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수선화처럼 가냘픈 연주의 몸이 물결에 휩쓸리듯 유연하게 움직였다. 허공을 노니는 섬약한 발끝에 고조되는 음률이 풀잎의 이슬처럼 굴러떨어졌다. 연주는 낮아지는가 하면 높아지고, 사뿐 내려서는가 하면 훌쩍 솟구치며 모두의 찬사를 불러일으켰다.
사랑에 취한 듯 울렁일 때마다 비단 치마를 장식한 수정 구슬이 빛을 받아 반짝이고, 풍성한 치맛단이 만개한 꽃잎처럼 나풀거리고…….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여울을 지나 낙수를 건너온 수선화는 마침내 왕의 발치에 이르러 사랑을 속삭였다.
“오직 그대만이 나의 사랑이라. 부디 나를 잊지 마세요.”
왕을 향해 어여쁘게 웃음 짓는 연주의 눈 아래 수줍게 볼우물이 파였다. 그녀는 짧은 만남에 깊은 정을 건네고는 홀연히 무대 중앙으로 멀어졌다.
이제 왕에게 남은 건 소매를 적신 수선화 향 한 줌과 비단 버선 끝에 일던 먼지뿐이었다.
“…….”
듣는 것만으로 숨 막히던 비파 가락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춤을 마친 연주가 처음 단상에 오른 때처럼 흐트러짐 없이 예를 갖추었다.
“짐이 오늘에야 낙신을 보았구나!”
황제의 찬사가 경탄에 잠겨 고요해진 연회장을 갈랐다.
깊은 황홀감에 잠겨 있던 정엽은 그제야 오랫동안 멈추고 있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다행히 정신은 돌아왔지만 호흡을 너무 오래 참았던 탓인지, 아니면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일으키는 착각 때문인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손이…….’
연주가 춤을 추는 내내 주먹을 얼마나 꽉 쥐고 있었는지, 손바닥에는 반달 같은 손톱자국이 깊게 파여 있었다.
‘성미는 못됐지만 그래도…….’
곱긴 하군.
지금껏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춤사위에 이토록 깊이 몰입해 본 적이 없었던 정엽은 너무나 쉽게 연주의 춤 솜씨를 인정하고 마는 스스로가 낯설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연회장은 여전히 박수갈채 속이었고, 무대 위의 연주는 여전히 눈부시도록 아리따웠다. 그러나 흡족하기 이를 데 없는 풍경 속에는 정엽의 신경을 긁는 오점이 있었다.
정엽의 맞은편에 연주를 향해 형형히 눈을 빛내는 승냥이 한 마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게 아니라, 망가뜨려서라도 소유하고 말겠다는 눈빛이로군.’
미동도 없이 연주를 향해 뜨거운 눈빛을 보내는 헌왕을 발견한 정엽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문득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저 재수 없는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도대체 제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녀석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정엽은 지금껏 헌왕이 연주를 탐내는 이유가 순전히 제 심기를 거스르기 위해서일 거라고만 여겨 왔다. 따라서 정엽은 헌왕이 연주를 향한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 상황이 무척 혼란스러웠다.
‘이젠 나 때문이 아닐 수도 있는 건가?’
문득 좋지 않은 예감에 사로잡힌 정엽이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흔들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애써 잡념을 털어 낸 정엽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텅 빈 무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헌왕을 향해 살벌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기대와 달리 완벽하기만 했던 연주의 무대를 모두 지켜본 헌왕비는 연주가 사라진 방향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하는 제 남편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 * *
다시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리를 옮긴 연주는 작은 의자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헌왕비의 간계에 휘말려 무대에 오르기는 했지만, 어쨌든 남부끄럽지 않을 만큼 만족스러운 춤을 추었고 황제의 찬사도 받았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온몸을 감쌌다.
‘그래도 결국 보여 주기는 했네.’
어머니 평해왕비는 연주가 시집갈 때 멀리 떠나서도 낙신무만은 잊지 말고, 춤을 추려거든 남편 앞에서만 추라고 신신당부했었다.
하지만 남편이었던 정엽은 혼인 후 자주 출정을 떠났고, 연주는 자연히 정엽에게 춤을 선보일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부부로 지낼 때도 보여 주지 못한 춤을 이혼하고서야 보여 주게 되다니. 참 얄궂은 일이네.’
피로감에 급격하게 늘어지는 몸을 느끼며 잠시 눈을 감았던 연주가 인기척을 감지하고 다시 눈을 떴다. 문간에는 공연 전 연주가 옷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도와준 궁녀가 눈을 빛내며 서 있었다.
“너로구나.”
“소인은 정말로 낙신이 강림한 줄 알았사옵니다! 마마, 어찌 그리 아름다우셔요?”
“칭찬은 됐으니 옷 갈아입는 걸 좀 도와 다오.”
“네, 마마!”
연주는 한시라도 빨리 처소로 돌아가 쉬고 싶다는 생각에 궁녀를 재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 순간…….
“아!”
찌릿한 통증이 옆구리를 파고들어 연주는 저도 모르게 몸을 비틀며 인상을 찌푸렸다.
“마마, 왜 그러세요?”
난데없는 비명에 깜짝 놀란 궁녀가 연주의 몸 곳곳을 살폈다. 하지만 궁녀의 눈에는 도통 보이는 것이 없었다.
“왜 그러시지. 마마, 어디가 안 좋으세요?”
“옆구리가 따끔하구나. 옷 안에 날카로운 게 들어 있지는 않은지 확인해 다오.”
연주의 부탁에 조심스레 연주의 허리 부근을 살펴보던 궁녀가 난처한 듯 숨을 몰아쉬었다. 역시나 눈으로만 문제점을 찾아내는 것은 무리였다.
“잠시 실례하겠사옵니다.”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양해를 구한 궁녀가 연주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그러자 눈에는 보이지 않던 무언가가 따끔하게 손끝을 찌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바늘이 박힌 것 같사옵니다.”
“당장 뽑아낼 수 있겠느냐?”
연주의 물음에 옷에 박힌 바늘을 더듬던 궁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바늘이었다. 행여 일이 잘못되어 상전의 몸에 상처가 덧나기라도 하는 날엔…….
자신이 아는 한에서 가장 끔찍한 상상을 펼치던 궁녀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소인은 손에 땀이 나서 안 되겠사옵니다. 어쩌지요?”
“이를 어쩐다…….”
움직임을 최소화한 채 침착하게 생각을 이어 나가던 연주가 궁녀에게 명령했다.
“그럼 주변을 뒤져 실을 찾아오너라.”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궁녀는 실을 찾기 위해 방 안의 가구를 샅샅이 뒤졌다. 그동안 연주는 가까이 있는 탁자를 짚고 주변을 살폈다. 이 방은 연회에서 공연을 준비하는 자들에게 내주는 거처이니 공연에 필요한 옷이나 소품을 수선해야 할 상황에 대비해 어딘가에 반드시 반짇고리가 있을 터였다.
“마마, 실을 찾았사옵니다!”
“실을 바늘귀에 꿰고 바늘의 머리 부분을 실로 칭칭 감거라.”
궁녀는 재빨리 연주가 시키는 대로 바늘을 실로 단단히 고정한 뒤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정말, 이대로 뽑습니까?”
“그래.”
“하오시면 뽑겠습니다.”
연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를 악물자, 궁녀는 긴장한 얼굴로 힘껏 실을 잡아당겨 바늘을 뽑아냈다. 바늘이 얼마나 깊이 박혔던지 옷 위로 금세 붉은 핏방울이 돋아났다.
연주는 뒤늦게 다친 옆구리를 짚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궁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마마, 태의를 부를까요?”
“이만한 일로 그럴 필요 없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좀 전의 낙신무를 보고 연주에게 흠뻑 매료된 궁녀가 탄식했다. 그러나 어쩌면 이 일은 헌왕비가 순순히 제 옷을 연주에게 내줄 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내가 좀 더 조심했다면 피할 수 있었을 일이다.”
아마 헌왕비는 제가 바늘이 숨겨진 옷을 입고 춤을 추다가 무대를 망치길 바랐으리라. 하지만 궁중에서는 생각보다 사람을 해치는 일이 자주 있고, 이만한 일을 음모라 칭한다면 세상에 음모가 아닌 것이 없었다.
“마마, 한데 어찌 바늘이 몸에 박힌 줄도 모르고 춤을 추셨사옵니까?”
“춤을 추는 데 온 정신이 팔려 그런 것 같구나.”
“하기야, 마마께선 정말 낙신과 혼연일체가 되신 듯했사옵니다!”
연주의 도량과 인품에 다시 한번 반한 궁녀가 호들갑을 떨며 연주를 추켜세웠다. 그러고는 누가 시키기도 전에 연주가 갈아입을 옷을 가져와 그녀 앞에 섰다.
“마마, 소인이 옷을 갈아입혀 드리겠사옵니다. 아, 그리고 이건 아까 반짇고리를 찾다가 발견한 것인데 괜찮으시다면 함께 발라 드리겠사옵니다.”
궁녀가 내민 것은 상처에 바르는 연고였다. 뚜껑을 열어 연고의 냄새와 질감을 확인한 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구나.”
“별말씀을요.”
연주는 궁녀의 들뜬 목소리에 작게 미소 지었다. 궁녀는 섬세한 손길로 연주의 상처 위에 연고를 바르고 깨끗한 헝겊을 작게 잘라 덧대어 준 뒤, 연주의 옷을 갈아입혀 주었다.
“이제 다 되었사옵니다.”
“그래, 고맙구나.”
궁녀 덕분에 별 탈 없이 위기를 모면한 연주는 쉴 새 없이 야무지게 주변을 정리하는 궁녀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후 연주가 벗은 무복을 정리해 가지런히 개어 둔 궁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한데 마마, 이 옷은 어찌할까요?”
“옷?”
“헌왕비마마께서 군주마마께 내주신 옷 말이옵니다. 소인이 헌왕비마마께 가져다 드릴까요?”
“음…….”
어찌하는 것이 좋을까.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넘어가기에는 헌왕비의 행동이 괘씸했다. 그렇지 않아도 행궁에 도착하자마자 저를 하인처럼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망신을 주었던 헌왕비가 아닌가.
“그 옷은 내가 직접 헌왕비께 갖다 드리는 것이 좋겠구나. 그냥 두거라.”
“예, 마마. 하오시면 소인은 그만 물러가겠사옵니다.”
연주를 향해 극진하게 예를 갖춘 궁녀가 뒷걸음질로 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연주는 궁녀가 탁자 위에 놓아두고 간 피 묻은 바늘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그것을 제 손수건에 꽂아 갈무리했다.
다음 날, 연주는 헌왕비가 빌려줬던 무복을 챙겨 헌왕비의 처소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