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66화 (66/161)

66화.

“마음으로 마음을 얻는다더니. 네 마음이 군주에게 그리 귀한 것은 아닌 모양이구나.”

“…….”

“그럼 나는 신의군에 볼 일이 남아서 먼저 가마.”

나는 누구에게 무엇을 내주어도 결코 소정엽을 이길 수 없단 말인가?

정엽의 마지막 말속에는 그가 황제에게 귀한 선물을 바쳐도 조정의 변변한 직책 하나 얻어 내지 못했듯, 연주의 마음 또한 얻지 못하리라는 조롱이 담겨 있었다. 어렵지 않게 정엽의 저의를 읽어 낸 헌왕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반면 헌왕을 뒤로하고 붉은 대문을 나온 정엽은 말 위에 오르자마자 실소를 터뜨렸다. 마음에도 없는 말까지 지어내며 제 심기를 건드릴 줄 알게 된 채연주가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헌왕의 정부가 되고 싶다는 망언을 늘어놓다니. 채신이 그 말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채신은 총명하기로는 따를 자가 없지만, 세상에서 제 누이가 가장 착하고 아름다운 줄만 아는 바보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연주의 망언을 곧이곧대로 전한다고 해도 믿기나 할지 의문이었다.

‘어쨌든 헌왕을 내쫓은 걸 보면 정신은 차린 것 같으니 앞으로 알아서 하겠지.’

발칙하기 그지없는 연주의 행동을 곱씹던 정엽은 말 머리를 돌려 바람처럼 달려 나갔다. 내키는 대로 거리를 질주하노라니, 어느새 제게 대들던 연주의 괘씸한 얼굴이 헌왕의 낭패한 얼굴과 겹쳐져 물에 젖은 붓글씨처럼 너울너울 흐려졌다.

* * *

연주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간 헌왕은 두문불출하며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세자부에는 매일 연주를 향한 헌왕의 선물이 차곡차곡 쌓여 갔다.

밤에도 빛을 발하는 야광주, 보는 것만으로도 귀하고 아름다운 공작의 깃털로 장식한 치마. 진주와 유색 보석을 알알이 꿰어 장식한 비단 담요까지.

그러나 연주는 헌왕이 선물을 보내는 족족 확인조차 하지 않고 모두 헌왕부로 돌려보냈다. 명백한 거절의 의미였으나, 헌왕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진귀한 선물을 보내왔다.

헌왕이 연주를 위해 준비한 선물의 가치가 올라갈수록, 사람들은 둘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연주가 언제쯤 헌왕의 구애를 받아 줄 것인가, 또 헌왕은 얼마나 진귀한 물건을 구해 연주의 마음을 얻을 것인가. 사람들은 두 사람의 관계를 두고 끊임없이 입방아를 찧어 댔다.

“이번에도 승설군주가 헌왕의 선물을 그냥 돌려보냈다면서?”

“벌써 헌왕이 승설군주에게 선물을 바친 지도 열흘이 넘었어요.”

“지금쯤 헌왕의 속이 새까맣게 탔겠군.”

“어디 헌왕의 속만 탔겠어요? 지켜보는 헌왕비의 속도 같이 탔겠지요. 말은 못 해도 진즉 숯 더미가 되었을걸요?”

연주는 거침없는 헌왕의 공세 탓에 하루하루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한 날들을 보냈다. 하지만 연주 못지않게 이 상황이 못마땅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헌왕의 아내인 헌왕비였다.

남편의 외도를 눈앞에서 번히 지켜보며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던 헌왕비는, 이날도 심사를 가라앉히려 후원 산책에 나서다가 때마침 왕부로 되돌아온 헌왕의 선물을 발견했다.

“거기 서거라.”

“왕비마마가 아니시옵니까. 무슨 일로 소인을 찾으셨는지요?”

“나는 네게 볼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네가 들고 온 물건에 볼일이 있다. 이것이 무엇이냐?”

매서운 눈빛으로 태감을 노려보던 헌왕비가 신경질적으로 붉은 비단을 들쳤다. 거울처럼 맑은 은쟁반 위에는 궁중에서도 황후만이 착용할 수 있는 순금 봉황 비녀 한 쌍이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하! 형수를 향한 헌왕 전하의 마음이 참으로 절절하구나?”

헌왕비는 눈과 귀가 있으면 모두 들으라는 듯 태감을 향해 날카로운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헌왕을 대신해 난데없이 된서리를 맞은 태감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몸 둘 바를 모르다가 헌왕비 앞에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럼 소인은 귀한 물건이 상하지 않도록 이만 들어가 보겠사옵니다!”

“저, 저런 괘씸한 놈을 보았나!”

이참에 심부름하는 태감이라도 붙잡고 성질 좀 부려 보려고 했더니 도망을 가? 체통도 잊고 씩씩대는 헌왕비를 난처한 얼굴로 지켜보던 궁녀가 주인의 소맷자락을 슬쩍 당기며 만류했다.

“마마, 고정하시옵소서. 전하께서 시키시는 심부름이나 하는 태감에게 무슨 죄가 있겠사옵니까?”

“내가 지금 고정하게 생겼느냐? 너는 저 태감 놈이 들고 돌아온 선물이 무엇인지 보지 못한 게야? 다른 것도 아니고 순금 봉황 비녀다! 네가 지금 내 앞에서 저 봉황 비녀의 의미를 모른다고 둘러댈 셈이냐?”

“마마, 소인은 그런 것이 아니오라…….”

헌왕비의 진노에 냉큼 흙바닥에 꿇어앉은 궁녀가 변명하듯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봉황 비녀가 참새 비녀로 바뀌는 요술 따위가 벌어질 리 없었다.

‘지금 전하께선 승설군주에게 거래를 제안한 것이야. 평해왕부를 이용해 자신이 황제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면 중궁의 자리를 네게 주겠노라. 그러니 연왕을 버리고 제게 오라!’

부군의 저의를 헤아린 헌왕비가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짓이겼다.

“대체 전하께서 왜 이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시는지 모르겠구나! 쓸모를 다해 버림받은 계집을 거두어들여서 무슨 큰일을 도모하시겠다고?”

“마마, 어쨌든 이게 다 승설군주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겠나이까.”

바닥에 납작 달라붙어 용서를 구하던 궁녀가 간사하게 말했다. 그게 누구이건 마침 제 편을 들어 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헌왕비가 동조했다.

“하기야, 이 문제의 발단은 그 계집이긴 하지. 연왕과 이혼까지 한 마당에 계속 황궁을 얼쩡거리는 게 말이나 되느냐?”

“그러하옵니다. 잘 생각해 보면 이번 일도 다 승설군주가 헌왕 전하를 사로잡기 위해 벌인 술수가 아니겠사옵니까.”

“술수?”

“예, 선물을 계속 거절하며 헌왕 전하의 애를 태우려는 것이지요. 세상에 금은보화를 싫어하는 여인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더욱이 전하께서 보내신 선물은 모두 궁중에서도 찾기 어려운 귀한 물건들인 것을요.”

“흐음…….”

헌왕비는 온실 속 화초처럼 귀하게만 자라다 왕부로 시집온 여인이었다. 그간 궁중 여인들의 술수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던 헌왕비가 동요했다. 이를 눈치챈 궁녀가 매끄럽게 말을 이었다.

“승설군주가 선물을 마다한다는 건 헌왕 전하의 마음을 끊임없이 시험하며 관심을 끌려는 의도일 것이옵니다. 그러다 왕비마마께서 돌려보낸 선물을 보시고 헌왕 전하와 다투시기라도 한다면 마마께서 전하의 미움을 사는 건 물론이요, 두 분의 사이가 틀어지고 말 것이니 군주에게는 일거양득이 되지 않겠사옵니까?”

“그래, 네 말이 옳다.”

승설군주가 헌왕의 선물을 곧이곧대로 받았다면 그것대로 문제였겠지만, 거절하는 것에도 다 뜻이 있을 줄이야. 질투에 눈이 멀어 거기까지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헌왕비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왕비 시절부터 머리가 비상하던 계집이 아니더냐? 여우처럼 반반한 얼굴로 요사스러운 잔꾀를 부리는데 거기에 넘어가지 않을 사내가 어디 있을까!”

“그러하옵니다, 마마.”

“먼 옛날 제왕의 총기를 흐린 달기도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라고 하였다. 어쩌면 그 계집도 다를 바 없는지 모르지. 안 되겠구나. 내 조만간 그 계집에게 따끔히 혼을 좀 내 주어야겠어.”

“예? 마마, 무얼 어찌하시려고요?”

이거 일이 점점 재미있어지는걸? 불은 제가 지펴 놓고는 헌왕비가 들불처럼 타올라 연주를 비난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궁녀가 호들갑을 떨었다. 궁녀의 반응에 의기양양해진 헌왕비가 대답했다.

“조만간 황실 봄 사냥이 있지 않으냐. 봄 사냥은 종실 왕공과 내·외명부는 물론, 외국 사절들까지 모두 참석하는 큰 행사다. 그런 자리에서 망신을 당하면 정신이 번쩍 들겠지.”

“한데 군주는 이제 황실 사람이 아닌데 참석을 하겠사옵니까?”

“남해에서 올라온 해우왕자 채윤이 매일 입궁해 황제 폐하와 장기를 둘 만큼 총애를 받고 있지 않으냐. 그 덕에 폐하께서 문원왕세자와 승설군주까지 모두 이번 봄 사냥에 참석을 명하셨다고 들었다.”

“아, 그렇군요! 역시 마마께선 영명하시옵니다!”

손뼉까지 치며 왕비의 말에 맞장구친 궁녀가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며 귀를 쫑긋 세웠다.

“하면 내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봄 사냥에 입고 나갈 옷과 장신구부터 새로 마련해야겠구나. 어서 상의국(尙衣局)과 상공국(商工局) 장인을 왕부로 불러라.”

“예, 마마!”

이런 때 헌왕비의 심사를 잘못 건드리면 늙은 상궁들에게 뺨이 얼얼해질 때까지 매질을 당하거나, 다른 궁녀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우물에 처박혀 물귀신이 된다는 것을 잘 아는 궁녀가 부리나케 황궁으로 향했다.

홀로 남은 헌왕비는 어떻게 연주에게 망신을 줄 것인가 고민하며 즐겁게 내당으로 돌아섰다.

* * *

춘분이 지나 제비가 날아들고, 백성들은 논밭을 갈며 한해 농사의 시작을 알렸다.

황제 역시 선농단으로 나아가 농경의 신에게 풍작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고, 길일을 택해 황실 일가를 이끌고 적하(赤荷)로 봄 사냥을 떠났다.

한 달 동안 진행되는 봄 사냥은 외국 사절을 초대해 친선을 다지는 한편, 그들 앞에서 사냥 명목의 열병식을 거행하여 대화국의 부국강병을 뽐내는 행사였다. 이는 백성들의 생계가 달린 농번기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변국에 미리 위세를 떨쳐 두는 목적을 띠기도 했다.

이번 봄 사냥을 위해 적하로 향하는 이들은 어림잡아 수천 명. 대규모 행사를 앞둔 적하 행궁은 남은 짐을 정리하는 궁인들과 매일 밤낮으로 이어질 연회를 준비하는 요리사, 연회의 흥을 돋울 예인들로 북적였다.

그리고 연주 역시 황후와 공주를 따라 다른 손님보다 먼저 행궁에 도착해 있었다. 예전처럼 황후를 도와 궁인들을 통솔하고 어수선한 행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군주마마, 후궁마마들께서 머무실 처소 정리가 모두 끝났사옵니다.”

“유친왕 전하 내외께선 오늘 저녁이 아닌 내일 행궁에 도착하실 예정이라 하옵니다.”

“외국 사절들은 오후부터 차례로 들어와 폐하를 알현한다고 하옵니다. 폐하께선 그 후 황후마마와 함께 외국 사절들의 선물을 받으실 거라고 하옵니다.”

연주는 온종일 궁인들에게 둘러싸여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행궁을 정리하는 일은 해가 서쪽으로 조금 기울 즈음에야 얼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

오늘 저녁에 열릴 환영 연회에 앞서 황후의 동선까지 점검을 마친 연주는 처소로 돌아가기 위해 회랑을 따라 걸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가까운 곳에서 성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이년! 정신을 어디다 팔고 있는 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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