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연주는 난데없는 소란에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란의 진원지는 푸른 파초 잎이 시원하게 뻗은 화단을 사이에 둔 건너편 회랑이었다.
“그 패물함에 담긴 보석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아느냐?”
“송구하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왕비마마!”
“그 안에 든 건 네년의 비천한 목숨을 골백번 팔아도 구할 수 없는 것이다! 패물함을 들었으면 응당 걸음걸이, 숨소리 하나까지 조심했어야지!”
벌써 행궁에 도착한 외명부 부인이 있나? 연주는 긴 화단을 돌아 반대쪽 회랑 끝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제야 소란을 일으킨 주인공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 여인은…….”
털이 눈처럼 하얀 애완견 덕분에, 연주는 멀리서도 단박에 헌왕비를 알아보았다. 아무래도 어린 궁녀가 손끝이 여물지 못해서 패물함을 옮기다 실수를 저지른 모양이었다.
궁녀가 패물을 잃어버리거나 망가뜨린 것도 아닌 것 같은데, 헌왕비는 어째서인지 당장 어린 궁녀를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사납게 굴고 있었다.
왈왈! 왈!
게다가 품에 안긴 애완견은 주인의 높아진 언성에 흥분하여 당장 궁녀의 머리를 물어뜯을 듯 짖어 대고 있었다. 연주는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 소란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사이 심기가 더욱 불편해진 헌왕비가 앙칼진 목소리로 명령했다.
“이 계집을 당장 내 처소로 끌고 가서 매우 쳐라!”
상전의 명을 받은 태감들은 유달리 몸집이 작은 궁녀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 넣고 그녀를 들어 올렸다. 상황을 보다 못한 연주가 입을 열었다.
“멈추어라.”
연주는 예의 우아한 걸음걸이로 헌왕비를 향해 다가갔다. 뒤늦게 이쪽으로 오고 있는 연주를 발견한 헌왕비는 못마땅한 얼굴로 빈정거렸다.
“이게 누구야. 승설군주가 아닌가?”
“오랜만에 뵙습니다, 헌왕비마마.”
“우리 군주께서는 여전히 마음이 바다처럼 넓어서 이런 작은 일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시는군. 한데 자네, 일개 번왕의 여식 주제에 내게 할 말이 고작 그것뿐인가?”
예전 같으면 손위 동서인 연주에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몸을 낮췄을 헌왕비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한 사람은 황제의 며느리. 그리고 한 사람은 왕부의 군주.
물론 군주라는 지위가 왕비에게 괄시를 받을 만큼 하찮지는 않았다. 다만 예법을 따지자면 이제는 연주가 헌왕비를 향해 예를 갖추는 것이 마땅한 상황이었다.
“송구하옵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연주는 뒤늦게 무릎을 굽히며 헌왕비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헌왕비는 고개 숙인 연주의 정수리를 한참 내려다보다 코웃음 치며 말했다.
“하! 평해왕의 적녀께서 직접 나섰기도 하고, 한때 형님, 동서 하며 지낸 정도 있으니 내 특별히 저 궁녀는 벌하지 않음세. 하지만 저 패물함에 든 장신구는 아주 귀한 것이어서 말이야.”
“…….”
“자네가 저 궁녀 대신 이 패물함을 내 처소까지 옮겨 주겠는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무리 연주가 아랫사람이라 한들 궁인들이나 할 법한 일을 이렇듯 대놓고 맡기는 것은 명백한 모욕이었다. 그러나 어린 궁녀를 구하자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 연주는 별수 없이 바닥에 놓인 패물함을 들고 헌왕비의 뒤에 섰다.
‘예전에는 항상 내가 이 계집의 뒤에 섰었는데…….’
늘 맏며느리였던 연주 뒤에 서는 일에 익숙했던 헌왕비는 지금 이 상황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본래 계획에 없던 일이기는 하지만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오겠는가.
헌왕비는 이 기회에 연주를 단단히 골려 주기로 마음먹었다. 별것 아니지만 스스로 낸 잔꾀에 만족한 헌왕비가 품에 안은 애완견을 어르며 천연덕스럽게 앞서 걷기 시작했다.
“어머, 저기 좀 봐.”
“대체 무슨 일이래?”
“잘은 모르겠는데……. 궁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헌왕비가 승설군주를 부리는 모습도 다 보네.”
연주가 헌왕비를 따르는 동안, 궁인들은 몇 년 만에 지위가 완전히 역전된 두 사람의 처지를 보고 저마다 수군거렸다.
헌왕비는 연주와 저를 번갈아 훑는 시선들과 쑥덕대는 궁녀들의 목소리 덕에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헌왕비는 이참에 자신이 연주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더 널리 알리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 봄 사냥을 맞아 적하 행궁을 새로 단장했다던데. 처소로 가기 전에 미리 구경하고 싶구나. 어디부터 가 보는 게 좋겠느냐?”
“마마, 듣자니 이번에 새로 만든 벚꽃 길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하옵니다. 게다가 벚꽃은 마마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꽃이 아니옵니까?”
“그래. 이맘때의 벚꽃은 참으로 아름답지. 어서 그리로 가자꾸나!”
헌왕비는 마치 연주에게 들으란 듯 저를 부축하는 궁녀와 큰 소리로 떠들어 댔다. 그렇게 벚꽃 길로 향한 헌왕비는 연주를 끌고 행궁 곳곳에 숨겨진 명소를 샅샅이 둘러본 뒤 저물녘이 되어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고맙네, 군주 덕분에 안심하고 예까지 왔군. 자네도 잠시 후에 있을 연회에 참석하겠지?”
“예, 마마.”
“그럼 이따 보세.”
실컷 연주를 부려 먹은 헌왕비가 마음에도 없는 감사 인사를 늘어놓고 처소 안으로 사라졌다. 그 흔한 차 한잔 대접받지 못하고 문전 박대당한 모양새였다. 그러나 더는 헌왕비와 엮이고 싶지 않았던 연주는 소란을 피우기보다 말없이 돌아서는 쪽을 택했다.
처소 안에서 연주의 반응을 궁금해하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헌왕비가 빼꼼히 문틈을 살피고 돌아온 궁녀를 닦달했다.
“갔느냐?”
“예, 마마.”
“표정이 어떠하더냐?”
“아주 죽을상을 하고 돌아갔사옵니다. 종일 그 망신을 떨었는데 어찌 고개를 들 수 있겠사옵니까? 역시 마마께서는 총명하시옵니다!”
궁녀는 신이 나 주인에게 아부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진짜 재미있는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훗. 어디 두고 보라지. 연회장에선 더 따끔한 맛을 보게 될 것이다!”
* * *
그날 저녁, 황제는 거대한 연못이 있는 월량풍하(月亮風荷)에서 외국 사절을 환영하는 만찬을 열었다. 황실 일가를 비롯해 이번 봄 사냥에 초대받은 귀빈들은 이른 봄에도 연꽃이 무성한 월량풍하의 경치를 감상하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수많은 인파 사이로 듬직한 막냇동생 윤의 호위를 받으며 연회장에 도착한 연주 역시 형제들과 함께 미리 지정된 좌석에 앉아 풍경을 감상했다.
“아직 연꽃을 보기엔 이른 계절이라 풍경이 휑하지 않을까 했는데. 황실 정원사들의 실력이 대단하네요.”
“그래, 듣기로는 시기에 맞춰 꽃을 피우기 위해 정원사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하더구나. 하루에도 몇 번씩 저 큰 연못에 온수를 부었다고 하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도착해 황후와 함께 행궁의 대소사를 살핀 연주가 윤에게 말했다. 하지만 단순한 윤은 연꽃을 피우기 위해 온수를 부었다는 이야기가 좀처럼 와닿지 않는 눈치였다.
“한데 누님, 식물에 끓는 물을 부었는데도 꽃을 피울 수가 있습니까?”
“끓는 물이 아니라 빗물을 섞어 온도를 낮춘 물을 부은 거란다. 여름이 아니어도 꽃을 피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 것이지.”
“누님께선 별걸 다 알고 계시는군요.”
“실은 행궁의 정원사가 얼마 전 덕교궁에 찾아와 연못에서 가장 탐스럽게 핀 연꽃을 미리 선보이며 설명해 주었거든.”
연주와 윤은 무슨 큰 비밀이라도 나누는 것처럼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는 사이 석상처럼 뻣뻣하게 자리를 지키고 앉은 오라비를 발견한 연주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어떠세요?”
“음?”
“연못의 연꽃이요.”
“어떻긴. 당연히 아름답지. 내 눈엔 저 동쪽에 핀 홍연화(紅蓮花)가 가장 곱구나. 너는 어떠냐?”
“저도 동쪽에 핀 홍연화가 가장 곱다고 생각해요. 남매가 통했네요?”
“네가 연꽃 중엔 홍연화를 가장 좋아하니까.”
연주는 오랜만에 형제들과 나란히 앉아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문득 어디선가 날아온 따가운 시선을 감지하고는 맞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엽?’
그곳에선 정엽이 이쪽을 못마땅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꼭 웃지 말라고 협박을 늘어놓는 것만 같았다.
‘노려보는 것쯤이야. 어디 실컷 해 보라지.’
별당에서 다툼을 벌인 이후 처음 마주치는 정엽이었다. 연주는 이 유치한 싸움에서 절대 밀리고 싶지 않았다. 일부러 더 도도하게 정엽의 시선을 받아치던 연주가 이내 무시하듯 정엽에게서 고개를 돌려 다시 형제들과 환담을 이어 갔다.
“어이가 없군.”
정엽은 도무지 반성이라곤 모르는 연주의 태도에 실소를 터뜨렸다. 하지만 그의 기분이 어떻든, 황제는 술잔을 높게 들어 올리며 연회의 시작을 알렸다.
맛있는 술과 음식이 입을 즐겁게 하고, 악공의 음률과 무희들의 춤사위가 귀와 눈을 즐겁게 하니 연회의 분위기는 금세 무르익었다. 그 와중에 무희들 사이에서 조나라의 공주 혜음이 모습을 드러내자 연회의 흥겨움이 절정에 달했다.
“과연 조나라의 공주답군.”
“저 무희가 조나라 왕의 셋째 딸이라죠?”
공주는 연못 한가운데에 마련된 무대 위에서 자국의 전통춤을 선보였다. 한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 공주의 붉은 치맛단이 나선을 그리며 공중으로 솟구쳤다. 심장의 박동 소리를 닮은 타악기의 선율이 가슴을 두드리고, 공주의 탐스러운 머릿결처럼 드리운 구슬 줄이 서로 부딪치며 맑은 소리를 냈다.
피고 지는 것은 꽃인가, 사람인가.
불현듯 생각에 잠기노라면, 박자에 맞춰 야무지게 울려 퍼지는 공주의 손뼉 소리가 몽환을 갈랐다. 마치 제게서 잠시라도 눈을 떼지 말라며 엄포를 놓는 것만 같았다.
“아름답구나…….”
연주는 혜음공주의 호방한 기세에 이끌려 홀린 듯 춤사위를 감상했다.
공주는 춤을 추는 동안 초원의 바람이 되었다가, 내달리는 야생마가 되었다가, 창공을 솟구치는 보라매가 되기도 하며 자유롭고 현란한 몸짓을 선보였다. 다채로운 몸짓에 빠져 있으려니 무대 위에서 생동하고 있는 존재가 과연 사람이 맞기는 한 건지 알쏭달쏭한 기분마저 들었다.
저 춤을 이해하는 건 이곳을 굽어보는 밤하늘과 공주의 붉은 장화 끝에 반짝이는 방울 정도이지 않을까?
무릎에 먼지가 쌓일 때까지 춤을 춘다는 조나라 사람들의 생명력은 늑대처럼 강인하고 달처럼 변화무쌍했다. 그렇게 한창 이국의 신비로움에 매료돼 있는데, 또다시 연주를 향한 벼린 시선이 느껴졌다.
‘이번엔 또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