가 임서할 체본을 만들기 위해 홀로 행궁에 남아 먹을 갈았다. 그렇게 서예에 집중하던 중, 연주는 한 궁녀로부터 뜻밖의 부름을 받았다.
“황후마마께서 군주를 급히 찾으시옵니다.”
“황후마마께서?”
“예, 서두르시지요.”
그러나 궁녀의 말과 달리 황후는 오늘 황제 후궁과 외명부 부인들을 거느리고 봉래주로 건너가 희대에서 연극을 감상한 뒤 만찬을 베풀 예정이었다. 따로 연주를 찾을 일이 없다는 뜻이었다.
“황후마마께서 정말 나를 찾으신 것이 맞느냐? 지금쯤 희대에서 한창 연극이 공연 중일 시각인데, 무슨 일로 나를 찾으신다는 것이냐?”
“황후마마께서 연극이 끝난 뒤 진행될 만찬을 점검해 달라고 하셨사옵니다.”
궁녀의 대답은 거짓이라고 여기기 어려울 만큼 매끄러웠다. 잠시 고민하던 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찬 준비라면 이미 여러 번 점검을 마쳤지만, 내명부와 외명부가 모두 모이는 자리인 만큼 황후가 각별히 신경을 쓴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일단 알았다.”
연주는 서둘러 지필묵을 정리하는 한편, 궁녀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만일에 대비해 자신을 찾아온 궁녀의 얼굴을 기억해 두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연주를 찾아온 궁녀는 지금껏 황후의 주변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한데 너는 어디에서 일하는 궁녀냐?”
“가, 갑자기 그건 왜……. 소인은 행궁에서 일하는 궁녀라 잘 모르실 것이옵니다.”
“그래?”
연주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궁녀의 행색을 다시 천천히 훑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