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연주는 의아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은 정엽을 살폈다. 하지만 의외로 정엽은 연주가 아닌 무대 위 공주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 행궁에서 내게 적개심을 드러낼 만한 사람은 정엽뿐인데. 그럼 대체 누구지?’
어쩐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연주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연회석에 앉은 사람이 너무도 많아서 제게로 날아든 시선이 누구에게서, 또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와아!”
그사이 공주의 무대가 끝나 사람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연주가 무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공주는 무대 아래로 내려와 상석에 앉은 황제에게 예를 갖추었다.
“부끄러운 실력이지만, 황제 폐하께 이 춤을 바칠 수 있어 영광이옵니다.”
“부끄럽다니. 네 춤은 아주 훌륭했다.”
“과찬이시옵니다.”
공주는 겸손하게 몸을 낮췄다. 그러자 어떻게든 황제에게 제 여식을 자랑하고 싶었던 조나라의 왕이 말을 얹고 나섰다.
“폐하, 저 아이는 제가 가장 아끼는 보물입니다. 혜음의 춤사위는 천하에 따를 자가 없지요. 하하하!”
“호오, 천하에 따를 자가 없다?”
“예, 그렇습니다, 폐하.”
고작 소국의 왕 주제에 천하를 논하다니?
거침없는 왕의 언행에 심기가 상한 황제가 묘한 표정으로 조나라의 왕을 돌아보았다. 신이 나서 여식의 자랑을 늘어놓던 왕은 당황한 얼굴로 분위기를 수습하려 애썼다.
“아, 물론 대화국에도 제 딸 못지않은 재예를 갖춘 여인이 있겠지요. 그럼요.”
하지만 한번 심사가 틀어진 황제는 좀처럼 어심을 돌릴 줄 몰랐다. 황제의 노기에 연회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어 감은 물론이었다. 상황을 예의 주시하던 헌왕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조나라 왕께선 우리 대화국을 몰라도 한참 모르시는군요. 우리 대화국에는 이 작은 연회장 안에도 남다른 재예를 갖춘 미인들이 아주 많습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예. 특히 황제 폐하의 며느리였던 승설군주의 낙신무(洛神舞) 솜씨는 천하제일이라는 수식어로도 부족할 정도라지요.”
헌왕비는 연주를 가리키며 ‘황제의 며느리’라는 말을 강조했다.
타국의 왕이 보는 앞에서 일부러 나를 지목하다니? 심상치 않은 조짐을 느낀 연주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하지만 상황은 헌왕비의 의도대로 흘러갔다.
“낙신무요? 본 왕이 아직 낙신무를 본 적은 없지만 이름만으로도 아주 아름다운 춤이라는 것은 알겠습니다. 왕비의 말씀을 들으니 어떤 춤인지 더욱 궁금해지는군요.”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승설군주에게 낙신무를 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헌왕비는 기막혀 하는 연주를 흘끗 바라보고는 몸을 돌려 상석에 앉은 황제를 향해 살짝 무릎을 굽혔다.
“부황께서는 어찌 생각하시옵니까?”
“그러고 보니 짐도 군주의 춤 솜씨를 직접 본 적이 없긴 하구나.”
나더러 천한 무희처럼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춤을 추라고?
졸지에 사람들 앞에서 낙신무를 추게 된 연주가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이미 황제가 넌지시 춤을 선보이라는 뜻을 전한 마당이라, 이를 거절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 순간 정엽이 황제 앞으로 나섰다.
“부황, 소자의 생각에 승설군주가 이 자리에서 춤을 선보이는 건 온당치 못한 일로 보이옵니다.”
연주의 반응을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던 모든 시선이 정엽에게 쏠렸다.
“온당치 못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헌왕비는 옛정을 생각해 승설군주를 천하제일이라고 추켜세운 모양이지만, 사실 군주는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아니옵니까? 한데 그런 사람이 춤을 선보이다니요. 이는 대화국을 찾은 손님들에게도 예의가 아닌 듯싶사옵니다.”
헌왕비가 이토록 연주에게 춤추기를 종용하는 데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설령 헌왕비에게 그럴 만한 이유가 없다고 해도 정엽에게 연주는 한때나마 제 아내였던 사람이었다.
연주의 춤 실력이 얼마나 잘났는지는 모르나, 모두의 이목이 모인 자리에서 춤을 추라는 것은 명백한 조롱. 게다가 혹여 연주가 춤을 추다 실수라도 저지른다면 이는 연주를 향한 조롱을 넘어 그녀를 아내로 맞았던 자신에게도 망신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일은 절대로 두고 볼 수 없어.’
정엽은 황제를 향해 더욱 허리를 숙이며 제 강건한 의지를 전했다. 그러자 상황을 지켜보던 헌왕비가 매끄럽게 말을 얹었다.
“옛정을 생각하시는 건 제가 아니라 연친왕 전하이신 것 같사옵니다. 승설군주의 낙신무 실력은 전하와 부부의 연을 맺기 전부터 유명했던 것을요.”
“군주의 춤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이 연회는 폐하께서 봄 사냥을 맞아 우리 대화국을 찾은 외국 사절들을 위해 베푸시는 자리오. 가족들끼리 편히 즐기는 연회와는 다르지 않소?”
“그래서 신첩이 폐하께 허락을 구하지 않았사옵니까. 아무래도 연친왕 전하께서는 부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혼자만 간직하고 싶어서 이러시는 모양이군요.”
“그게 무슨…….”
우습게도 정엽은 연주와 혼인했던 3년간 그녀가 춤을 추는 모습 따위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춤을 추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고백할 수도 없고. 달리 할 말이 없어진 정엽이 입을 다물었다.
장내가 고요해지자, 정엽과 헌왕비의 언쟁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황제가 연주에게 화살을 돌렸다.
“재미있구나. 하면 승설군주는 어찌 생각하느냐?”
“헌왕비께서 소녀의 재주를 기억해 주시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사실 소녀의 춤 실력은 이 자리에서 선보일 만큼 뛰어나지 않사옵니다.”
“그러하냐?”
“예. 게다가 연회에서 춤을 추게 될 것이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하여 제대로 된 무복(舞服)조차 챙겨 오지 않았사옵니다. 하오니…….”
어떻게든 춤추기를 피해 보고자 연주가 황제 앞에서 그럴싸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연회 내내 연주에게 제가 준비해 온 무복을 입힐 기회만 노려 온 헌왕비가 화사하게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승설군주, 무복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게도 있으니까요.”
“그럼 군주가 춤을 추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겠구나. 귀한 손님이 모인 자리이기는 하지만 다 한 가족이라 생각하고 마음 편히 춰 보아라.”
“……폐하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잠시 옷을 갈아입고 오겠사옵니다.”
결국 공연을 피할 수 없게 된 연주가 힘없이 물러났다. 어떻게든 상황을 막아 보려 애썼던 정엽 역시 맥이 빠지긴 마찬가지였다.
“젠장.”
정엽은 자리에 털썩 앉아 연거푸 술잔을 기울였다. 잠시 후, 정엽은 의상을 갈아입고 무대 중앙으로 나온 연주를 보고 다시 한번 욕설을 내뱉었다.
헌왕비가 엉뚱한 옷을 보내 연주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염려는 기우에 불과했지만, 이번에는 무복을 갖춰 입은 연주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운 게 문제였다.
“…….”
환한 등롱 아래 은실로 짠 비단으로 온몸을 감싼 연주는 따스한 아침 햇살처럼 빛났다. 거기다 탐스러운 가슴을 모으고 가느다란 허리를 한껏 조인 자태는 또 어떤가. 먼 옛날 제왕의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었다는 절세가인을 무색하게 만들 만큼 교태가 넘쳐흘렀다.
이 상황이 짜증스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고. 정엽은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저도 모르게 몸을 곧추세웠다. 그러고는 연주의 숨결 하나 몸짓 하나에 본능적으로 온 신경을 집중했다.
“후…….”
연주는 길고 풍성한 속눈썹을 내리깔고 차분하게 숨을 골랐다. 그런 뒤 함께 무대에 오른 악공을 향해 가볍게 눈짓을 보냈다. 오가는 눈빛 한 번에 노련한 악공의 손가락이 산뜻하게 비파 위를 노닐자 장내에 은은한 선율이 울려 퍼졌다.
때로는 온화하게 흘러내리고, 또 때로는 우아하게 튀어 오르는 선율의 정체는 진사왕을 사랑한 낙신의 이야기를 담은 낙신곡(洛神曲)이었다.
* * *
연주는 힘 있게 기나긴 소매를 떨쳐 그 끝에 영롱한 가락을 적셨다. 단 한 번의 동작으로 순식간에 낙신에 몰입한 연주는 강물처럼 흐르는 선율을 따라 사뿐사뿐 보이지 않는 물결을 딛기 시작했다.
연주의 섬세한 발끝에서 일어나는 잔잔한 파문에 기러기가 놀라 날아오르고, 그 날갯짓에 무성한 소나무가, 서리 맞은 국화가 차례로 깨어나는 듯한 환상이 무대 위에 펼쳐졌다.
“…….”
정엽은 꿈을 꾸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숨을 죽였다. 그사이 연주는 소란을 일으켜 부끄러워진 낙신처럼 발그레한 홍안을 넓은 소매 속에 숨겼다가, 흘깃 뒤를 돌아보며 교태로운 눈빛을 던졌다.
낙수(洛水) 너머에는 낙신이 사랑하는 왕의 관옥이 빛났다. 재주 많은 헌헌장부와 아리따운 여신의 만남이라. 비록 물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어도 둘의 모습은 한 쌍의 비익조처럼 흐뭇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사람이 어찌 저리…….’
연주는 태산 같은 왕의 위엄에 설레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듯 위태롭게 물결 위를 노닐었다. 버들가지 같은 허리가 무지개처럼 유연하게 휘어지고, 긴 소맷자락은 물그림자가 되어 하늘하늘 흩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연인이어도 낙신은 왕과 달리 물가에만 발이 묶인 운명이라. 연주는 이내 제 처지를 비관한 낙신처럼 수풀 속 바위 위에 쓰러져 가련한 눈물을 뿌렸다.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는 물로만 피어나는 수선화가 푸릇푸릇 솟아났다.
‘대체 어디서 수선화 향기가……?’
연주의 춤사위에 푹 빠진 정엽은 맡아질 리 없는 달콤한 수선화 향기에 취했다. 이윽고 낙신은 왕을 향한 제 마음을 담아 수선화 한 송이를 꺾어 강물에 띄웠다.
다음 순간 청초한 수선화 한 송이로 변한 연주가 낙수 위로 고꾸라지듯 몸을 기울였다. 가녀린 목, 아담한 어깨, 수굿이 숙인 연주의 얼굴은 어여쁜 꽃봉오리처럼 순진한 연정을 품은 것도 같았다.
‘연랑, 사랑해요.’
정엽은 그 청아한 자태에서 언젠가 수줍게 사랑을 고백하던 연주의 속삭임을 떠올렸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연주는 절정으로 치닫는 음률에 온몸을 맡긴 채 완전히 속세와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